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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75화 (75/298)

75화 역사에 기록될 능력(4)

회의는 다시 진행됐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허적을 바라봤다.

아무쪼록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나의 애끓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적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이것이야말로 통장을 확보한 사람의 여유일까?

정말 부러웠다.

“생각을 해봤는데 1,000채는 무리요.”

됐다.

불가가 아니라 무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수량의 축소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첫 삽을 뜰 수 있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100채로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좋소. 하면, 곧장 집행할 수 있겠소?”

“재원은 바로 집행할 수 있소만 인력을 구하는 것도 일이외다.”

비숙련 잡역부인 모군이나 기술자인 장인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사람을 구하는 건 돈이 문제지, 다른 문제가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재원을 확보했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내가 아는 장인이 있소.”

“본부장이요?”

“뭘 또 그렇게 놀라시오?”

“아. 혹시 일전에 언급한 모군보다 품삯이 적다는 사례로 언급하였던 그 장인들이오?”

“그걸 기억하고 계시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그들을 아직 신경 쓰는 본부장이 특별한 것이오.”

허적은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본부장. 재주가 뛰어난 장인이 모군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아야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냉정하게 따질 때 이는 조정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외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곱씹어봤는데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대학생 시절 친구의 경험담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최저시급이 4,000원 정도일 때였다.

인력시장에 나가서 아르바이트하러 갔더니 공장에 배치됐다.

여러 잡일을 했고 일당은 6만 원, 소개 수수료 1만 원을 지급하니 5만 원을 받았다.

만일 당시 공장에서 누군가가 최저시급을 받았다면 동일 시간 노동의 대가는 32,000원이었다.

즉, 공장에서 전문적으로 일하는 직원이 32,000원을 받을 때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한 사람은 50,000원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시장의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그렇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노동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인하여 말이다.

바꿔 말해서 처음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장인과 모군의 임금 격차도 같은 원리였다. 조정에 어느 정도 묶인 장인과 아예 자유로운 모군의 처지 차이가 이를 결정한 것이다.

심지어 모군의 임금을 체납할 경우 이자까지 줘야 하는 시장 원리가 구축되었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그러니 이미 조선은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적 요소가 노동 시장에 똬리를 튼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는 조정에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굳이 나서고자 한다면 장인의 임금을 인상해야 하는데,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의 선택지로는 아주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군의 임금을 삭감하면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혹시라도 모를 허적의 우려를 밀어냈다.

“구조적으로 그들의 불평과 불만을 해결하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있소. 그렇다면 그들의 숨통을 틀 수 있을 일을 내리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혹시 모군은 구하지 않고, 장인만 부릴 생각이시오?”

“역시 호판은 내 속내를 다 아시오. 만일 그리한다면 장인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지 않겠소?”

이건 아주 간단한 원리였다.

기술자가 일용직의 일까지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다.

몸은 고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사실 수레 100채를 제작하는 데 일용직을 대거 고용할 필요도 없다.

허적도 이것만은 반대할 생각이 없는지, 오래 걸리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장 수레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라고 들었소. 그러니 이리하면 어떻소?”

“좋은 생각이오.”

“농은 집어치우시오.”

“경청하리다.”

“처음부터 손재주가 좋은 장인을 적당한 수로 구하여, 아예 그들을 봉황성에 보내어 수레 제작 기술을 배우게 하면 어떻겠소?”

말 그대로 국비 유학생 제도였다.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들이 오가는 기간과 봉황성에 머물 기간의 비용은 따로 책정되어야 마땅하오.”

“…….”

당연한 일 아닌가?

유학까지 가서 기술 배워 온 뒤 나라를 위해서 일할 산업의 역군들이다.

그런데 유학비용을 안 준다면 누가 가겠는가.

허적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서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유학제도는 자기가 먼저 제안한 것이지 않은가.

심지어 나의 논리가 너무나도 완벽하고 명확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차라리 이리하는 게 부담이 덜하겠지.”

응……?

허적이 혼자 정말 작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혼자 중얼거렸다는 사실만 인지되었을 뿐 내용을 듣지는 못했다.

“호판. 미안하오만 내가 듣지 못했소.”

“별 내용 아니었소. 무조건 거기까지만 동의하겠소. 더는 곤란하오.”

“좋소.”

“무조건이라고 했소. 명심하시오.”

“물론이오.”

가장 중요한 건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유학생의 인원 아니겠는가.

몇 명인지는 나중에 말해줄 생각이었다.

흡족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 크게 웃고 싶어서 논의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쾅!

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훈련대장 이완이 악귀처럼 눈을 부라리면서 들어왔다.

아니, 훈련대장 따위가 초법적 기구인 중대본의 문을 박살 낸다?

참으로 건방진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참에 위계를 딱 잡아줄 생각이었다.

나는 자세를 돌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위엄을 보이며 딱 잘라서 말했다.

“훈련대장. 이게 무슨 짓이오?”

“하! 그건 내가 할 말이외다. 중대본이야말로 무슨 짓이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시오?”

“선대왕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소!”

“그러니까 뭘 상상하지 못하셨소?”

“선대왕 시절에 우리 훈련도감은 북벌의 대의를…….”

느닷없이 라떼 시작이다.

막으려고 할 때였다.

“모두 여기 계셨소?!”

갑자기 영의정 정태화가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랜만에 본다.

자주 볼 때는 짜증 났는데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그런데 나를 슬며시 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게 아닌가?

“참으로 얼굴이 좋아 보이시오?”

“갑자기 무슨…….”

“듣자니 집에 꿀단지를 숨겨서 맛있게 드신다고요?”

“아니,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해괴한…….”

“됐소. 그리고 훈련대장은 어찌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 것이오?”

“아니, 영상 대감. 소직이 대감께 소재(所在)를 보고라도 해야 합니까? 선왕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중대본이 수립되더니 문무백관이 영의정을 가볍게 여기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 이유가 저거였구나.

아니 그런데, 뭘 또 저렇게까지 말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이 말이야.

그리고 딱 하나 스치는 게 있었다.

이건 정확하게 해야 할 거 같았다.

“영상 대감. 혹시 꿀단지를 숨겼다는 이상한 말이, 소직이 꿀 빤다는 뜻입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기어이 영의정인 나를 우습게 여기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하! 나는 고생 안 하오! 됐소?”

“…….”

말을 말자.

되돌아보면 영의정 정태화는 피해의식이 좀 있는 거 같기도 하다.

아니, 있는 게 확실하다.

평소 언행을 되돌아봐도 그렇고, 여기까지 와서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완도 그렇지만, 정태화는 왜 온 거지?

궁금증이 치솟을 때 정태화가 갑자기 우렁차게 외쳤다.

“훈련대장 이완은 지엄한 어명을 받드시오.”

“!!!”

“!!!”

“!!!”

“!!!”

갑자기……?

어명……?

나도 그렇고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새 정태화는 멋지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무려 교지였다.

그 순간 일제히 예를 취했다.

이것은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무려 교지가 나왔는데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훈련도감의 병력을 동원하여 군량을 옮기도록 하라.”

“!!!”

“!!!”

“!!!”

“!!!”

진심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당위성을 떠나서, 지금 상황의 황당함을 넘어서 만약 이 내용을 미리 전해 들었다면 이완이 노발대발할 만했다.

조선의 최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군량을 옮기라고 하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솔직히 나 같으면 사방에 불을 내버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확한 전후 사정을 모르니 쉽사리 나설 수도 없었다.

“이…… 이 무슨……!!!”

이완은 화를 참지 못했다.

심지어 말도 못 했다.

너무 열받은 게 보였다.

그런데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중대본에서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이 양반아. 그게 아니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열받은 건 이해할 수 있다.

분위기 파악도 천천히 할 수 있다.

지금 중요한 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조선은 절차라는 게 있는 나라가 아닌가.

나는 이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훈련대장은 성은이 망극하지 않소?”

“하!”

“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성은에 감격했다.

지켜보던 모든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본부장이 왜 나서시오?”

“…….”

“주상전하의 교지를 수행한 건 영의정인 나 이거늘, 왜 본부장이 난입하냐고 물었소.”

“그저 틈이 보여서 나섰을 뿐입니다. 언짢으셨다면…….”

“그러라고 한 행동이겠지요.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외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곧장 투입될 것이외다. 훈련대장.”

“…….”

“훈련도감의 병력 전원이 말이오.”

이완은 정태화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나……?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내 옆에 있는 사람, 바로 유형원을 바라봤다.

“하나만 묻지.”

“물론입니다.”

“내 말은 들리지 않소이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나?”

“전쟁은 없을 것이니까요.”

“뭐……?”

“훈련대장!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소!”

“지금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있는 상비군을 활용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 조정의 위계가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는지……!”

혼자 끼어들어 고함을 지르다가 느닷없이 나를 노려보며 노발대발하는 정태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의 주모자가 유형원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형원이 이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군량 운송에 자신감을 보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훈련도감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운송하는데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진짜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말도 안 나올 정도였다.

유형원, 이 새끼 진짜 물건이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사였다.

눈을 껌뻑이고 있는데 나를 향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허적이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싸늘했고, 눈빛은 매서웠다.

주먹을 꽉 쥔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딱 봐도 열받아 보였다.

“이거 참으로 좋은 일이외다. 나라 사정이 어려운데 훈련도감의 군사가 군량을 운송한다니,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소이까. 가뜩이나 예산이 부족하였는데 이를 아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거늘, 이 또한 아니니 참으로 바람직하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나도 이해 못 하겠는데?

그리고 낚시한 사람은 유형원인데 나한테 왜 저래?

“본부장. 오늘 아주 잘 배웠소.”

“아니…….”

“소생 역시 본부장 대감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계속 당황하고 있는데 유형원 새끼가 나를 절벽으로 밀었다.

저 새끼를 보니까 본질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유형원은 대체 어떻게 이연을 만났을까?

아직 명함도 파지 못했는데……?

진짜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내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정태화는 아직도 노발대발하고 있다.

아니, 그런데 왜 나한테 저러는 걸까?

이완한테 당했잖아?

미치겠다. 진짜.

“본부장.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허적까지 이런다.

외롭고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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