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위기 혹은 기회(2)
고통스러운 침묵이 중대본을 휘감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내게는 책임이 있다.
내게는 의무가 있다.
지금 나의 책임과 의무는 중대본을 짓누른 고통을 밀어내는 것이다.
“일찍이 삭주의 재해를 방비할 때 백성을 엄히 다스렸소. 어찌하여 그랬는지 아시오? 섣부른 호의가 그들에게 어설픈 희망을 품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소. 끝도 없이 이어질 재해마다 백성이 조정만 바라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소. 조선의 조정은 만백성을 모두 구휼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오. 조정의 역량 밖에서 숨을 쉬는 백성은 반드시 자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군역을 회피하려던 가여운 백성을 처벌했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정이라는 걸.
작금의 법도가 개 같다는 걸.
그러나 내가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준다는 건 위선이고 기만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혼돈의 씨앗을 삭주에 뿌리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오.”
어찌하여 다른가.
핵심부터 말했다.
“도성은 군왕의 통치와 직결하오.”
한양도성은 위정자의 거주지가 아니다.
군왕의 권능이 가장 강력하게 구현되는 곳이다.
그리하여 도성이다.
“삭주의 재해는 조기에 방비하였기에 백성이 흩어지지 않았소. 하여 그들은 통제할 수 있었고, 교화가 가능했소. 하지만 저들은 아니외다. 통제하려면 흩어질 것이며, 교화를 내밀면 노여워할 것이오. 재해가 멈추지 않는 작금의 엄중한 시대에서, 도성을 향해 다가오는 유민에게 종래 존재하였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어불성설이외다.”
정책과 방침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뜻이 경직되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1,000명의 유민을 쇄환하지 못한다며 결국 산과 들로 나가서 도적이 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요. 작금의 조선은 모래알처럼 흩어질 저들을 살려낼 준비가 되어 있소?”
나는 냉정하게 현실의 칼을 휘둘렀다.
“없지요. 조선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지 않소이까. 이러한데 지금 도성의 성문을 막는다는 건 저들에게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소.”
다시 휘둘렀다.
“부정하지 않겠소. 종래 조선의 방침은 효과적이었소. 어째서? 유민의 수는 한정적이었고, 재해는 일시적이었기 때문이외다. 한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그러하오?”
지금은 재해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지난 세월 조선이 걸어온 시대와는 아예 달랐다.
그러니 사대부도 달라져야 한다.
“1,000명이라고 하여 가벼워 보이시오? 하면, 만 명이 되면 어쩔 것이오? 그보다 더 많은 수라면 어찌할 것이오? 그 모두를 이번처럼 다 죽일 것이오? 산과 들로 나가서 도적이 되라고 밀어낼 것이오? 낫과 호미를 들고 경작해야 할 우리 백성이 사람을 범하게 만드실 것이오?”
단호하게 말했다.
“이는 현실이오. 가정이 아니오. 생생한 현실이며 우리의 잔혹한 미래요. 그리고…….”
좌우를 돌아봤다.
한 명씩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은 도성이오.”
모든 건 도성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를 간과하지 마시오.”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유민은 감히 용상이 있는 도성을 바라보지 않았소. 그러나 오늘의 백성은 도성의 지척에 이르렀소. 세상은 이처럼 변하였소. 하여, 도성의 문이 열리지 않음을 경험한 내일의 백성은 모든 것을 심장에 새길 것이오. 조선의 왕이 백성을 버렸다고.”
종래 조선의 방침은 내일이라는 시간을 잔혹하게 만들 뿐이다.
“이치에 어긋난다는 말을 삼가시오. 지금 저들은 이치가 아니라 생존을 바라보고 있소. 생존이 경각에 달렸거늘, 대체 이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나는 다시 원칙을 말했다.
“중대본의 설립 취지는 재해를 막는 게 아니오.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구제하는 것이외다. 모두 이를 명심하시오.”
그리고 설득했다.
“부디 우리도 변화의 태풍에 몸을 맡기지 않겠소?”
“……”
“그리하여 가장 당연한 일을 수행하는 사대부로 기록되어 보지 않겠소?”
모든 말을 다 꺼냈다.
그리고 조용했다.
내가 말할 동안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거나 찬성의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처럼 이 순간에도 조용했다.
이 무거운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만, 몰라도 괜찮았다.
다만 침묵의 시간이 짧다면 결의가 모이길 바랐고, 침묵의 시간이 길다면 치열한 고민이 도출되기만을 원하였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을 때였다.
“내가 해 보겠소.”
허목이었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유민의 도성 진입을 허락해 주시오. 하면, 위생국이 그들을 감당해 보리다.”
허목은 주먹을 꽉 쥐며 한 명씩 시선을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나를 믿어 주시오.”
덧붙였다.
“해낼 수 있소.”
성난 유민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문제를 일으킬 줄 모르는 그들을 단속하는 건 가장 어렵고 고된 일이었다.
흔히 잘해도 욕 듣고, 못해도 욕 듣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를 단호하게 해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당연히 동의할 일이었다.
그리고
“되는 방향으로 고민해보지요.”
곧장 이어진 허적의 말.
그의 나지막한 말이 내 심장을 울렸다.
무릇, 정책의 집행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건 결의(決意)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실무였다.
허적의 말은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유민의 도성 수용이 가능한지 냉철하게 검토해보자는 말이었다.
즉, 허목의 결의를 지탱할 구체적인 실무를 준비해보겠다는 말이었다.
“역시 가장 우려할 지점은 유민의 거주지요. 모두 알다시피 이미 도성은 포화상태요. 가장 기본적인 배수 시설도 엉망이외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유민 수용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요. 이뿐만이 아니오. 설령 거주지를 확보한들 유민이 어찌 생계를 꾸려갈지도 생각해야 하오. 저들을 도성의 새로운 걸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동부지역은 어떠합니까.”
논의의 서두부터 훅 치고 들어온 사람은 유형원이었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는데, 참으로 괴이하게도 유형원의 얼굴에서 묘한 흥분이 보였다.
보기에 따라서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반계. 동부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호판 대감.”
한양도성은 5개의 행정구역인 5부로 구성되었다.
중부는 종로 육의전으로 상징되는 상업 지역이었고, 허목의 위생국이 똬리를 튼 곳이었다.
서부는 조선 왕실의 사저가 즐비한 곳이었으며, 북부는 권세가의 거주공간으로 유명했고, 남부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대감. 창덕궁 동편 종로 이북에 있는 동부는 나머지 4곳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정치적으로는 창덕궁 근접 지역이며, 지리적으로는 궁궐 옆의 언덕이 있는 터라 인가가 형성된다면 궁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하여, 동부는 상대적, 아니 그냥 한산한 지역으로 남아 있지요.”
“동부가 한산한 지역으로 남은 건 자네가 말한 이유 그 자체일세. 그래서 더 신중할 수밖에 없고.”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동부가 아니고서야 1,000명의 유민을 수월하게 거주시킬 수 있는 지역과 조건을 도출할 방법은 없습니다.”
유형원은 거침없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저돌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음. 자네 말이 옳긴 하지. 내 기억이 옳다면 동부지역에는 성균관 역을 행하는 반인의 거주지인 반촌이 있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반촌의 지척, 관기교로부터 응란교의 동쪽과 북쪽 지역이라면 1,000명이 거주할 130여 호를 넉넉하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물 흐르듯이 동부의 입지 조건을 설명하는 유형원도 대단하지만, 불시에 나온 안건을 수월하게 답변하는 허적의 위엄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실로 대단한 업무 장악력이었다.
“무엇보다 해당 지역에 130호 정도라면 반발은 없을 겁니다.”
유형원의 해당 발언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아니, 정말 중요했다.
자고로 부동산 정책을 집행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원주민들의 여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형원이 가져온 지역의 원주민은 반촌의 반인이었다.
즉,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반발이라고 하면 반인이 중대본의 방침에 저항한다는 경우였으니 전혀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정말로 쓸데없는 고민이며, 시간 낭비에 불과하니 말이다.
“대감. 소생에게 맡겨주십시오.”
목소리가 너무 뜨거워서 하마터면 윤휴인 줄 알았다.
화자는 다시 훅치고 들어 온 유형원이었다.
특이한 건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거나 조소를 날리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야릇한 흥분까지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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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일렁이는 눈으로 유형원을 바라봤다.
절로 손이 꽉 쥐어졌다.
목울대는 따가울 정도로 건조해졌다.
심장의 쿵쾅거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어질 그의 말이 조금이라도 빨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호판 대감께서 말씀대로 도성의 배수로는 당장 수습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러한데 중대본에서 결심하여 동부에 아예 새로운 거주지역을 마련한다면 수백 년의 안배가 필요할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동부에 수백 년을 이어갈 시설을 완비할 수 있다고 해석이 되네만.”
유형원을 되새겼다.
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천재(天才)였다.
성리학의 이해로만 바라본다면 한 수 아래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성리학이 아니었다.
누구도 바라보지 못한 곳을 보는 시야(視野)였고, 아마도 생각하지 못한 영역을 움직일 수 있는 재능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고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두가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할 때, 그는 본질만을 바라봤다.
강이 범람하여 모두 물을 막고자 할 때 그는 강바닥의 토사를 치워야 한다고 하였다.
가뭄이 발생하여 모두 구휼미를 고민할 때 그는 관개 시설의 부족을 개탄했다.
그랬다.
유형원은 그러했다.
결과, 현실은 그의 사고를 한 번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유형원은 현실 정치에 존재할 수 없었다.
미치듯이 안쓰러웠다.
벗의 고독한 고뇌가 너무나도 아팠다.
잡고자 하였으나 잡히지 않는 벗을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아렸다.
벗의 중대본 합류를 반겼으나 늘 불안했다.
함께하여 즐거웠으나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벗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이였으니까.
그런데
“그렇습니다. 소생이 기어이 해내겠습니다.”
해내겠다고 하였다.
윤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반계.”
호명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벗의 말이 빨랐다.
“백호. 누군가 내게 말했네. 한 명의 열 걸음보다 열 명의 한 걸음이 역사라고.”
마침내 반계 유형원이 현실에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