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역사에 기록될 능력(2)
송시열과 유형원이 자리를 비운 중대본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먼저 운을 띄운 사람은 역시 송준길이었다.
“시작은 반계의 괜한 욕심이었소. 호판. 안 그렇소?”
“대사헌의 말대로요. 당장 군량을 운송해야 하는데 수레의 제작과 보급을 언급하였으니 참으로 뜬금없긴 하였소.”
그랬다.
수레 제작과 보급이 아무리 큰 대의와 명분 혹은 실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당장 급한 건 10만 석의 군량을 운송하는 일이었다.
허적은 실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반계가 수레 보급을 역설하긴 하였으나, 이렇게 나올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더 놀라운 건 우암이 이걸 받았다는 것이외다.”
“나도 그것이 가장 괴이하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소. 그런데 상황은 더 희한하게 흐르고 있지 않소이까. 본부장의 말대로 수레 보급의 가장 큰 문제는 도로와 기술이 아닌 여론이었소. 한데, 이를 산림의 영수인 본부장이 직접 해결할 수도 있다고 선언했으니 반계로서는 반색할 수밖에 없지요.”
중대본의 실무를 허적이 담당하고 있을지라도 본부장은 엄연히 송시열이었다. 큰 틀의 방향을 정리할 때 송시열의 의중은 가장 짙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허적의 말은 정확한 핵심이었다.
만일 두 사람의 대화가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수레 제작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한데, 수레 1,000채를 대체 무슨 재원으로 제작하겠다는 건지…….”
근심이 가득한 허목의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가뜩이나 국고의 사정이 어려운데 수레 1,000채라니…….”
국고를 탕진하려는 송시열의 목적을 알고 있는 송준길은 허적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어물쩍 말을 돌렸다.
“나는 호판이 그 순간에 가만히 지켜본 게 신기하였소.”
“어떤 결정이 나더라도 상관없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곳간을 풀 생각이 전혀 없소.”
“하하하……. 어떤 방법이 있지 않겠소이까.”
“그러니까 그 방법은 하고 싶은 사람이 찾아야지요. 목장처럼 말이외다.”
송준길은 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은 침묵이 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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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받지 않아도 된다.
지금 조선의 사정을 고려할 때 수레 1,000채의 제작과 보급은 진짜 미친 짓이다.
수레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목재가 필요하고, 인부도 구해야 하며, 목수도 모집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낙후된 조선의 기술로는 불량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수시로 A/S까지 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에서 그 막대한 재원이 감당이나 되겠는가?
설령 대승적 차원으로 집행하려고 해도 허적이 동의할 리가 없다.
노발대발하며 나를 죽이려고 할 게 분명했다.
더 솔직하게 말해서, 수레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수레란 말인가.
수레에 실을 쌀 한 톨을 구하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대화의 시간을 가진 건 유형원의 생각을 제대로 듣고 싶어서였다.
뻔히 보이는 수를 쓴 이유가 너무 궁금하였다.
그나저나 모처럼 유형원이 얌전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될 수 있으면 이런 자세와 관점을 계속 유지하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먼저 운을 띄웠다.
“수레 보급의 당위성을 떠나서, 나라 사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닐세.”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1,000채를 단번에 제작하여 보급한다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이 이 시국에 이를 언급한 이유가 있을 것이네. 단지, 수레가 좋고 편하다는 이유 말고 정확한 사유를 알고 싶네만.”
한마디로 본질을 꺼내라는 말이었다.
수레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 중에서도 수레의 편리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조선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거의 없는 나라였다.
반대에도 늘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다.
그만큼 조선과 수레는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그러니 수레는 위대하다는 말은 제대로 된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웠다.
유형원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감. 수레를 활용하면 국내의 교역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알면서도 시행하지 않는 건 반역입니다.”
“뭘 또 반역까지 언급하나? 내가 듣고 싶은 건 기어이 이 시국에 수레를 제작하고 보급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일세.”
“대감께서는 무역의 확대를 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군요. 최소한 의주를 전면 개방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나는 멈칫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상단주 변승업, 김근행을 제외하면 송준길, 윤선거밖에 없다.
이 시절 전면 개방을 통한 무역은 섣불리 꺼냈다가는 엄청난 저항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철저하게 함구하였는데 유형원이 이를 알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대감의 행보를 몇 번이나 곱씹었습니다. 괴이하게도 조정의 재원을 고사시키는 방향이더군요.”
“…….”
“중대본을 수립하여 재해를 방비하려면 어떻게든 쌀 한 톨이라도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방향은 반대이지요. 백 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대감과 함께 움직이는 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관 변승업 말입니다. 특히, 위생국의 일은 그가 아니라면 운영조차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중도에 지원을 중단하면 중대본으로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국고는 바닥을 보이고, 변승업의 지원도 끊겼습니다. 하면, 어쩌겠습니까? 무역해야지요. 기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대대적인 무역 말입니다.”
진짜 괜히 천재 소리 듣는 게 아니구나.
성격만 좋았으면 내가 진짜 아껴주었을 건데.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찌 알았나?”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파악했습니다.”
“솔직히 대단하군.”
“재능이지요.”
재수 없어.
“좋아. 더는 부정하지 않겠네. 그러면 수레는 왜 나온 건지 알 수 있을까?”
“무역이 확대될수록 사람과 물화가 많이 모이는 곳에 교통의 요지가 생길 것입니다. 이곳에서 거주가 운임을 받고 화물을 운송하며, 도회지의 큰 상인들이 이 화물을 받아 각지로 분송, 조달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나라 전체가 교역의 흐름에 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의주와 동래가 전면 개방된다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품이 쏟아질 것이다.
이때 유형원의 말대로 수레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면 엄청난 파급을 낼 수 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이리된다면 군현에서 땅을 구하지 못한 이들도 수레로 운송하고, 짐을 나르며 삯을 받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유형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중대본의 수립과 대감의 길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수레를 제작, 보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말입니다.”
“자네 아주 무서운 말을 꺼냈군. 설마 수레 제작에 국고를 투입하자는 건가?”
“대감의 길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유형원이 볼 때 지금이야말로 수레를 보급할 수 있는 최상의 적기였을 것이다.
수레를 제작할 재원이 부족할지라도, 국고의 탕진이 목적인 내가 있다.
반대 여론이 걱정인데, 이것도 내가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의 부족은 어찌할 생각인가?”
“그 정도는 청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곧장 요동의 봉황성으로 사람을 보내서 세세하게 배우면 되겠지요.”
“그렇긴 하지. 한데 자네, 호판을 설득할 수 있겠나? 이는 그의 권한인데?”
“물론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정말 재수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계획이 제법 괜찮은데 말이다.
끝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군량의 운송은?”
“며칠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더 물어볼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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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다.
일부러 늦은 건 아니고 생각하다 보니 늦었다.
……사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요즘 누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로가 아주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재빨리 살폈는데 일단 나 빼고 모두 모여 있었다.
설마 지각 때문에……?
아니다. 지각 정도로는 이 정도의 상황이 연출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과연 허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나를 아예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송준길과 윤선거는 아예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머지 사람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절로 자세가 공손해졌다.
“혹시 내가 또 무언가를 실수하였소?”
“……본부장.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토록 펼치는 것이오?”
“일을 펼치다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하! 수레 1,000채를 약조하셨다고 들었소!”
“약조했지요. 그런데 그게…….”
“그 많은 재원을 중대본에서 어찌 감당할 수 있소이까!”
이것은 계약이 틀어지는 소리였다.
계약서는 없으나 분명히 구두 계약을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유형원을 쳐다봤다.
그런데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보는 게 아닌가.
느낌 바로 왔다.
저 새끼가 그냥 나한테 일을 다 떠넘긴 것이다.
진짜 아주 흉악한 새끼였다.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잠수함을 타러 가는 건데.
유형원 새끼를 믿은 나를 탓해야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됐고.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나는 넌지시 넘어가듯 말했다.
“내가 약조하였으나 재원과 관련한 일은 호판의 권한이오.”
“허. 본부장씩이나 되면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오?”
“회피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오. 이는 일전의 녹봉과는 사정이 다르오. 그때는 지엄하신 어명이 있었으나 이는 아니지 않소이까. 즉, 수레 제작을 위한 재원은 중대본 내부에서 논의된 하나의 안건에 불과하다는 것이오.”
“소생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호판 대감께서 사정이 어렵다고 하시니 수레 제작은 없었던 일로 하시지요.”
이 새끼 봐라?
내가 판을 엎으면 다시 주워 담을 줄 알았는데, 같이 난장을 펼치네?
일이 이렇게 되자 당혹스러운 사람은 결국 허적이었다.
나와 유형원이 의기투합해서 뭐라도 해보자고 나섰는데 재원을 이유로 일언지하에 잘라버린 셈이니 말이다.
물론, 재원이 없는데 무슨 수레를 만들겠는가?
그러나 이런 게 있다.
-재원이 부족하니 불가.
-재원이 부족하니 1,000채는 어렵고 일단 100채부터?
이 두 가지는 달라도 아예 다른 문제였다.
전자는 그냥 잘라버리는 것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대안을 마련한 것이니 말이다.
슬쩍 유형원을 쳐다봤는데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나선 게 분명했다.
반면, 허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그의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재원을 인수분해하고 있을 것이다.
수레를 어느 정도 제작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판은 내가 승기를 잡은 것이다.
아니, 나와 유형원이 승기를 잡았다.
의도치 않았으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