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교화(敎化)(1)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유형원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이었다.
낙향의 뜻을 품기 전이었다.
-반계. 어찌하여 노여워만 하는가. 조선의 현실은 단지 분노한다고 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닐세.
가장 믿고 의지하는 벗, 윤휴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불같은 성미였으나 늘 자신에게는 부드럽게 말을 전하였던 벗이었으나 그날만은 격앙된 어조였다.
-전조 고려의 마지막에 우리 태조께서 과전법을 도모하실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혁명 전야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일세. 작금의 조선은 개혁이 절실한 시기라는 걸 어찌 모르는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천금보다 귀한 말이었다.
아마 낙향의 뜻을 전하였을 때였을 것이다.
벗의 절절한 만류였다.
그리고 자신은 너무나도 차갑게 세상을 조롱했다.
-기회조차 박탈당한 세상일세. 나는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어.
-반계! 어찌하여 기회가 박탈당하였다고 여기는가!
-만일, 내게 도성을 설계할 기회가 있었다면 도로에 오물 따위가 넘치는 일은 없었을 걸세. 그런데 그게 가당키나 한가? 태어날 때부터 박탈된 기회이니 말일세.
-어불성설일세.
-나 역시 알고 있네. 그러나 나의 좌절은 이런 망상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네. 그러니 나를 잡지 말게.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법일세. 하나의 정책을 이뤄낼 때도 무수한 반대와 저항을 뚫어야 하며, 피칠갑을 한 상태로 고작 한 걸음만 나아갈 때도 허다한 법일세. 아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더 많네. 자네는 어찌하여 세상의 모순만 바라보고 작은 희망조차 찾지 않는 것인가.
윤휴의 언성은 올라갔으나 목소리는 티가 날 정도로 떨렸다.
아마 벗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움을 알았기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벡호. 그 모순이 조선의 전부일세. 구태여 나까지 휘말릴 생각은 없네.
-자네의 조롱이 향하는 끝에 있는 건 조선이 아니라, 수명을 단축하며 개혁하고자 하는 사대부라는 걸 알고 있나? 그 무리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말일세.
-조선은 자네를 품지 못할 것이네. 자네는 조선이 품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사람이니 말일세.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게.
-반계!
-훗날 기회가 된다면 부안현에 잠시 들르게. 내 정성껏 마련한 주안상을 대접하겠네.
기억 속에서 유형원은 끝내 벗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
참으로 모질었다.
현실의 유형원은 고통스러운 한숨을 쉬며 상념을 끝냈다.
“…….”
다시 마주한 도성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좁고 불결한 도성의 길이었다.
“…….”
모든 오물이 불결하고 좁은 도랑으로 흐르고 있었다.
도랑은 온갖 잡스러운 것들에 막혔고 아무런 방해 없이 도로로 흘러넘쳤다.
고개를 돌렸다.
두 마리의 나귀가 동시에 만나자 도랑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일국의 도성이거늘…….”
경국대전의 공전에 이르면 도로 양쪽에 각각 2척 너비의 도랑을 두도록 명시하고 있다.
조선의 심장부, 한양도성은 필시 이리 시작되었다.
개국 초의 열의는 이토록 담대하였다.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그토록 뜨거웠던 열의를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정비되었던 도로였으나 어느새 수시로 각종 오물이 쌓였고, 홍수 때면 자연스레 물이 범람하여 백성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도성의 백성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조정은 시설을 확충하기는커녕 정비조차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속이 상했다.
그래서 놀라웠다.
늘 노여워했던 과거와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백호. 자네는 내게 말했네.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라고.”
전혀 새겨듣지 않았던 말이었다.
늘 도성 전체를 뜯어고칠 생각을 하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좌절하고 조선을 증오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아니었다.
작금의 조선은 열의가 싹트고 있었다.
다만, 여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자네의 말이 옳았어. 도성을 설계할 기회를 박탈당해서 뜯어고칠 수 없다면, 대안을 수립하면 될 일이네.”
그래서 대안을 찾았다.
남은 건 이주할 백성과 재원이었다.
아니, 명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걸림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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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슨 날일까.
붕당의 새 역사라는 심오한 결론에 이연의 옥새가 찍혔고 그 여파로 미친 듯이 두근거려 잠을 설치고 있는데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심지어 허목이었다.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잠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면서 쳐다봤다.
“참으로 무례하오. 이 늦은 시간에 사가를 방문하다니.”
“하면, 내치지 그러셨소?”
그랬어야 했나?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나를 힐끗 본 허목은 곧장 앉아버렸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시다시피 궁핍하여 내어드릴 게 없소.”
“필요 없소. 무언가를 먹으며 할 말이 아니외다.”
“참으로 다행이오. 안 그래도 곳간이 텅텅 비었는데 과연 선각자시오. 허 국장이 이토록 사리분별이 정확하니 어찌 탓만 할 수 있겠소이까.”
“…….”
“한데, 무슨 말이시오? 이 늦은 시간에 무례하게?”
계속되는 도발에 허목의 볼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더불어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여기서 더 치고 들어가는 건 무리수이긴 하지만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었다.
딱 말하려고 할 때였다.
“본부장. 위생을 확립할 때가 됐소.”
하. 진짜.
이런 말은 더 일찍 했어야지.
그나저나 남인들은 참으로 욕심쟁이가 아니겠는가?
연속으로 홈런을 치니 말이다.
나는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허언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오.”
“내가 본부장과 농이나 할 사람이나 보이시오?”
“좋소. 대서사시라도 좋으니 들어보지요.”
위생.
비록 개념을 제시하긴 하였으나 이 시절의 역량이나 상황과 제대로 접목하는 건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나의 역할은 위생국을 세우고, 수장으로 허목을 앉히는 것까지였다.
나머지 일은 허목과 위생국이 이 시절의 수준에 맞게 위생을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느닷없이 달려오더니 위생을 확립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진행할지는 들어봐야겠으나 어떻게 되어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내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전광석화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을 한 나를 흘려본 허목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중대본이 아니었다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여부가 있겠소? 그러니 서두르시오.”
“그간 생각을 해봤소. 위생의 확립은 지금처럼 의술을 펼치고, 구황을 준비하며, 목욕 따위를 권하는 걸로는 절대 불가능하오. 결국, 위생은 백성이 자의든 타의든 직접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러하오.”
“너무 맞는 말이오.”
“하여, 규칙(規則)을 세워 백성을 교화하는 게 옳소.”
누가 사대부 아니랄까 봐, 이 순간에도 교화가 나온다.
하지만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규칙이었다.
참으로 흥미로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내용은 어렵지 않소. 우선 시작은 다섯 가지요. 첫째…….”
첫째, 먹다 남은 밥은 새 밥에 섞지 말 것.
둘째, 먹다 남은 음식은 끓여 먹을 것.
셋째, 코나 침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말 것.
넷째, 지저분한 물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말 것.
다섯째, 길 가면서 먹지 말 것.
정말 간단한 내용이었다.
교화와 규칙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의 관점에서 말이다.
사실 이런 내용을 내가 모를 수가 없다.
당연히 안다.
무조건 안다.
현대인이라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내용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지금껏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대 국가의 관례를, 과연 이 시절 조선에 쉽사리 적용할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규칙은 섣불리 적용하였다가 흐지부지되면 중대본이라는 기구의 위상만 갉아 먹게 될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정책의 실패보다 역풍이 거셀 수도 있다.
왜? 정책의 실패는 중대본의 역량을 넘어 조선의 역량 부족으로 평가할 여지라도 있지만, 사회적 규범은 아예 결이 다르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선언한 것인데,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냥 개망신이다.
동력도 떨어질 것이고.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때 해당 규칙들은 내가 현대인이기에 낮은 수위로 보일 뿐이다.
이 시절 조선의 시선으로는 너무나도 어렵고 수준 높은 규칙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할 때 합리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현실과는 아예 동떨어진 내용도 있었다.
당장 기근이 강약으로 지속하는데, 먹다 남은 밥과 새 밥의 구분은 백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체 밥이 어디 있어서 나누겠는가? 굶어 죽게 생겼는데 눈에 보이면 그냥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이뿐인가.
침과 지저분한 물을 아무 데나 뱉고 버리는 건 현대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또…… 됐다.
거두절미하고, 작금의 조선이 감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생국 수립 이후 위생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았다.
이 시절 조선이 감당할 수 있는 정책의 탄생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 수준 높은 규칙이, 내가 아니라 허목의 입에서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다.
무려 허목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해볼 만한 일이라는 걸 의미했다.
바로 이 순간 내 머릿속으로 스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었다.
‘교화(敎化)’였다.
교화(敎化).
가르치고 일깨워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만일 내가 숨을 쉬는 이 나라의 국호가 ‘고려’였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교화는 개나 줘버리라며 미친 듯이 조소를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국호는 무려 ‘조선’이다.
모든 위정자가 철학자인 나라.
모든 위정자가 사대부인 나라.
하여, 모든 위정자가 백성에게 교화한다.
조선의 역사가 증명했다.
조선의 성리학자가 조직적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할 때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지를.
그랬다.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위정자가 백성의 정신세계를 장악한 나라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교화는 그 어떤 창과 칼 그리고 붓과 펜보다 위력적이었다.
이는 실로 두렵지만 놀라운 일이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까 지금 허목은…….
“하지만 모든 사대부가 이를 숙지하여 힘을 모아 백성을 교화한다면 어찌 불가능하다고만 할 수 있겠소이까.”
조선의 성리학자를 총동원하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잠시 미친 것이다.
이렇게 우매할 수가 있을까.
내가 나에 대해서 잠시 잊은 것이었으니까.
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잠시 망각했다.
“남인과 서인의 영수가 모두 중대본에 있소.”
그랬다.
“교지가 내려오지 않아도 모든 사대부를 통제하고 설득할 수 있으니 해볼 만하지 않겠소이까.”
나는 송시열이고 제안자는 허목이다.
우리는 조선 사대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엇을 못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