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78화 (78/298)

78화 붕당의 새 역사(2)

몇 번을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윤선도가 내민 보고서는 단지 내일의 어업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민간에서 행한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낚싯바늘 2개로 숭어 낚는 법(압조법), 작살로 고래 잡는 법(자경법), 약으로 물고기 잡는 법(약어법), 보자기 덮어씌워 물고기 잡는 법 등 각지에서 행하고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작 보고서가 아니라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정책은 윤선도가 제안한 일이긴 하였으나 내용은 절대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그를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 할지라도 어찌 개인이 조선의 수산물을 그토록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백 보 양보하여 윤선도가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기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이 또한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남인의 조직력을 동원하였다……?”

이외에는 해답이 없었다.

그때였다.

“참으로 눈치가 빠르시오.”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다.

허적이었다.

“인기척 좀 하시오.”

“안 했겠소? 그랬는데도 반응이 없기에 그저 지나가려다가, 하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의아하여 지켜보았소. 시간을 허비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나 참으로 기쁠 따름이오.”

“거. 말씀을 왜 매번 그리하시오?”

“본부장. 이번은 그냥 넘어가실 수 없겠소?”

허적은 남인의 영수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내가 내린 결론이 옳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달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허울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남인의 영수라오. 고산 선생이 남인의 기층을 통하여 어업을 파악하는 걸 모를 수가 없지요. 고산 선생 역시 내가 인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문제냐고요.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남인 당수님?

내가 빤히 쳐다보자 허적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맞소. 우리 남인은 귀공이 버티고 있는 서인처럼 강력한 단일 지도력을 구축하지 못하였소. 그러하니 영수를 통하지 않고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의 부족함이 오늘의 쾌거를 이뤄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솔직히 말하자면 남인 내부의 사정은 전혀 관심이 없소. 또한, 그냥 넘기고 안 넘기고 할 일이 없지 않소이까. 어업의 발전은 바람직한데 말이오.”

“좋소. 하면, 서인은 어찌 대응하실 것이오? 이대로 있을 것이오?”

“듣던 중 당황스러운 일이외다. 구태여 서인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오?”

“허.”

너무나도 태평스러운 내 말에 허적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상황이 여기까지 흐르자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현실적으로 남인이 서인의 세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소. 그러나 올바른 정책의 생산과 집행이라는 건 세력만으로 이뤄낼 수 없거늘, 어찌 이토록 오만하게 행동하시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어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이리도 없소? 나는 남인의 영수로서 자존심조차 버리고 한 수 물러주길 청하였건만.”

“…….”

“다른 일도 아니고 사화로 점철된 붕당의 역사를 새로 정립하는 일이오. 어찌 그러시오?”

뭐……?

붕당의 역사를 새로 정립한다고?

진짜 뒤통수가 얼얼했다.

-----

흔들리는 윤휴의 눈을 바라보는 윤선도의 입에서 느리고 무거운 말이 이어졌다.

“피로 얼룩진 붕당의 역사를 우리 남인이 앞장서서 새로 쓸 것이네. 오늘은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일세.”

“……선생. 소생은 중대본의 일에 집중하였기에 세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더 소상하게 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붕당의 태동한 이후 조선의 역사는 상대를 제압하지 않으면 제압당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네. 제압이라는 건 결국 피를 보는 사화로 이어졌지. 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것일세. 어찌하면 끊을 수 있는가? 말한 그대로, 우리 남인의 정책이 조정의 곳곳에 만발하여 정책의 승리를 일궈내는 것일세.”

이는 정수였다.

남인의 정객으로 최전선에서 살아온 거인의 정수였다.

윤휴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윤선도의 말을 경청했다.

“고민했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남인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어찌해야 정책적 승리를 도출할 수 있을까. 농업을 육성해야 하나? 이제라도 상업을 도모해야 하나? 수십 번, 수백 번을 고민하였네. 번뇌였지. 나를 집어삼키는 번뇌.”

“선생…….”

“그러나 작금의 조선은 농업과 상업을 더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지 않은가. 제도의 개혁을 도모할 힘도 없어.”

“하여, 어업을 바라보신 것입니까.”

“그렇다네. 더 많은 쌀을 생산하거나 구해올 수 없다면, 물고기를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진실로 이리 생각하네. 하여, 남인의 역량을 동원하여 오늘의 일을 도모한 것일세.”

“허.”

“호조판서에게 언질은 하지 않았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 것이네. 남인의 영수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호판이니 말일세. 오해는 말게. 내가 다른 뜻이 있기에 그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짐을 나누고자 한 늙은이의 고약한 호의이니 말일세.”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뼈를 깎고 깎은 고민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윤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 대체 언제부터 이를 고민하셨습니까.”

“세종의 길을 들었을 때였네.”

“허.”

“물론, 그때만 해도 추상적인 가치에 불과하였지. 그런데 자네가 말하더군. 우암 송시열이 세종의 길을 제안하였다고.”

“…….”

“그 뒤 중대본이 수립되었네.”

허공을 바라보는 윤선도의 눈은 무수한 회한을 담고 있었다.

그간 가졌던 번뇌의 무게가 어떠하였을지 감히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일평생 남인의 조정을 원하였기에, 서인을 제압하기 위하여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지식을 취하였네. 한데, 그토록 증오하였던 송시열은 이미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지 않은가. 그와 견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는 고작 정쟁이나 일삼고자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내 생각이 참으로 옹졸하였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웠네.”

감히 어떤 말로도 답을 하기가 어려운 회한과 절절한 반성이었다.

윤휴는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시작은 그가 하였으나 흐름의 주도권까지 빼앗길 수는 없네.”

윤선도의 목소리에 힘이 들었다.

“나는 남인의 정책이 아니라 사대부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취할 것이야. 하여, 기어이 이겨낼 것이네. 그리하여 변화하는 붕당의 역사는 우리 남인이 주도할 것이네.”

윤선도의 눈동자에도 힘이 실렸다.

“이것이 바로 나의 꿈일세.”

참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꿈이 아니겠는가.

윤휴는 거세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허락하신다면 소생도 그 꿈에 등장하겠습니다. 선생.”

“물론일세. 세종의 길을 제창한 건 우암 송시열이지만, 반석에 올리는 건 우리가 될 것이네.”

“당연히 그리될 것입니다.”

-----

내가 모르는 역사였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었다.

지금 조선의 붕당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하여, 이번은 눈감아 달라고 한 것이오.”

“…….”

“냉정하게 평가할 때 남인은 당분간 숨을 좀 고를 필요가 있소. 그야말로 총력을 다하였기 때문이외다. 이때 본부장이 산림 영수의 권위로 나선다면 우리 꼴이 제법 우습지 않겠소?”

“…….”

“그러니 청하오. 한 수 물러주시겠소?”

이런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오. 당연히 물리겠소.”

“고맙소. 본부장.”

-----

이연이 천천히 말을 끌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우리 주상전하께서 또 왜 이러실까.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눈이 마주쳐서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어업을 확대하는 방안은 참으로 바람직하였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번에 남인이 총력을 기울였다지요?”

정말 정치 감각은 타고난 사람이었다.

가끔 하는 생각인데, 이연이 조선의 황금기였던 개국 직후에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원 역사의 그 엄혹하던 시절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려한 정치력을 보였던 사람이었으니,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내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이도, 문종 이향을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참으로 바람직하오.”

이연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사실 나라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았다.

과장 좀 보태서 이 정도만 해도 이연은 피비린내 나는 붕당의 역사를 종결한 성군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물론, 경신 대기근이라는 복병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서인과 남인,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이토록 아름다운 경쟁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모두가 전하의…….”

“괜한 말은 넣어 두시오.”

“황공하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소.”

“그러하옵니까……?”

“반응이 참으로 묘하오? 혹여 속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떠올리셨소?”

“신이 어찌 그러한 불경을 품겠사옵니까.”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이연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 농은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어업을 장려하고, 위생의 교화를 도모하는 건 참으로 바람직하오. 어업의 일은 정책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한 남인의 결심이었소. 위생의 교화로 서인과 남인이 아름다운 경쟁을 시작하였소. 한데, 왜 이리도 무언가 부족한지 모르겠소.”

“신이 불민하여 감히 어심을 가늠할 수가 없사옵니다.”

“사화가 아닌 정책의 경쟁을 통한 승리가 얼마나 위대한지 어찌 모르겠소. 한데, 어찌하여 서인과 남인의 공동 정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이오?”

그건 이미 이뤄지고 있다.

중대본에서 송준길과 윤휴가 합을 맞춰 뽕나무 심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중대본 자체가 서인과 남인의 합작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데 이연이 이를 굳이 언급했다.

뻔한 말을 하거나 듣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이연의 목적이 애초 불가능한 것이라면 시작조차 막는 게 옳다.

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전하. 어심에 붕당의 소멸이 있사옵니까.”

“하하하. 붕당을 무슨 수로 없애오? 서인과 남인을 없앨 수 있을지라도 붕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외다. 내가 원하는 건 정책을 공유할 때 허물어지는 붕당의 장벽이외다. 1년으로 부족할 수도 있소. 10년이라는 세월도 어려울 수도 있소. 그렇다 해도 도모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중대본의 테두리에서 이뤄지는 낮은 수위의 정책 집행이 아니라, 대대적인 정책 공조 말이외다.”

이러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예 달라진다.

내 표정에서 한결 가벼운 미소를 읽었을까?

이연 역시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볼 수 있겠소?”

말이 이어졌다.

“내 대에.”

어찌 불가함을 입에 담겠는가.

나는 극진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신이 기어이 해내겠사옵니다.”

“믿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