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역사에 기록될 능력(3)
나는 정회(停會)를 선언했다.
아무래도 허적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직후 나는 중대본을 나와서 머릿속을 환기했다.
원래 나는 수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랬다.
유형원의 세 치 혀는 마약, 그 자체였다.
그가 말한 수레 제작으로 인한 국고 탕진론과 상업 확대론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쉬지 않고 헛짓거리한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허적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국고 탕진도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확하게는 우리 상단의 준비와 맞춰서 진행해야만 한다.
당장 오늘내일 바닥을 보이면 그냥 망해버린다.
그러니 나는 허적이 호의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대감.”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유형원이었다.
“인기척 좀 내게.”
“깊은 생각에 잠기셨나 봅니다. 소생의 보폭이 여간 큰 게 아닌데 말입니다.”
“한마디도 안 지는군. 그나저나 자네 임기응변이 대단하더군.”
“그렇다기보다는 대감의 판단이 시의적절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감과 소생의 합이 꽤 괜찮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리만 된다면 무엇을 이뤄내지 못하겠습니까.”
응……?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일까?
허적을 장고의 늪에 빠트리긴 했는데, 합을 맞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고 있다.
“오늘 소생이 크게 한 수 배웠습니다.”
“…….”
“그리고 군량의 운송은 오늘 중으로 정리가 될 겁니다. 하면, 소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깨비다.
도깨비가 나타났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유형원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대체 무슨 일이 왜 발생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조선에 온 이후 처음으로 담배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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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윤휴도 고개를 절레 저었다.
“스승의 도리로서 제자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네.”
“소생도 벗이 잘못된 길을 가는 걸 만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볼 때는 어떠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과 소생은 반계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지요. 소생이 볼 때 반계는 본부장 대감과 진심으로 의기투합한 것 같습니다.
송시열과 유형원이 의기투합했다……?
물론, 삼고초려라는 아름다운 과정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결국, 중대본을 유지하기 위한 송시열의 정치적 행위였을 뿐이다.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도 두 사람이 진심으로 손을 맞잡았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일어났다.
누구보다도 유형원과 가까운 허목과 윤휴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반계를 잘 아는 자네와 나는 훤히 볼 수 있네. 보시게. 본부장이 수레 제작의 재원 확보의 약조를 어기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아무런 반발도 없이 수긍했네.”
맞는 말이었다.
평소라면 필시 유형원은 약조를 어긴 송시열을 매섭게 질타했을 것이다.
윤휴는 격하게 동의하면서 말을 보탰다.
“되돌아보면 누구보다도 냉소적이었던 반계가 중대본에 합류한 것부터 의아하긴 했습니다.”
“그렇지. 그간 자네와 내가 그토록 출사를 권하였는데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짐작할 수 있는 건 삼고초려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가 없기에 두 사람은 이를 더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의문은 따로 있습니다. 어차피 재원은 호판 대감의 권한이 아닙니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였다고 할지라도, 호판 대감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게 없지 않습니까.”
“음. 자네, 본부장의 말을 아예 듣지 않은 것인가?”
“예……?”
대답과 동시에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의 말이었다.
-일전의 녹봉과는 사정이 다르오. 그때는 지엄하신 어명이 있었으나 이는 아니지 않소이까. 즉, 수레 제작을 위한 재원은 중대본 내부에서 논의된 하나의 안건에 불과하다는 것이오.
윤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목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더 키울 생각일세. 아마 기어이 주상께 고하여 교지를 얻어내겠지.”
“허…….”
“호판이 쉽게 동의하여 집행하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네. 오늘 큰 마찰 없이 재원의 문제를 매듭지은 이유는, 어차피 어심이 개입할 것이니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이것이 바로 중책이겠지.”
“하면, 하책은 무엇입니까.”
“호판이 주상전하께 수레 제작의 불가함을 고하는 것이겠지. 한데, 그럴 수 있겠나?”
“휴. 어렵지요. 하나부터 열까지 어심의 보살핌이 내려지는 중대본입니다. 전무후무한 권한이 존재하는 이유는 불가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거늘, 어찌 전하께 상소를 올려 간하겠습니까.”
말은 서로 보태지면서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먼저 운을 띄운 건 윤휴였다.
“그런데 대체 왜 수레냐는 겁니다.”
“나 또한 그 점이 의아할 뿐이네. 당장 시급한 사안도 아닌데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논제였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보탰다.
“근묵자흑이라는 고사가 떠오르는군요.”
“실은 나도 그러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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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윤선거가 빤히 쳐다보자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격무(激務)에 시달리니 몸이 전처럼 말을 듣지 않네. 그러나 이는 백성을 위한 일이니 어찌 고달픔을 앞세우겠는가.”
“……양잠을 이르십니까?”
“바로 그러하다네.”
“양잠의 일은 윤휴가 다하지 않습니까……?”
“자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윤휴도 하고, 나도 하는 걸세. 함께하는 일이거늘.”
느닷없는 윤선거의 말에 송준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사실무근임을 강조하듯 가슴까지 쾅쾅 쳤다.
윤선거는 눈치를 슬쩍 본 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대감께서는 높은 이름을 내어 군현에 전하셨고, 실질적인 실무는 윤휴가 다 하지요.”
“아니, 미촌.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이름값을 얻고자 고생한 세월을 왜 제외하나?”
“음. 셈을 그렇게 하신다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자네 계속 이러긴가?”
“송구합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습니다. 아무쪼록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꾸준하게 한마디씩 하는 윤선거였다.
물론 워낙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시선은 여전히 먼 산을 향해 있었고, 목소리는 낮았다.
송준길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말을 많이 하는 건 반가운 일이긴 한데, 조금만 더 빨리할 생각은 없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네. 아. 지금보다 크게 말하면 더 좋고.”
“대감은 어찌하여 늘 잔소리를 하십니까……?”
“……느릿느릿 송곳으로 찌르니 더 아프군.”
송준길은 말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가벼운 농은 여기까지 하자는 의미였다.
윤선거 역시 동의하였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암과 반계가 형식적이나마 의기투합했을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삼고초려 와중에서 이 내용으로 서로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크겠지. 어쨌거나 수레 제작으로 국고를 줄일 생각이겠지. 완성된 수레는 대외무역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것이고.”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군량 운송은 여전히 언급이 없습니다.”
“일부러 꺼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기 어렵군요.”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건 따로 있네.”
이번에도 윤선거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끄덕임이었으나 송준길은 의미를 파악했다.
“자네도 마찬가지인가 보군.”
“예. 대체 왜 수레냐는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산적한 사안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수레 제작을 꺼낸 건지 이해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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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적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늘 평정심과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중대본에 합류한 이후로 평정심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부드러운 미소 대신 썩은 미소만 남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아니, 원흉은 오직 한 명, 바로 송시열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송시열.
그냥 보면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결론적으로는 놀고 있다.
자연스레 그가 발의한 일들도 모두 자신이 처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1,000채의 수레를 대체 무슨 수로 제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허적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고를 동원하여 수레 제작을 하는 건 어려웠다.
물론 1,000채가 아니라 100채 정도라면 진행할 수 있다. 그런데 조정의 정책이라는 건 이처럼 단편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었다.
100채의 제작은 100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할 때 고작 100채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수레의 부족이 거론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200채, 300채…… 1,000채 제작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송시열이라면 필시 그리 나올 것이다.
그는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차단해야 한다.
또, 반대의 흐름도 있다. 고작 100채로는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수레 무용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파급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단지 수레 100채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조의 수장으로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냉철한 판단이 확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레 제작은 무리입니다.”
읊조리듯 말하자 침묵을 유지하며 옆을 지킨 윤선도가 운을 띄웠다.
“호판. 재원이 그렇게 부족한가?”
“이번 일은 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중대본이 어찌 운영될지를 결정하는 방향의 문제이지요.”
“방향의 문제라.”
“예. 중대본이 수립된 이후 지금까지 본부장은 쉬지 않고 일을 펼치고 확장하였습니다. 그 방침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아 국고는 바닥을 보일 겁니다.”
윤선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하나의 의문을 제기했다.
“호판. 만일 본부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반계가 수레를 계속 역설할 수 있었을까?”
“어렵지요. 애초 반계가 수레를 처음 거론하였을 때 중대본의 분위기는 당황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 그때 본부장이 재빨리 수레 불가론을 언급하며 분위기가 환기되었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 상황에서 자연스레 본부장에게 말려 들어간 것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불가론을 꺼냈을 수도 있네.”
만일 윤선도가 수레 불가를 거론했다면 유형원의 안건은 시작부터 좌초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지금 되돌아보면 상황은 참으로 고약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1. 유형원의 제안.
2. 본부장 송시열의 반대.
3. 실무 책임자 허적의 제동.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송시열의 본부장의 권위로 실무 책임자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허적은 송시열의 발언을 차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일 최초 불가론을 주장한 사람이 윤선도 혹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나의 의견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론을 형성하며 유형원의 수레 제작을 좌초시켰을 것이고.
허적은 동의하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볼 때 본부장과 반계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유도한 것일세. 그래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할까 하네.”
“가설이라니요?”
“이대로 수레 제작이 좌초된다면 본부장과 반계는 어찌할까?”
갑자기 이게 무슨 음모론인가.
허적은 눈을 껌뻑였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단호하게 내쳤을 것이다.
하지만, 남인 최고의 정략가 중 한 명인 윤선도의 말이었다.
상황을 분석하는 그의 능력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내 생각에는 군량 운송을 위한 하나의 명분이 아닐까 싶네.”
“명분이라고 하셨습니까?”
“애초 가장 중요한 건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10만 석의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었네. 한데, 수레 제작이 제안했지. 그리고 반계가 뭐라고 했나. 1,000채를 제작하면 군량은 순식간에 옮길 수 있다고 하였어. 상식적으로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한 일이네. 그런데 본부장과 반계는 장담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 군량을 운송하기 어려우면 그저 그렇게 말하면 될 일입니다. 한데, 뭐하러 이토록 복잡한 수를 쓰겠습니까.”
“답답하군. 운송을 할 수 있으니 그 수를 쓴 것일세.”
“예……?”
“반계를 모르는가? 성리학적 경지가 우리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는 늘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시하였지 않은가. 그는 기어이 10만 석의 군량을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여 운송해낼 것이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계속하여 함구 중이고.”
괜히 유형원을 백만 대군의 보급을 해낼 수 있는 인재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가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면, 선생께서는 수레 제작을 동의해주지 않으면 군량을 운송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수레를 꼭 제작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긴 할 것이네. 물론 그 방법까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기어이 1,000채를 제작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 것이네. 그는 생각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호판. 차라리 소량이라도 동의해주는 건 어떤가.”
“음.”
“반계 혼자의 일이라면 걱정도 없네. 그러나 본부장과 합을 맞추고 있지 않나. 본부장이라면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 일시 1,000채를 요구할 것이네.”
“그라면 능히 그럴 수 있지요.”
“암. 그는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일단 100채를 제작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게 국고의 부담이 덜할 것 같네.”
윤선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약간의 허점이 보이긴 하였으나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허적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100채로 진행하지요.”
“잘 생각했네.”
“그나저나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허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다 좋습니다. 두 사람이 형식적으로나마 의기투합한 건 알겠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수레 제작이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은 나도 그 생각을 했네. 작금의 정국에서 수레가 그토록 중요한 사안은 아니니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