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위기 혹은 기회(1)
이연은 크게 기뻐했다.
한눈에 봐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아예 입이 귀에 걸린 수준이었다.
지금껏 이연의 이런 반응은 경험하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참으로 바람직하오. 붕당의 경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말이외다.”
그랬다.
허목이 발의한 위생 교화는 서인과 남인의 아름다운 경쟁을 촉발하게 된다.
또 시간이 갈수록 두 세력의 교화는 자연스레 결합하여 더 큰 효과를 낼 것이니 이연의 기쁨은 당연했다.
“위생국 국장 허적이 발의하였다고요?”
“그러하옵니다.”
“어업도 그러하고, 뽕나무도 그러하고 남인이 크게 앞서고 있소.”
“그러하옵니다.”
“……그게 다요?”
아름다움이 만발한 세상인지라 생각 없이 대꾸했는데, 흐름이 딱 끊긴 느낌이 강렬하게 치밀었다. 과연 이연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빠르게 짧았던 대화를 복기했고, 원인을 파악하였다.
그러니까 서인도 뭔가를 해내라는 요구였다.
“전하. 조금 더 기다려주시옵소서.”
“기다려달라? 하하하. 이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구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내게 숨기셨소? 어디 간단하게라도 운을 띄워보시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제부터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는 뜻이었사옵니다.”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연은 헛웃음을 지으며 교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준비한 게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온데 전하. 어찌하여 교지를 내리지 않으시옵니까.”
“아.”
조금 전에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느라 그렇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은근슬쩍 시간을 끌고 있다.
이상했다.
분명 흥미를 보였는데……?
관심도 보였고……?
일필휘지로 교지도 작성됐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작업은 아직이었다.
아니, 왜 교지에 옥새를 안 찍어주냐는 것이다.
그랬다.
옥새가 권능을 발휘하지 않은 교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위생 규칙 중 어심에 걸리는 것이 있사옵니까?”
“있으니 옥새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겠지요.”
“신이 불민하여 어떤 사유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사옵니다.”
“사족을 앞세워 위생 규칙을 백성에게 교화하게 한다.”
“그러하옵니다.”
“수령이 아니라?”
멈칫했다.
지금 이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나도 정확하고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표정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아무리 이연의 기본 성정이 관대할지라도, 군왕의 통치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증거를 지금껏 쉬지 않고 겪어왔다.
이연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왕실의 권위, 위엄 등 이런 종류에 대해서는 진심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 말이라도 꺼내서 뭐라도 해야 했다.
“전하.”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기에 사대부가 백성을 챙기는 게 맞긴 하오.”
“전하. 신이 어찌 그토록 망측한 생각을 하였겠사옵니까.”
“망측한 생각이라.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셨소? 한데, 이해할 수 없소. 위생 규칙을 법도로 정하고 세울 것인데, 사족은 무슨 근거로 감히 나서는 것이오? 법도를 왜 관리가 아닌 사대부가 전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만.”
이거 실수 제대로 했다.
여차하면 여기서 발목 잡힐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본래 수령이 논의되었으나, 최근 여러 내정 개혁으로 수령의 업무가 과도해지는 걸 우려하였사옵니다.”
“수령의 과도한 업무는 중대본이 걱정할 일이 아니오. 이참에 비변사의 영역까지 탐하시오?”
후퇴.
최대한 빨리 후퇴.
이 길은 아니다.
유턴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잠시만.
다 알겠는데 이해가 안 된다.
딱 까놓고 이게 맞지 않나?
군현의 백성을 교화하는 데 사족이 안 나서면 누가 나서지?
말이야 바른말로, 수령이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의 단속에 불과했다.
내정 개혁이 유발한 업무의 과도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수령이 무슨 교화를 할 수 있을까?
나랏일 하느라 바쁜 사람들인데?
불가능하지 않나?
그리고 조선에서 사대부가 백성을 교화하는 건 유구한 역사가 있고.
그런데 이연은 이걸 모르나……?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이리 나오는 건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황공하다던 신하는 대체 어디로 가셨소?”
이것 봐라?
그러니까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건데…… 됐다.
알겠다.
왜 이렇게 나오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위생 수칙의 교화를 왕명으로 내려주시옵소서.”
“윤허하오.”
이런.
처음부터 내가 실수했네.
산림도 통째로 넘긴다고 약조했는데 잠시 잊은 내 탓이었다.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제대로 하길 바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잘합시다. 본부장.”
“……황공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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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 규칙 교화를 왕명으로 규정한 일의 실무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힘이 실렸다.
군왕의 어명이라는 압도적인 권위와 명분에 서인과 남인의 지도부가 열렬히 환호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니 누가 감히 반대하겠는가.
이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중대본으로 출근하는 나를 딱 기다리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벌써 피로도가 올라왔다.
송시열은 정말 피곤한 인생이었다.
사람이 삐뚤어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며 가마에서 하차했다.
“영상 대감. 또 뭐가 갑자기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위생 규칙 말이외다.”
“예.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셨지요. 이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그렇소.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셨…… 허. 본부장. 어째서 또 유언비어를 유포하려 하시오?”
“소직이 언제 그랬습니까?”
“됐소. 내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소. 어차피 본부장은 오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니 말이외다.”
부르면 갔겠지.
영의정이 부르는데 안 가고 버틸 사람이 누가 있나?
아니, 애초 버틸 이유가 없다.
지금 조정이 첨예한 대립으로 양분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본부장! 대체 뭐 하고 있으시오!”
“응? 허 국장. 왜 그러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고 했소!”
“진작부터 목소리는 들리기에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시오?”
“아. 영상 대감과 잠시 대화를 나눴소.”
“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소. 본부장. 잘 들으시오.”
“영상 대감. 송구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시오.”
“아니, 중대본은 위계도 없소?”
말이 섞여서 개판이다.
적당하게 중재하려고 할 때였다.
“본부장. 긴급 상황이외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중대본은 대체…….”
“도성 인근으로 유민이 몰려오고 있소!”
“유민이라고 하셨소?”
“아니, 유민이라니요? 그리고 허 국장은 대체 누구에게 보고를 받으셨소? 영의정보다 빨리 아셨다는 것이오? 허. 조정의 체계가 어쩌다가 이리도 엉망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는 비변사에서…….”
“본부장. 유민의 수가 수백을 넘는다고 하오.”
“서두릅시다. 영상 대감. 오늘 나누지 못한 대화는 차후 시간을 내지요. 하면, 사안이 급하여 먼저 가겠습니다.”
“허. 어쩌다가 조정이 이리도…….”
정태화의 말은 무시했다.
지금 여유 부리며 대화할 때가 아니었다.
수백이라고 했다.
이 시절에 운집한 수를 확인하는 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
이러한데 수백이라고 한다면 진짜 수백 명일 수도 있고, 천 명이 넘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한눈에 봐도 엄청난 인원이 지금 도성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는 정말 긴급한 상황이었다.
중대본의 문을 열었다.
모두 모여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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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상황이었다.
“본부장. 상황이 위중하오.”
“대체 유민이 갑자기 왜 도성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오?”
“훈련도감의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하였소. 자연스레 그들이 군량 10만 석을 운송한다는 말이 광범위하게 퍼졌소이다.”
한마디로 구휼미 번호표를 선점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이었다.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었다.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이 쌀 한 톨이라도 얻고자 달려오는 일이지 않은가.
더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호판. 현재 기근으로 인육을 먹는 백성이 허다한 상황일세. 이대로 그들을 내친다면 중대본은 인륜을 거스르는 행위를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고. 어차피 유민이 발생하면 일단 구휼한 후에 제 고향으로 쇄환하는 것이 그간 우리 조정의 방침이지 않았는가. 이번이라고 하여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겠나?”
“선생의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도성으로 진입하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중대본으로서는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성 밖에서 구휼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또한 쉽지 않습니다.”
윤선도의 원론에 허적은 신중한 원칙론으로 화답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간 유민은 조정의 구휼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구휼을 진행하면서 본적지(本籍地)를 조사하였기에 그러하였지요. 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유민이 다수라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번에 도성으로 몰려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걸인이 되어도 좋으니 앞으로 도성에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허적은 정확한 핵심을 찔렀다.
지금 유민이 도성으로 달려오는 상황을 단순하게 구휼의 차원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번호표를 선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성 내부에서 진행되는 구휼 작업에서 대체 무슨 수로 본적지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물론 최소한의 절차는 있겠으나, 제대로 알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도성의 백성과 군현의 백성을 차별하거나 가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절 도성은 군왕과 위정자의 거주지였다.
정체불명의 유민이 수백수천 명이나 진입한다면 치안이나 위생에 심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들로부터 역병이 창궐하여 도성에 번진다면 사실상 조선은 마비된다.
또 우습게도,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없다.
이러하니 중대본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들의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도성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윤선도도 그저 원론을 언급하였을 뿐 허적의 신중론에 동의했다.
사실 이는 허적의 의견 이전에 조선 조정의 오랜 방침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윤선도 역시 유민을 도성 내부로 들어오게 하는 건 꺼릴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도성 내부에 유민을 수용하는 건 불가하오. 잘 타일러 도성 외부에서 구휼을 집행하면 될 것이오.”
“어차피 도성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지금 1,000명에 이르는 유민을 수용하면 차후에는 어찌하겠습니까.”
“소생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차피 감당할 수 없다면 애초 일을 펼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을 펼쳐야지요.”
송준길, 윤선거, 윤휴가 차례로 동의의 뜻을 밝혔다.
자연스레 논의는 도성 외부에서 유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정리되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원론을 논의할 때가 아니었기에 속도는 빨랐다.
당장 눈앞에 1,000명의 유민이 운집했는데 한가롭게 원론을 논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발 물러서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니까 이들의 논리가 자승자박인 것 같았다.
“호판의 말대로라면 유민은 쇄환이 두려워 구휼을 꺼린다고 하였는데, 무슨 수로 설득할 것이오?”
내 말에 중대본의 분위기는 찬물을 뒤집어 써버렸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성 진입을 불허하는 순간 다시 흩어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지 않소이까.”
내가 말했지만 정확한 핵심이었다.
유민은 구휼미 10만 석에 혹해서 달려오는 이들이 아니었다.
허적의 말대로 이를 핑계로 도성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러니 지금 저들을 도성 외곽에서 구휼하거나 설득한다는 건 그냥 탁상공론이 아닐까?
그런데 내 말도 무책임하긴 했다.
사실상 대안 없는 반대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 대안 없는 반대는 아니었다.
대안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어려울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듣기에 따라 무책임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분명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누구도 내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논의되는 방법은 결국 1천여 명의 유민을 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방책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