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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76화 (76/298)

76화 역사에 기록될 능력(5)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것만 같았다.

아무리 물어봐도 유형원은 함구하니, 최종 결정권자를 직접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연은 묻기도 전에 피식 웃었다.

“훈련대장이 노발대발하는 걸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오.”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이완에게 어명 내용을 일부러 슬쩍 흘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더 궁금해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하. 신이 상황의 전후를 여쭤도 되옵니까.”

“아. 물론이오.”

이연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제 유형원이 나를 찾아왔소.”

“그가 전하를 말이옵니까?”

명함도 없는 사람이 군왕을 알현하였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온 근본도 없는 경우일까?

나는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게 맞기도 하다.

이 경우가 아니면 이연이 유형원을 불러야 하는데 이건 황당함을 아득하게 넘었을 수준이니까.

“아무렴 경이 나보다 당황했겠소?”

“황공하옵니다. 하오나 신도 상당히 당황스럽긴 하옵니다.”

“하하하. 이해할 수 있소.”

이연은 연거푸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어제의 일을 꺼냈다.

그러니까 어젯밤이었다.

*****

궐내를 거닐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이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전하. 신 유형원이라고 하옵니다.”

유형원……?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이연은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는데 관복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출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돌발 상황에 사색이 된 내관이 서둘러 나섰다.

“참으로 무엄하시오. 어찌 감히 전하의…….”

“되었다.”

“예. 전하.”

이연은 내관을 가볍게 물리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입궐하였다면 관원이겠으나, 복색을 보아하니 관원이 아니다. 하면, 중대본의 사람인가?”

“그러하옵니다.”

“일찍이 중대본을 수립할 때 관리가 아닌 인원의 충원은 매번 고하지 말라 일렀다. 이는 중대본이 재해를 방비할 때 불필요한 절차를 최소화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지금 나를 따로 찾아온 건 무슨 연유인가?”

짧은 몇 마디였으나 이를 곱씹을수록 유형원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리원칙을 따진다면 자신은 지금 끌려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차분하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상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와 중대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듣고 무작정 달려오긴 했으나, 이는 예상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신 유형원, 감히 전하께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청할 것이 있다? 중대본의 본부장은 송시열이며, 실무 책임자는 허적이다. 한데, 그대는 그들을 통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도 되겠는가?”

“실은 그러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관원이라고 할지라도 원할 때 군왕에게 바로 고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일개 사대부라면 더 말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운을 띄워보라.”

이연의 반응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서론이 괜찮다면 독대까지 허락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유형원은 다시 크게 감탄했다.

이토록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혹여 고할 수 없을 상황을 대비하여 상소까지 준비하였는데, 보아하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훈련도감의 일이옵니다.”

“훈련도감이라. 그래. 어떤 일인가.”

“개혁이옵니다.”

“…….”

훈련도감은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었다.

그런데 이를 개혁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이연은 헛웃음을 삼키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참으로 깊었다.

아니, 자신감이 넘쳤다.

이연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다시 말하라.”

“개혁이옵니다.”

“중대본에서 훈련도감의 개혁까지 손을 대고 있을 줄은 몰랐군.”

“재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훈련도감을 개혁해야 하옵니다.”

“하하하. 참으로 대범한 인사로다. 참으로 대범해.”

이연은 호탕하게 웃었다.

심지어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며 말했다.

“중대본 이전의 행방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은 부안현에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상경하여 스승과 벗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누구인가?”

“신의 스승은 위생국 국장 허목이옵니다.”

“허. 하면, 벗은 누구인가.”

“윤휴이옵니다.”

“하면, 그들이 천거하여 중대본의 일을 하게 되었나?”

“그것은 아니옵니다. 신은 본부장 송시열이…….”

유형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삼고초려로 신을 설득하였사옵니다.”

“삼고초려? 본부장 송시열이 직접?”

“그러하옵니다. 부끄럽지만 신을 제갈량의 부활이라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부지런히 일하지 않겠사옵니까.”

*****

여기까지.

나는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눈을 껌뻑거리면서 이연을 바라봤다.

“아뢰옵기 황공하옵니다만, 유형원이 진실로 그리 말했사옵니까.”

“물론이오. 경이 삼고초려를 했다고. 제갈량이라고 하면서. 아니요?”

미친놈이 명함을 따로 파서 사기를 치고 다녔구나.

또, 내게 사건의 재구성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자기도 사람이면 제 입으로 절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숨기고자 어색하게 웃었다.

“……진실이옵니다.”

“그렇겠지요. 설마 그가 군왕을 능멸하였겠소?”

“그, 그러하옵니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 분명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상황을 계속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숨이 턱턱 막히고 수염까지 파르르 떨렸으나 침착해야 했다.

내가 여기서 허튼 말을 하면 뒷감당이 어렵다.

“하여, 독대하셨사옵니까?”

“독대라고 말할 정도로 거창하지는 않았소. 그저 주변을 물리고 그의 말을 경청하였을 뿐이니까.”

그게 독대잖아.

꼭 사방에 막힌 공간에서 노닥거리는 것만 독대가 아니지.

그래. 사실 이연은 이런 사람이었지.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을 가진 군주.

미관말직이라도 무명의 사대부라도 경청의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왕.

그저 나로 인해서 정치력이 구현되는 방향이 변했을 뿐, 사람의 본성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새 이연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

물론, 아무리 유형원이 대범하다고 할지라도 군주와 독대하는 상황에서 평정심만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겼다.

차분하게 숨을 내쉬며 한마디씩 꺼냈다.

“전하. 현재 훈련도감은 7천~8천여 명의 영속적이거나 장기 복무하는 정병으로 구성되어, 호조나 군향청에서 지원받거나 군현의 농민이 재정을 지원하는 보인의 역할을 하옵니다.”

조선의 주요 군영 중 훈련도감은 유일하게 조정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쉽게 정의 내린다면 사실상 직업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 유형원의 말을 듣던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론이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선왕 시절 본부장 송시열은 어영군은 상찬하면서 훈련도감의 폐지를 청한 바 있다. 혹시,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면 말을 삼가라.”

분명하게 불쾌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유형원은 잠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군주의 노기와 정면으로 만나는 건 너무나도 우매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

이런.

지난날의 송시열이 정말 많은 일을 했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연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 그러오? 경이 한 일이오만.”

“훈련도감의 병력이 7천 명에 육박하는데 국고에서 군량을 지급하니 재정적 부담을 걱정하였을 뿐이옵니다.”

“그랬지요. 대감은 인조께서 세우신 정초군(精抄軍)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소. 이는 번상 정병과 보인을 함께 사용하기에 국고의 부담이 적다는 판단에서 비롯하였소. 그러고 보니 이제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소.”

“무엇이옵니까?”

“경은 늘 개국 직후를 갈망했소. 되돌아보면 그간 경은 늘 우리나라의 군사제도를 개국 초의 오위 제도로 복구하자고 하였으니, 이제야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소.”

그게 또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유형원은 어찌 말하였사옵니까?”

이연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아무래도 유형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말을 한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러니까 교지를 내렸겠지.

스토리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재빨리 들었다.

*****

피부로 느껴지던 이연의 노여움이 멀어졌다.

유형원은 몸을 더 낮추며 말을 꺼냈다.

“인조께서 처음 정초군을 세우셨을 때 1,100명의 병력이었으나 148명만 복무하였습니다. 이는 재원을 감당해야 할 보인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기에 발생한 일이었사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상번하는 병력 1천 명을 확보하려면 번상 정병으로 차출할 수 있는 호수(戶首) 2만과 보인 6만을 확보해야 하옵니다.”

정초군은 훈련도감과는 달리 철저하게 보인 제도로 운영되는 병력이었다.

“하온데 전하. 훈련도감의 1천 정병을 유지하려면 보인은 8천 명이면 충분하옵니다. 이는 국고의 부담이 그만큼 크다는 걸 의미하옵니다.”

국고의 투입 여부에 따라서 보인의 규모가 8배에 육박하는 차이가 났다.

바꿔 말해서 직업군인인 훈련도감의 유지가 국고에 얼마나 큰 압박인지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유형원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전하. 훈련도감에 소속된 6천 명의 포수는 번상하러 오기 전에 자신의 토지와 가옥을 판 향군이옵니다. 만일, 하번이 되면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사옵니다.”

이번에는 훈련도감에 속한 포수의 처지를 절절하게 설명했다.

이연의 얼굴에는 상당한 흥미가 동했다.

제가 말하고 다시 반박하는 유형원의 화술은 지루할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오나 전하. 포수와 마대가 시전을 횡행하면서 돈을 긁어모으며, 상당수의 군사가 상업에 뛰어들어 기존 상인과 경쟁하는 일이 허다하옵니다. 이뿐만이 아니옵니다. 군관을 설득하여 상업의 조세까지 면제받사옵니다.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않기에 혹독한 훈련은 견디지도 못하며, 겨우 20여 리를 가면 음관(蔭官)처럼 씨근대고 엎어진 대합조개처럼 땀을 흘리며 하나둘씩 지쳐 쓰러지며 급기야 죽는 이까지 있사옵니다.”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대낮에 발생하는 도둑질도 제대로 막지 못하옵니다. 심지어는 불량한 무리와 직접 어울리며 백성을 핍박까지 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실상이 이러한데 훈련도감이 막대한 국고로 유지하는 조선 제일이 강군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까.”

말을 여기까지 마친 유형원은 고개를 숙이며 극진한 예를 취하였다.

이연은 잠시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유형원을 지그시 쳐다봤다.

“…….”

“…….”

침묵은 이어졌다.

유형원은 감히 나설 수 없었으며, 이연은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독특한 인사였다.

만일 훈련도감의 혁파나 축소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처지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훈련도감의 폐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오래 걸리지 않아서 유형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훈련도감의 구조적인 문제를 비판하였으나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국고의 부담을 이유로 훈련도감을 개혁할 때 포수의 사정만을 어찌 고려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훈련도감 군사들의 군기가 해이함을 언급했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유형원의 해박함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수치를 세세하게 언급할 정도로 업무 장악력이 높았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군사들로 인한 국고의 손실은 두루뭉술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의도가 훈련도감의 개혁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참으로 대범하도다. 개혁을 언급하였으나 개혁을 논한 게 아니라니.”

“황공하옵니다. 전하.”

“훈련도감의 군사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하라.”

드디어 이연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유형원은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군량을 운송하는 일이옵니다.”

“뭐……?”

“어차피 국고로 운영되는 병력이옵니다. 이참에 운송의 일을 맡긴다면 따로 역을 일으키지 않아도 될 것이고, 추가로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사옵니까.”

이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연은 유형원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그야말로 박장대소였다.

“이토록 발칙한 인사를 보았나! 하하하!”

그의 웃음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형원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

듣다가 내가 기겁하는 줄 알았다.

이 정도면 유형원은 미친 거고, 이연은 진짜 군자다.

나는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일전에 허목을 강력하게 압박했던 이연은 상황을 보며 정치력을 구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평소 이토록 관대한 모습이라는 건, 이연의 성정이 얼마나 어질고 너그러운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계 유형원이라고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참으로 발칙한 인사였소.”

“하온데 어찌하여 교지를 내리셨사옵니까.”

“그의 말이 옳기에 그리하였소.”

이연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훈련도감의 군기가 문란한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외다. 그러나 훈련대장 이완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이때 10만 석의 군량을 운송하는 역할을 맡긴다면 그야말로 묘수가 아니겠소?”

훈련도 똑바로 안 하니 노동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진짜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10만 석의 군량을 옮기는 대사(大事)를 추가 비용 하나 없이 진행하는 것이니 말이다.

유형원은 진심으로 재수가 없는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를 제갈량이라고 하셨소?”

“……꼭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하하하. 되었소. 제갈량만큼의 재주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속에 품은 뜻이 예사롭지 않은 인사였소. 더 지켜봐야겠으나 능히 제갈량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오.”

이럴 때 보면 소름이 끼친다.

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정확할까?

정말 이연의 말대로다.

유형원은 무려 반계수록을 작성하고 100년 뒤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내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나 그의 역량은 대단한 것이었으니, 품은 뜻이 얼마나 거대하겠는가.

이를 단 한 번에 만남으로 꿰뚫어 본 이연의 눈썰미는 역시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중대본의 일이 갈수록 기대되오.”

어쩌겠는가.

군왕이 기대한다는 데.

나는 엷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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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청하여 거처로 돌아온 유형원의 얼굴은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전혀 표정이 없다는 건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숨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며 지필묵을 꺼냈다.

벼루에 먹을 갈자 그 소리가 크게 울렸다.

“…….”

먹을 갈던 소리와 숨소리가 지배하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속한 무게가 참으로 묵직하였기에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자 유형원은 손을 움직여 붓을 들었다.

여전히 표정을 짓지 않고 붓을 움직였다.

달라진 건 그의 눈빛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주 보고 있노라면 따가울 정도로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유형원의 눈빛에는 예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랜 침묵을 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잔뜩 짓눌린 상태였다.

듣기에 따라서 물기를 느껴질 정도였다.

“엿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느새 붓을 내린 유형원은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재해를 방비하는 방향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점차 뜨거워졌다.

“어쩌면 드디어 진실한 개혁의 시대가 다가온 것일 수도 있다.”

그 순간의 유형원의 머릿속에는 방대한 양의 지식이 꿈틀거렸다.

그 모든 건 오직 조선의 개혁과 직결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세상을 공부한 건 오늘의 조선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점차 열기가 더해지는 목소리와는 달리 유형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나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건조함, 그 자체였다.

“첫 닻을 올렸으나 마냥 기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선은 조금 전까지 적은 글자로 향했다.

[조선(朝鮮)]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무작정 바라만 보기에는 조선은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니까.”

그런데도 유형원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왜……?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개국 초 이 땅을 뒤덮었던 열의를 엿보기를 바랄 뿐.”

한양도성 유형원의 바람, 그건 바로 개혁의 열의였다.

부안현의 유형원이 가졌던 조소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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