71화 삼고초려(三顧草廬)(4)
유형원은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걸 느꼈다.
한마디, 한마디가 속을 사정없이 긁었다.
대체 이런 경박스러운 인사가 어찌 조선 최고의 학자라는 칭송을 받는 것일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반계탕’이라는 단어가 어지럽게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삼분지계란다.
아예 대놓고 도발을 하지 않은가.
유형원은 고소를 삼켰다.
물론 고의로 궁지로 몰고, 삼고초려의 고사를 흉내내어 자극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만났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적당하게 처세하며 설득에 나설 줄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기분 나쁜 시늉을 하며 이대로 낙향하면 곤란한 건 송시열 본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다.
유형원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앞에서 능구렁이처럼 웃고 있는 송시열이라는 사람은 자신과 아예 합을 맞출 수 없다는 걸.
참으로 조악한 인사가 분명하니까.
그리고 유형원은 단 하나도 물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응? 무슨 말씀입니까?”
“아. 거기까지는 아닌가? 알겠네.”
“뜬구름도 그 정도면 예삿일이 아닙니다.”
송시열이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동요가 있는 것이다.
유형원은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상심에 빠졌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더군.”
“걱정은 무엇이며, 필요는 또 무엇입니까.”
“유람을 자주 다니더군.”
“예. 그래야만 유랑하는 백성의 삶을 직접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유형원은 분명히 봤다.
찰나 송시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자연스레 손짓하며 닦아내는 것을.
참으로 흡족했다.
“하하하……. 어느 곳의 어떤 이의 삶을 보셨나?”
“강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더군요. 위로 긴 방죽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큰 소나무 수십 그루가 방죽 위에 드문드문 떨어져 서 있는데 참으로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경치 구경하셨나?”
“그 뒤로 인가 십여 채가 줄지어 있더군요.”
“…….”
“또 그 뒤로 큰 산악이 하늘에 닿아있고 좌우로 송림이 울창했습니다.”
“유랑하는 백성과 풍류를 즐겼나 보군.”
“월곡이 골짜기를 이루고 거의 십여 리에 걸쳐 있더군요.”
“응? 월곡?”
“예.”
“자네 설마 지금까지 청계길을 말했나?”
“예.”
“청계는 도성 안에 있는데?”
“예. 한 이틀 청계를 둘러보며 인근의 백성을 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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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진짜 개새끼네.
그러니까 어디 멀리 간 게 아니라 도성 안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여행을 갔다는 놈이 하루 이틀 만에 도착했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아무런 감동도 없고, 스토리도 엉망인 삼고초려에 놀림당한 것이다.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셨네.”
“청계는 수시로 범람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지요.”
말을 자르려고 했는데 미수에 그쳤다.
실실 웃기만 하던 유형원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날카롭게 변한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태종께서 개천 준설 작업을 도모하셨습니다. 장의동 어귀로부터 종묘동 어귀까지 문소전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만들었으며,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및 혜정교 그리고 정선방 둥고와 신화방 동구 등에 있는 다리는 모두 돌로 만들었습니다. 52,800명의 인원을 동원한 한 달의 역사였지요.”
“…….”
“이는 개국 직후 도성의 기반시설을 마련한 쾌거였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폭우로 인한 지류와 세천의 범람을 막을 수는 없었지요.”
유형원의 말대로 태종 시절 대대적인 개천 준설이 진행되었으나, 집중 호우를 완벽하게 대비하지는 못하였다. 태종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다시 백성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더는 새로이 도모하지 못하였다.
“이후 세종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수문 2개를 추가로 설치하였지요. 이에 개천 본류의 물이 잘 빠지면서 과거보다는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과 동대문의 수구만 바깥쪽 땅을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백성에게 떼어주어 살게 하는 성은을 내리실 수 있었지요.”
“…….”
“이후에도 지속하여 개천 준설을 도모하셨지만, 그 규모는 3,000여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유형원의 입가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분위기가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분명 유형원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과거 태종과 세종의 선정(善政)이라는 것이었다.
“태조께서 문을 여신 조선은 이러하였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순간 최선을 다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지요. 하여, 태종 시절 5만여 명으로 정비가 잘 진행되었고, 세종 시절 3천여 명으로 미흡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조선은 어떠하였습니까. 무려 200년이나 청계천의 범람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대관절 이 나라 조선의 관리들은 청계천의 바닥이 다리와 닿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한겨울의 바람보다 차가운 목소리.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진심이 담긴 조소.
내 앞에 앉은 유형원은 이러했다.
“200년간 방치한 결과, 과거의 모습이라도 되찾기 위해서는 무려 100만 명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100만 명…….
그저 개인의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일부러 과장하여 사태의 심각함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청계천 역사는 1,500명씩 100여 일 동원하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하여 이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100만 명인가.”
“고작 1,500명씩 100여 일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형원은 조정의 한편에서 논의한 내용을 가볍게 짓밟으며 포문을 열었다.
“청계천 역사의 핵심은 결국 개천에서 나오는 토사(土砂)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개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토사를 운반하여 쌓아야 합니다. 이러한데, 1,500명과 100일이라는 규모와 시일은 개천 인근으로 토사를 쌓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토사를 개천가에 방치하면 비가 내릴 때 흘러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다시 개천이 막히게 될 것이니, 어찌 임시방편이 아니겠습니까.”
“…….”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200년이라는 장대한 방치를, 고작 임시방편을 동원하여 급한 불이나 끄려는 작금의 조선이.”
“…….”
“소생이 청계천을 예로 들었을 뿐, 이 나라 조선은 늘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었지요. 본질은 회피하고 말입니다. 이는 결국 백성의 고통일 뿐이니 그럴지도 모르지요.”
“…….”
“소생은 그저 이를 살폈을 뿐입니다.”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성의 준비태세도 이러한데 나라 전체의 재해를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
“그저 그것을 살폈을 뿐입니다.”
아. 이건 퇴각이 옳다.
이 주제로 더 말하면 전멸이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 낙향한다고 들었네.”
“권하셨지 않습니까.”
“…….”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유유자적 삶을 영위할까 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는 인제 그만둘 필요가 있다.
나는 훅 치고 들어가기로 했다.
“자네의 말대로 조정은 임시방편만 마련하여 겨우 수명을 연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새로이 권하겠네. 자네 출사할 생각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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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법 당황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오늘 나눈 대화 중에서 가장 당황스러웠다.
설마하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인맥을 동원하여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말을 하긴 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우암 송시열이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조정의 문제를 비꼬면서 송곳으로 찔렀다.
그런데도 이런다.
지금 출사를 권하는 건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사람인데 말이다.
유형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생 따위가 무슨 관복입니까.”
“사과하겠네.”
유형원은 청각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이는 분명 환청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꿈이거나.
그 또한 아니라면 앞에 있는 사람이 송시열을 껍데기를 쓴 존재이거나.
“그러니 출사해주게.”
“…….”
유형원은 자신의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껏 출사를 권하는 사람은 많았다.
스승과 벗들은 쉬지 않고 권했다.
그러나 한 번도 마음이 동한 적이 없었다.
전혀 내키지 않았다.
“반계.”
그런데 지금……
“출사해주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생 이런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시열의 제안에 심장이 움직인 것이 아닌가.
이유는 알 수 없다.
알 방법도 없고.
그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
시작은 조선의 변화였다.
얼마나 지속할지는 알 수 없으나 작금의 변화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이를 기록해야 했다.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모두 기록해야 했다.
그런데 모두가 변화의 원인이 송시열이라고 했다.
그랬다.
오늘의 시작은 송시열이었다.
해서, 과거의 기억을 덮고 지금의 송시열을 알고자 했다.
송시열의 독설처럼 역사에 자신의 자리가 없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었다.
그저 기록하고자 했을 뿐이다.
기록이 후대에 전해질지 알 수 없으나, 후대가 어떤 평가를 할 줄도 알 수 없으나 남기고자 했다.
아니, 후대에 전해지지 않더라도, 후대가 악평할지라도 괜찮았다.
그저 기록하고 논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새기고 또 새겼을 뿐이다.
그러니 출사 따위는 단 한 번도 품지 않았다.
오늘을 끝으로 도성을 떠나고자 했다.
그런데…… 왜…… 어찌하여……?
심장은 이토록 요동치는 것인가.
일렁이는 눈으로 송시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뛰었다.
심장이 울렁였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상대의 진심을.
때로는 말이 속내와 머릿속을 그대로 옮기지 못할 수도 있다.
“말은 하였으나 진심이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소인에게 손을 내민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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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마주 봤다.
어지간하면 방긋 웃고 싶으나 도저히 무리였다.
그리고 유형원의 입이 움직였는데 내용이 아주 도전적이다.
들으며 고민했다.
삐딱하기가 조선 최고 수준이다.
윤선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남인의 인사를 찾아가서 나를 괴롭히고, 삼고초려까지 흉내를 내는 걸 봤을 때만 해도 출사에 어느 정도 뜻이 있다고 여겼으나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특히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맹렬하다.
정확하게는 내가 출사를 언급하자 불쾌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는데, 아주 불편했다.
고민은 깊어졌다.
대체 이 문제 많은 천재를 어찌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유형원이 중대본이 결합하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건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속이 좁기로서니…… 내가 아니라 송시열.
어쨌든 내가 아무리 송시열이기로서니, 당대 최고의 천재인 유형원이 일하고 싶다는데 쫓아내는 미친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마땅히 설득할 방법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중대본의 남인 인사들이 다 뛰쳐 나갈 기세일세. 자네 때문에.”
“그래서 억지로 사과를 하신 겁니까.”
“그렇네.”
“지나치게 솔직하시군요.”
“거짓으로 대하고 싶으나 내 표정에서 모든 게 나오는 데 의미가 있겠나? 그리고 내가 한 말이 있는데 갑자기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도 설득력은 전혀 없을 것이고.”
“이거 함께 대의를 논하고 세상을 평온하게 만들자고 하여도 부족하거늘 이렇게 힐난하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아니, 마지막으로 묻겠네. 어떤 경우라도 출사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지금은 그렇습니다.”
내가 삼고초려를 하고 사과까지 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에 몰려서 사과한 건 맞다.
내가 다 인정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무슨 수로 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이제 삼고초려 놀이를 끝내야 할 때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있는 그대로의 송시열로 돌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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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송시열이라는 걸 누가 믿겠는가.
명백한 자신의 잘못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억지 논리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이가 송시열이다.
한 번도 논리에 ‘타인’을 존중하지 않았고, 오직 ‘본인’을 세우기만 했던 인사가 송시열이다.
그랬던 그가 ‘타인’을 위해 억지 사과를 하고 있다.
심장이 간지러웠다.
심장이 따가웠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만일…… 만약에……
-자네의 재능은 중대본에 꼭 필요하네.
-자네의 재능을 그대로 썩게 하는 건 무책임한 것일세.
이런 말을 했다면 더는 말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많이도 들었던 말이었으며,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 말들이었다.
유형원의 평생을 따라다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송시열의 답변은 아예 궤를 달리했다.
그래서 대화가 이어졌다.
“이것만은 알아두게.”
송시열이 지그시 쳐다봤다.
유형원은 피하지 않았다.
일렁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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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힘까지 주면서 내 시선을 마주한다.
불쾌함이 슬며시 올라왔으나 가볍게 흘려주며 말했다.
“자네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네. 자네의 호승심이 조선의 발목을 잡았으니까.”
“역사에 기록으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하시더니, 이제는 아예 역사의 죄인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사실이니까.”
“어째서 사실입니까.”
“서인과 남인의 뿌리 깊은 갈등을 덮고 이 땅의 재해를 막고자 의기투합한 기구가 바로 중대본일세. 그런데 자네가 이를 와해시키고 있네.”
“중대본의 와해가 소인의 탓이라는 겁니까?”
“물론일세.”
나의 단호한 답변에 유형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급기야 고개까지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중대본이 왜 흔들린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잘 듣게. 내가 자네를 찾은 건 반계 유형원을 잡기 위함이 아닐세. 그저 중대본의 많은 인사가 자네의 출사를 원하고 있기에 나선 것에 불과해. 그러니 더는 오만방자하게 굴지 말게.”
“하하하. 아쉽지만 소인도 대감의 인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빙의하지 않았다면 고작 유형원 따위가 이렇게 덤빌 수는 있었을까?
어림도 없다.
송시열이 온전한 송시열의 활동을 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이 그러할 뿐이었다.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분란을 조장하는 것뿐일세. 나는 이를 더는 좌시할 생각이 없고.”
“궁금하군요. 어찌하실지.”
“자네가 낙향하면 중대본을 떠날 인사가 많더군.”
나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었다.
“남인이 떠난다고 한들 중대본이 어찌 되는 건 아닐세. 애초 중대본을 설립한 건 재해를 방비하기 위함이었지, 탕평이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
“남인이 떠나면 서인 일색으로 중대본을 통제할 것이네. 능히 할 수 있어.”
분명한 경고를 던졌다.
더는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힘이 없어서 남인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이제 우암 송시열 대감답군요.”
“알았으면 조용히 낙향하게. 더는 나를 도발하지 말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사화가 없는 조정은 나 하나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게.”
이만하면 됐다.
아니, 한마디만 더 보탰다.
“임시방편이라고 하였나?”
“…….”
“그 또한 이 나라 조선의 조정이 온 힘을 다하여 마련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걸 알아두시게. 일국의 대사는 재야의 선비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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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떠난 뒤 유형원은 하늘을 바라봤다.
꽤 오랜 시간 말없이 달과 별을 살피다가 홀로 읊조리듯 말했다.
“환골탈태가 아니라 아예 다시 태어난 수준이로다.”
윤휴의 말대로였다.
송시열은 이미 과거의 송시열이 아니었다.
직접 보고 들었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말로 전해 들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말대로다. 작금의 조정이 구축한 평화와 중대본은 오직 그의 힘에서 비롯한 것이다.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유형원의 눈동자는 아련함을 담았다.
또, 그의 시선은 도성의 하늘을 넘어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참으로 포근한 곳이었다.
조선에 절망한 심신을 위로해준 곳, 부안현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고 다시 눈에 담을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어려워졌다.
그러나 답답하거나 아쉽지도 않았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읊조렸다.
“어쩌면 다시 조선을 연모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어느새 유형원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심장의 묘한 울렁임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