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처음이자 마지막 어명
이연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노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노인은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스치는 게 있었다.
의원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들의 몸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노인의 눈동자는 미친 듯이 요동쳤다.
다른 유민도 사정은 비슷했다.
“저, 전하.”
“되었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기력이 부족할 것인데 말을 아끼거라.”
그 말과 동시에 이연은 남은 왼손을 움직였다.
손에는 흰 천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또 소중하게 노인의 손을 닦았다.
“!!!”
이연은 온몸이 사시나무가 된 노인을 애써 무시하며 부지런히 흰 천을 움직였다.
“무릇 물에 적신 흰 천으로 손을 닦았을 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아야 한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역병이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예……?”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조금 전에도 그러했고.
대체 손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역병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노인은 금세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만났다.
감히 임금의 말을 되물었지 않은가.
경을 쳐도 백번을 칠 일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했다.
“나머지 손도 내어 보겠나?”
이제는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 노인은 그냥 손을 내밀어버렸다.
그리고 이연은 나머지 손도 흰 천으로 닦았다.
노인은 그냥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이연은 내금위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뭐 하나?”
“어,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허. 이런 무도한 이들을 보았나. 임금은 자세를 낮추어 백성을 살피는데 내금위는 멀뚱히 서서 쳐다만 보고 있나?”
“!!!”
“응?”
“화, 황공하옵니다. 하오나 신들은 불미스러운 일로부터 전하의 옥체를…….”
“갈!”
내금위의 말에 이연은 노기를 터트렸다.
그 기세는 가히 압도적이었기에 내금위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이연의 분노는 그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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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 논의를 마무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연이 직접 나선 마당에 가마 타고 올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냥 달려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바로 허목이었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슬쩍 말을 걸었다.
아니, 걸려고 했다.
“갈!”
이연의 호통이 들리기 전에는 그럴 생각이었다.
허목과 대충 눈인사를 하며 분위기 파악을 했다.
예상대로 대신의 수행은 없었다.
호위를 담당하는 내금위 병력은 있었으나 총책임자인 내금위 부사는 없었다.
의전의 격식을 깬 파격적인 행위였다.
반대가 심했을 것이나 이연의 권위를 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연은 왜 화가 났을까?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는가. 도성에서 그것도 백주에 임금이 백성을 만나는데 어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저, 전하. 신은 그저…….”
“하!”
이어진 몇 가지 대화로 상황 파악은 단번에 끝낼 수 있었다.
“참으로 불경한 인사로다!”
이연의 노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요즘 생글생글 웃고 다녀서 잠시 잊을 수는 있겠으나 절대 기억에서 지워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었다.
이연은 누구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압도적인 왕권을 가진 군왕이라는 사실이다.
그 압도적 권위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는 태산보다 거대하고, 하늘보다 높으며, 바다보다 넓고, 태양보다 뜨겁다.
“지금 너는 나의 백성을 군왕을 시해할 수 있는 무리로 보는 것인가.”
“!!!”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
이연의 정치력과 통치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진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어찌하여 말이 없는가?!”
지금 이연이 왜 이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질 때 내금위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전혀 없다.
아예 없다.
내금위는 군왕이 무엇을 할지라도 철통같은 경계를 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임무다.
그런데 이연이 이걸로 화를 내고 있다?
말이 안 된다.
이건 대간이 나서서 이연에게 뭐라고 해도 될 사안이다.
당연히 이연은 사과해야 하고.
그러니까 이연이 억지를 쓰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결국, 철저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행위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아주 쉽게 파악했다.
바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는 유민을 오롯이 포옹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나서는 게 옳다.
“전하. 신 중대본 본부장 송시열이옵니다.”
“이들을 살피고자 나선 것이라면 경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외다.”
“신이 어찌 어심을 어지럽힌 이들을 살피겠사옵니까. 응당 벌해야 하옵니다.”
“경의 말이 참으로 옳소. 하면, 이들을 어찌 벌해야겠소?”
나는 이연이 원하는 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주로서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신하인 내가 청하여 모든 정치적 부담을 가져가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목청에 힘을 주어 유독 크게 외쳤다.
“무릇 내금위는 군왕을 지키는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옵니다.”
“옳소.”
“한데, 오늘 내금위가 감히 군왕의 백성을 욕되게 하였사옵니다. 군주를 능멸한 기군망상이 아니면 무엇이겠사옵니까.”
“해서?”
“잘못된 의심으로 군왕과 백성의 사이를 이간질하였사옵니다. 응당, 모두에 복무하는 것이 옳사옵니다.”
유민은 교화의 대상이다.
유민은 통제의 대상이다.
오늘 군왕이 직접 교화하였는데 병력을 배치하면 효과는 반감된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그냥 둘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모두가 눈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상의 상황을 펼치면 된다.
이미 이연이 8할을 완성하였기에 내가 1할을 채운다.
“번을 정하여 내금위의 5할을 유민의 위생 규칙 확립에 배치하시옵소서.”
왕을 지키는 최고의 무력 집단을 배치한다.
기승전을 모두 지켜본 유민은 이러한 결과에 불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눈물로써 화답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1할이다.
“경의 말이 참으로 옳소.”
군왕이 그림자 절반을 떼어 자신들을 지킨다.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과연 유민들은 크게 술렁였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엷게 웃으며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런데
“노인이 말하였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잠시 잊었다.
이 자리의 끝은 오직 이연이 결정한다는 걸.
그가 유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무슨 의도일까.
이미 통치는 완벽하지 않았는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더 들어봐야 할 거 같다.
그새 이연의 시선은 어떤 노인에게로 향했다.
보아하니 성은을 언급한 이가 분명했다.
“무릇, 성은(聖恩)은 임금의 은혜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성은을 내리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나의 은혜가 끝이 없다고 하느냐.”
“마, 망극하옵니다. 아니옵니다. 망극하지 않사옵니다.”
“옳다. 나는 아직 너에게 망극할 성은을 내리지 않았다.”
노인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공기였다.
“함부로 성은을 입에 담지 말라.”
“저, 전하.”
“받지도 않은 성은을 입에 담아 임금을 욕보이지 말라.”
“저, 전하.”
내용은 살벌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아니었다.
묘하게 은은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동시에 이연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용포의 유려한 펄럭임 끝에 그의 섬섬옥수가 모습을 보였다.
“이 손은 참으로 곱다. 그러나 노인의 손은 참으로 거칠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 손으로는 호미도 낫도 쟁기도 들지 않았기에 그러하다.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이 손은 이처럼 곱다.”
이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은은했다.
하늘을 향한 그의 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용포는 바람의 이끌림을 따라 참으로 유려하게 움직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세월에, 너는 모든 걸 하였다. 너의 손은 이 나라 조선을 지탱하였다. 그 무게를 감당하였기에 거칠며 또 거칠다. 너는 지금껏 고됨을 피하지 않고 조선을 들고 있었다.”
심장이 저릿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나는 오늘 이연이 정치와 통치를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여겼다.
하여, 나섰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우연히 운 좋게도 이연의 길과 같았을 뿐이었다.
나는 단 1할도 이연의 진심을 쫓아가지 못했다.
지금 이연의 언행, 그 어디에도 정치와 통치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한데, 어찌하여 내게 성은이라고 하는가.”
이연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내 하늘을 마주 본 손바닥의 끝이 유민을 향했다.
나는 그 끝을 바라봤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그 모진 세월을 버티며 이 땅을 지탱해온 너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버거웠으면 제 고향을 떠나서 여기까지 왔겠느냐.”
이연은 한 걸음 다가갔다.
유민을 향해서.
하여, 나도 뒤따랐다.
뒤늦게라도 그의 진심을 쫓기 위해서.
“얼마나 원망하였느냐.”
이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죽을힘을 다하여 평생 지탱하였거늘 이 나라는 너희의 어려움을 외면하였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느냐.”
이연은 손을 거두었다.
“어찌하여 이 나라는 조세와 역만 강요하고, 보살핌이라는 걸 하지 않는 것인지 얼마나 원망하였겠느냐.”
이연은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백성은 죽을힘을 다하여 조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거늘 조정은 과연 죽을힘을 다하여 백성의 삶을 이어주고 있었는가.”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홀로 말했으나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던 이연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유민을 바라봤다.
“조선의 임금은 너희에게 성은을 내리지 않았다. 너희가 조선과 임금에게 망극할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성은을 말하며 망극하다고 하는가.”
이연은 한 명씩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과인은…….”
과인……?
지금 이연이 과인이라고 하였다.
과인(寡人).
이는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에서 ‘과인’은 군왕이 자신을 낮출 때 사용한다.
잘못을 인정할 때 사용했다.
그래서 군왕은 ‘과인’을 꺼린다.
그런데 지금 절정의 왕권을 행사하는 이연의 입에서 ‘과인’이 나왔다.
심지어 대신을 향한 것도 아니다.
법도를 어기고 사방팔방 떠도는 유민을 향해서 나왔다.
그래서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두 글자의 어디에도 정치나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들끓는 이연의 진심만이 존재하였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절한 애끓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물기는 없었으나 너무나도 애틋하였다.
세상 그 어떤 정인(情人)에게도 이보다 더한 애틋함을 내보일 수는 없다.
“그 어떤 재해가 이 땅을 덮을지라도 과인은 너희를 품을 것이다. 이 나라의 국호가 조선이며, 조선의 군주가 과인이며, 너희가 백성인 이상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이는 이연의 선언이었다.
“그리하여 들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다…….”
이는 이연의 다짐이었다.
“과인은 기어이 이 말을 너희에게 들을 것이다.”
이는 이연의 목표였다.
“그 전에 너희는 단 한 명도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이연의 부탁이었다.
“과인과 조선으로부터.”
2,342명에게 하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러니 과인이 너희에게 망극할 성은을 내릴 때까지 단 한 명도 죽지 말라. 그때까지 과인의 백성으로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단 한 명도 이탈하지 말라.”
이는
“이것은 조선의 왕, 나 이연이 너희에게 내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어명이니라.”
최고의 권위를 가진 불멸의 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