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붕당의 새 역사(1)
이건 참 난감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파급효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훈련도감 놈들 다 나간다고?
-그렇다니까. 이제 그놈들 안 보고 살 수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래. 어디로 가는지는 들었나?
-놀라지 말게. 남한산성으로 간다는군!
-오오! 정말?! 진짜 잘됐군!
-더 놀라운 일이 있네.
-왜? 남한산성에서 40일 동안 굶는 훈련을 한다던가?
-그건 당연한 일이고.
-그러면?
-아예 배 타고 강화도로 가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어.
-오오! 정말 잘됐군. 영원히 나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알지 않은가. 강화도는 한번 들어가면 꿀을 발랐는지 잘 안 나오는 법일세.
-사실 어디로 가면 어떤가. 한양 바닥에서 그 새끼들 안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지.
-그 말이 정답이지. 오늘부터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훈련도감 군사의 이동 소식에 너무나도 뜨겁게 환호하는 백성들이라니.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대로 훈련도감은 조선군의 상징이거늘, 듣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의 환호가 나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간 훈련도감이 민심으로부터 얼마나 지탄받았는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알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상인들의 분위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새끼들 나간다고? 어디로?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간다는군
-아예 안 왔으면 좋겠어. 그동안 그 새끼들이 칼을 차고 다니면서 우리를 얼마나 핍박했나.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훈련도감 새끼들 탓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나?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거야. 드디어 눈치를 안 보고 장사할 수 있게 됐어.
-이 사람아. 하늘이 아니라 임금님이지. 임금님이 그 새끼들 패악질을 치워버리신 거야.
-성군이시군.
-암. 성군이시지.
묘하게 이연에 대한 평가도 뚜렷하게 상승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상권을 왜곡해 오던 훈련도감을 멀리 보냈다는 일 하나로 발생한 결과였다.
그동안 훈련도감이 상인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혔는지 또 알게 됐다.
괴이한 민심의 파도를 들을수록 이완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그가 그토록 라떼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백성의 불신을 받는 오합지졸을 바라보는 이완으로서는, 어쨌든 북벌이라는 대의가 있었던 효종 시절의 튼실한 훈련도감이 그리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물론, 아무리 그렇게 이해하더라도 훈련도감의 수장으로서 이런 결과를 도출하고 방치한 점에서는 절대 호의적인 평가는 불가능했다.
진짜 백 보 양보하여,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훈련도감의 기강과 군율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군량 운송을 권하였을 때 이완의 모습은 절대 뼈 깎는 반성과 노력을 하는 군부의 수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절절한 반성과 고민이 있었다면 그런 반응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이완은 보신주의에 빠진 인사에 불과했다.
딱 이 정도로 평가했다.
물론,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깊은 고민에 빠지며 골치 아플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지금 조정이 합심하여 국방의 일에 전념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훤히 알았다.
물론 국방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이지만, 적어도 이 시절은 아니었다.
국방의 문제에 집중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는 일단 조선부터 살리고 난 다음에 집중해도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당장 훈련도감이나 다른 군영을 어찌할 생각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수준으로는 유지하는 게 차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쨌든 이완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가마가 육조거리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중대본의 지척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저기 앞에서 윤선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체통도 없이 말이다.
“본부장.”
나는 가마에 타고 있고 윤선도가 땅을 밟고 서 있는데도 땀 냄새가 확 올라왔다.
내가 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만약 상대가 허목 정도만 되었어도 땀 냄새난다고 싫은 말을 했겠으나, 윤선도는 잘못 건드리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인물이었기에 나는 어색한 미소라도 지으며 말했다.
“딱 거기서 멈추시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본부장이나 멈추시오.”
“해가 중천에 있으니 서둘러 중대본으로 가야 하오. 어찌 멈출 수 있겠소?”
“당장 가마를 멈추시오.”
“못 들으셨소? 중대본으로 가야 하오.”
“……내가 본부장과 농이나 할 정도로 한가해 보이시오?”
“아니요.”
“…….”
윤선도의 등장에 가마꾼들은 눈치를 보긴 했으나 나의 뻣뻣한 태도를 확인한 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중대본에 들어가기 전에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오.”
“알았으니까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를 합시다. 충분히 잘 들리니 딱 좋지 않소이까.”
“안 내리시오……?”
“조금 더 가서 내릴 생각이오. 너희는 고작 이 속도가 최선이더냐?!”
나의 재촉에 가마꾼들은 흠칫하더니 굉장한 속도로 이동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윤선도는 매우 놀랐고.
슬쩍 봤는데 이마에 힘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내 큰 보폭과 빠른 걸음으로 가마를 따라왔다.
“본부장. 긴히 할 말이 있소.”
“그러니 중대본으로 가고 있지 않소이까.”
“그 전에 해야 할 말이외다.”
“경청하겠소.”
“이…….”
“어허! 어찌 가마가 연로한 선비의 팔자걸음과 속도가 비슷하단 말이냐?! 너희가 이러고도 나의 가마꾼이더냐?!”
“달리겠습니다!”
“기근을 대비할 묘수(妙手)가 있소.”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목소리.
자연스레 가마꾼은 엄청난 속도를 냈고, 뒤쫓던 연로한 윤선도는 결국 지쳐버렸다.
그리고 나는 황급히 외쳤다.
“멈춰라!”
“!!!”
“후진.”
가마꾼들은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더 황당한 눈으로 응수해줬다.
“돌지 말고 후진.”
“…….”
가마는 후진했다.
순식간에 윤선도의 옆이었다.
“묘수라고 하셨소?”
“……기어이 가마에서 내리지 않으시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윤선도는 헐떡거리면서 힘겹게 말했다.
절로 측은지심이 발생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녹봉은 받아서 뭐 하오? 가마꾼이나 고용하지.”
“나는 본부장처럼 사치스럽지 않소.”
“녹봉을 받으면 써야만 누군가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않겠소? 이 간단한 이치도 모르시오? 그리고 쌍교 한 채 구해주려고 했는데 사치라고 하니 어쩔 수 없구려.”
“…….”
찰나 윤선도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살짝 스쳤다.
보아하니 쌍교를 운용할 재력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나중에 상황 보고 한 채 뽑아줘야겠다.
자고로 적당한 수준의 물품 거래는 상호 간의 신뢰를 더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백주에 길거리에서 심도 있는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외쳤다.
“근처 주막으로 간다.”
“예. 대감.”
“아, 아니. 본부장!”
“서둘러라. 선생께서도 서두르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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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도착해서 냉수 한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렇게 제법 기다리니 윤선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쓰셨소.”
“집무실을 두고…….”
“주막도 누군가가 와야만 수익을 내지 않겠소? 녹봉 받아서 뭐 하오?”
“하!”
“잘 먹으리다.”
“참으로…….”
윤선도의 입술과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심한 욕을 하려다가 애써 참은 것이 분명했다.
늘 어색하고 멀었던 나와 윤선도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냉수 한 잔 내밀었다.
윤선도는 냉큼 낚아채며 말했다.
“냉수나 마시는데 주막에 무슨 도움이 되오?”
“거. 농이었소. 내가 살 테니 편히 드시오.”
“하. 냉수로 생색내시오?”
“딱 보시오. 우리밖에 없지 않소이까.”
“…….”
“내가 다 빌렸소.”
진짜였다.
원래 있던 손님도 내가 값을 다 치른다고 하자 환하게 웃으며, 남은 음식을 한입에 다 욱여넣고는 사라졌다.
나에 대한 존경심을 잔뜩 실은 눈빛과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데 이 정도 돈은 지불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윤선도는 헛웃음을 짓더니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그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소리도 안정을 되찾고.
“그래요. 이제 들어보지요. 그 묘수라는 게 대체 무엇이오?”
작금의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중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하여도 기근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윤선도의 입에서 ‘묘수(妙手)’라는 말이 나왔다면 절대 예사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각 잡고, 분위기 제대로 하여 경청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물론 윤선도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중대본이 아니었다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여부가 있겠소? 그러니 서두르시오.”
“그간 생각을 해봤소.”
“그러시겠지요.”
“거. 사람이 말하는데 계속 끼어들 거요?”
“이런. 내가 결례를 범했군요.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오.”
윤선도의 얼굴색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닌지라 여유롭게 미소로 화답했다.
“……어업(漁業)을 크게 일으키는 건 어떻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하였던가.
밑도 끝도 없이 어업은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만일 윤선도가 아니었으면 그물에 묶어서 한강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삼면이 바다인 나라이니 물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히겠소이까. 나 송시열이 오늘 크게 배웠소. 진심으로 감탄하였소.”
“이보시오. 지금 비아냥거리는 것이오?”
“맞소.”
“어찌 이토록 무도할 수가 있소!”
윤선도의 목울대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단전에서 욕이 매서운 속도로 올라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 끊어야 한다.
윤선도의 평소 성정을 고려할 때, 지금 이 정도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준으로 세 치 혀가 움직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하면, 제대로 말씀해보시오. 대관절 어업으로 어찌 기근을 방비할 수 있소이까.”
“그물.”
“그물?”
“그렇소. 그물을 손본다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어류를 확보할 수 있소.”
그물……?
다소 의외이지만 어쩌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나의 선택지는 한 가지다.
무조건 잘 듣는 것이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가 보기보다 견문이 짧아서 모르는 게 참으로 많소. 그물이라고 하셨소? 자세히 언급해주시겠소?”
“들어보시오. 어획량은 결국 그물의 견고성과 직결하오. 종래 사용한 그물은 칡 줄기를 비롯해 피나무껍질, 삼 껍질 등이 있었소.”
이 시절 조선의 그물은 모두 천연재료였다.
강도 따위가 약할 수밖에 없으니 어획량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유추하건대 윤선도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 게 분명했다.
이러면 사정이 완벽하게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내 태도는 아주 공손해졌다.
“늘 존경하고 있었소. 선생.”
“왜 이러시오? 어쨌든 여러 사례를 확인한 결과 땡감의 진액, 소나 돼지의 피, 솔방울 진액, 해당화 진액이나 들깨 기름 등을 이용하여 갈피 또는 면사에 물을 들여 사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소.”
바람직한 말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를 경청하지 않으면 어떤 말에 집중하겠는가.
그저 최선을 다하여 청력에 힘을 다할 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외다. 종래 그물은 곧추 마르기에 기초하여 네모나게 뜨는 것이었소. 하지만 빗 마르기에 기초한다면 더 튼튼할 수밖에 없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만, 대충 더 튼튼하게 만들어진다는 말 같았다.
내가 세세한 실무까지 모두 파악할 필요는 없었기에 자세하게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제안자인 윤선도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그물어업을 크게 일으킬 수 있소. 주목망과 중선망 그리고 정선망이 있는데…….”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주목망은 주머니 모양의 그물을 말뚝 및 닻으로 고정해 조류를 따라오는 어류를 어획하는 어구였다.
반면, 중선망은 배를 타고 어류가 많이 모이는 어장에 도착한 다음, 조기 떼가 몰려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배에 실어 놓는 그물을 바다에 펼치는 어업 방식이었다.
“또, 장선망은 수십 켤레 혹은 수백 켤레의 닻을 채워 해저에 고정하는 방식이외다.”
됐다.
설명이 너무 길다.
이미 견적 다 나왔다.
어획량이 어찌 될지는 가늠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건 지금보다는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묻거나 따질 필요가 없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엇이 필요하오?”
간단하고 명료하게 동의와 지지의 뜻을 밝히자 윤선도는 조금 멈칫했다.
장황한 브리핑을 준비해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종래 어전, 방렴 어업은 2, 3명 정도의 인원으로 충분하였소. 하지만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면 최소 십수 명의 인원이 필요하오.”
나는 윤선도의 말에 숨겨진 내용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두세 명이 아니라 십수 명.
즉, 어업의 영역에서 고용 노동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경영의 성립 가능성이 열린다.
오직 그물의 교체로 이뤄내는 쾌거였다.
윤선도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러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든 영역에 곧장 적용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소. 하니, 조기잡이 어업에 먼저 도입하는 건 어떻겠소이까.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오. 장담하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그저 그물의 교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수명을 단축할 정도로 뼈를 깎는 노력과 시간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러하니 어찌 작은 의문이라도 꺼낼 수 있겠는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너무 쉽게 나온 동의였을까?
작은 반대나 불편함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윤선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묘한 여운이 남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사하오.”
윤선도가 만들어 낸 여운은 자연스레 내게 스며들었다.
참으로 포근한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감축드리오.”
축하의 뜻을 전하였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선생의 노고가 만백성의 심금을 훔칠 것이니 말이외다.”
이는 참으로 축하할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맙소.”
윤선도 역시 사양하지 않았다.
오늘 나와 윤선도는 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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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께서 이르셨다.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한다고.
진짜 그렇다.
정말 오래 살아야 한다.
안 그랬으면 이런 진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윤선도가 긴장하고 있지 않은가.
고작 정책 발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말이다.
심지어 땀까지 흘리고 있다.
무려 윤선도가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슬쩍 둘러보니 다들 눈을 껌뻑이고 있는 게 제법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
“…….”
“…….”
너무 놀라운 광경인지라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말 많기로는 어디 가도 지지 않을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그러했고, 시간이 흐르고 흘렀는데도 그러했다.
그냥 기다렸다.
무려 윤선도가 발제라는 걸 할 때까지.
당연히 그래야 했고, 너무나도 색다른 장면이라서 재미도 있고.
뭐. 그러했다.
“험험. 어찌하여 모두 말씀이 없으시오?”
민망함과 겸연쩍음이 절묘하게 섞인 윤선도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물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윤선도 역시 이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괜히 목을 긁으며 말을 꺼냈다.
“밤잠을 설쳤더니 고단하구려.”
아닌데?
컨디션은 엄청 좋아 보이는데?
빤히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윤선도는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하나씩 다 말하면 시간이 소모될까 우려되어 문서로 작성해왔소.”
그 말과 함께 주섬주섬 문서를 꺼내며 내미는 윤선도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미세한 수준이었으나 이미 시선은 확실하게 집중된 상태였기에 보지 못한 이는 없었다.
볼수록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역시 시작은 내게 말한 조기잡이였다.
말로 전해 들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심 감탄하며 한 장을 넘겼다.
그리고
“허…….”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나만이 아니었다.
“허…….”
“허…….”
“허…….”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윤선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 건 당연한 일이었고.
-석수어(石首魚) : 크고 작은 몇 종류가 있다.
첫째로 대면이 있는데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은 애우질인데, 큰 것은 길이가 한 길 남짓이고 허리가 굵어 몇 아름이나 된다.
……
면어(鮸魚)는 큰 것의 길이가 4~5자이고 몸은 조금 둥글며 황백색이고 등은 청흑색이다. 민간에서는 주로 민어(民魚)라고 부른다.
……
-치어(鯔魚)는 몇 종류가 있다.
민간에서 수어라고 부르는 치어와 사릉이라고 부르는 가치어가 있는데…….
……
-강항어는 민간에서 도미어라고 부르며, 큰 것은 3~4자이고…….
……
볼수록 어안이 벙벙했다.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단지 어종만이 아니라 서식지와 어획(漁獲)과 조리 방법까지,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한 정리였다.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백과사전 수준이었다.
조기 잡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대체 언제 이런 걸 집필하였단 말인가.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계속 놀라고만 있는 것도 문제였다.
이쯤에서 윤선도가 치고 나와야 하는 데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정말 윤선도는 학자이기만 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저 웃을 뿐이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윤선도 제안의 백미(白眉)를 꺼냈다.
“선생께서 제안한 방책의 가장 핵심은 민간의 백성에게 일러 강과 바다에서 수시로 어업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외다.”
“그렇소. 그물 제조 방법 역시 조정의 재원과는 무관하오. 곧장 시행하면 실은 없고 득만 있으니, 어찌 묘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이것은 가장 허적다운 답변으로 가히 백미 중의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재정에 아무런 부담을 끼치지 않고 기근을 대비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개척한다는 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심지어 어업의 영역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일으킬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더 논의할 것 없이 전하께 고하여 교지를 받으면 되지 않겠소?”
“물론이오. 곧장 전하께 고하겠소.”
결론 도출까지 어떠한 진통도 없었다.
그저 찬사만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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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 논의가 끝나고 한 명씩 자리를 비우자 윤선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옷소매를 슬쩍 움직여서 이마에 묻는 땀을 조심스레 닦았다.
딱 그때였다.
“선생.”
모두 퇴청했다고 여겼던 윤선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웃는 윤휴가 보였다.
윤선도는 멋쩍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험험. 백호. 아직 퇴청하지 않았었나?”
“하하하. 계속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끙. 그랬나?”
민망함이 가득한 윤선도의 행동에 윤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뤄진 논의의 부담감과 관련 있다는 걸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학문적 성취나 정치적인 능력과는 별개로 조정의 중대사를 직접 관장한 경험이 없었으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나왔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가볍게 넘길 일이었다.
오히려 이토록 엄청난 일을 도모해낸 윤선도에 대한 존경심이 생길 뿐이었다.
“선생. 이토록 엄청난 일을 준비하셨으면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소생도 슬쩍 이름이라도 올려서 공을 탐하였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허. 과하시네.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닐세.”
“이런. 지나친 겸양(謙讓)이십니다. 선생이 아니시라면 누가 감히 조선의 어업을 이토록 세밀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단 정리만 하셨습니까. 오늘 소생은 참으로 감탄하였습니다.”
진심 가득한 윤휴의 말이 이어졌으나 윤선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
윤휴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 혹시 소생이 결례라도 범했습니까?”
“아닐세. 그저 오늘의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러하네. 아니, 해내야 할 일이었지.”
“해내야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해내야 할 일.”
이건 무슨 말일까.
당대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윤휴였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기어이 해내야 할 일이라는 것일까.
“백호. 나는 남인과 서인의 대립을 종결지을 생각이 없네.”
“서, 선생.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작금의 조정은 붕당의 성립 이후 가장 태평합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토록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남인과 서인이 하나의 붕당으로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능한 일이 아닐세. 작금의 조정은 여러 요인으로 발생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해.”
“선생. 과하십니다.”
“하여, 탕평은 허구일세.”
“선생! 어찌하여 기어이 분란을 도모하십니까.”
“하여, 나는 남인의 승리를 도모할 것일세.”
윤선도의 단호한 말에 윤휴의 안색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불같은 그의 성정을 고려할 때 독설을 내뱉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정책으로서 말일세.”
이어진 윤선도의 말은 윤휴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피로 점철된 사화가 아니라, 오직 정책으로서 남인을 우뚝 세울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