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뉴타운(1)
유형원은 한참을 서성였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유민의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성부의 실수로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동부 거주지 공사는 중단됐다.
그 뒤에는…… 아니, 거두절미하고 군왕의 권능이 만발하였기에 모든 논의는 원점이 되었다.
또한,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니기에 작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엄중했다.
늘 그렇겠지만 유민이라는 존재는 불평불만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존재였다.
이를 이연이 단번에 사로잡았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시작됐다.
애초 예상보다 많은 유민이었다. 2배 이상이었으니 숨이 턱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많은 인원이 거주할 지역을 선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유형원은 유민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한 직후 이뤄진 논의를 되새겼다.
-아무리 동부 지역이 한산하다고 할지라도 2,000명이 넘는 인원의 거주지를 막무가내로 깃발 꽂듯이 결정할 수는 없소.
-혹여라도 강제로 그리했다가는 진통이 생길 수도 있소.
-반촌은 탈이 없겠으나 동부에도 관청이나 여러 명문가가 있긴 하오. 그들이 괜히 한마디씩 보태면 골치 아프오.
-어디 그뿐이오? 동부에는 혈기 왕성하고 정의에 사로잡힌 유생들이 공부하는 성균관도 있소. 그들이 입을 대면 될 일도 안 되오.
우려는 타당했고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특히, 혈기 왕성한 성균관 유생을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었다.
유형원 역시 속에 담고 있던 말이 많았다.
솔직히 유민의 규모가 2천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에 쾌재를 부른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더 넓은 범위에 철저하게 계획한 거주지역을 설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새, 중대본은 원안을 고수하며 조금씩 거주지역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유민들의 입에서 불평이 새어 나오겠으나 당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유형원도 현재로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끝내 나서지 않았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반계.”
번뇌를 이어가던 유형원은 반가운 목소리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친애하는 벗, 윤휴였다.
“백호. 오셨는가.”
윤휴는 밝게 웃으며 좌우를 돌아봤다.
분명 엄중한 상황이었으나 그의 행동은 가볍고 여유로웠으며 맑았다.
이는 마음이 편안하였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시도 자네를 원망한 적이 없네.”
“백호…….”
“오래전 낙향을 전할 때도 그러하였다네.”
“괜한 말 말게. 나를 볼 때 늘 불안함을 담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하하. 이런. 그걸 알아봤나? 그래. 맞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상경하여 중대본에 결합하였을 때도 늘 불안했지.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동시에 자네를 향한 무한한 믿음이 자라난 것도 사실일세. 그리고 그 믿음은 적중하였고.”
어느새 유형원과 마주한 윤휴의 눈은 뜨겁게 일렁였다.
이는 벗에 대한 한없는 믿음과 신뢰의 증표였다.
과거 조선을 증오하고 조롱하였던 시절에도 그러하였다.
하물며 이미 변화의 궤도에 올라선 벗이라면 얼마나 뜨겁게 지지하겠는가.
“괜한 말이 아닐세. 보게. 자네는 지금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도모하고 있지 않은가. 도성 전체가 아니라 동부 지역에서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 1,000여 명의 유민으로 작게 시작하려던 일이었네.”
“그랬을 걸세.”
“하지만 유민의 규모가 두 배가 넘었기에 뜻을 제대로 이루기는 어려워졌다네.”
“암. 한데, 변수가 생겼어.”
“그렇지. 이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변수였네.”
그랬다.
이는 그야말로 변수였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면 몰라도, 이번은 아니었다.
군주가 직접 나섰고, 유민의 심장에 꽂혔다.
이 상황에서 원안을 고수하면 어찌 되겠는가.
아무리 심장을 지배한 군왕의 존재가 거대할지라도 막상 살아보니 불편하고 협소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만은 다시 터질 수밖에 없다.
군왕이 직접 나선 행사의 결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신하로서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과, 중대본은 비상이 걸렸고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윤휴의 시선은 묘한 흥분까지 담긴 벗의 얼굴로 향했다.
하여, 물었다.
“이제 일러주겠는가. 자네의 속에 품은 진정한 대의를.”
유형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성을 설계할 수 없다면, 도성을 환골탈태(換骨奪胎)시키면 된다는 결론을 얻었네.”
예사롭지 않은 포문으로 시작하였다.
이어질수록 윤휴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렸다.
이는 그야말로 환골탈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재원이 걸림돌일세. 하여, 나는 꼭 환골탈태까지가 아닐지라도 하나씩 해보기로 하였네.”
약간의 자조적인 웃음이 담긴 유형원의 마무리였다.
하지만 윤휴는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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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은 아예 사라졌다.
눈을 부라리며 날카롭게 의원들을 몰아치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하하하. 오늘도 자네들이 싫어하는 솔잎일세!
-하하하. 말씀은 정확하게 하십시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했던’ 겁니다.
-이런!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마침내 솔잎의 맛을 알게 된 것이지요! 산해진미보다 솔잎이 더 맛있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모두 방긋 웃으며, 눈을 부라리며 풀떼기라고 집어 던졌던 구황 작물도 군말 없이 잘 먹었다. 심지어 맛있게 먹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자네 손이?
-이미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참으로 깨끗하군. 백옥이라고 해도 믿겠어.
-하하하. 자고로 손은 틈날 때마다 닦아야 제맛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현명하군!
기본적인 위생 규칙도 아주 잘 지켰다.
이건 내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손 씻을 만한 곳이 보이면 그냥 손부터 넣고 그랬다.
이 정도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었다.
-이놈아!
-왜, 왜 그러십니까?
-어허. 누가 찬물을 그냥 마시라고 했냐!
-목이 말라서 그랬습니다.
-끓여서 먹으라고 했지?!
-끓인 물을 마시면 목이 계속 마릅니다.
-어허! 이놈이, 그래도!
물도 알아서 잘 끓여 먹었다.
땔감도 알아서 구해왔다.
상황을 살피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이 시절 조선에서 연장자의 말은 바로 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연소자의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표면에서 연장자에게 말대답하거나 삐딱하게 하는 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의 영역이었다.
같은 동네 연장자의 말은 수령과 사대부의 말보다 백배의 위력을 내었다.
그래서일까?
위생 수칙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았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연이었다.
진짜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이연이 다 했다.
어린아이들도 신나서 이연을 칭송했다.
-임금님이 손 씻으라고 하셨어! 그래야 역병이 도망친다고.
-응응. 또 풀떼기라도 주면 그냥 감사하게 먹으라고 하셨고.
-맛이 없긴 한데 나중에 맛난 거 주신다고 하셨지.
-맞아. 성은이라는 걸 주신다고 하셨어!
-망극할 정도로 많이 주신다고 했지? 근데 망극할 정도가 어느 정도야?
-내가 들어봤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어도 다 못 먹는 양이래. 엄청나게 맛도 있겠지?
-그러니까 다들 받고 싶어 하는 거 아니야? 와.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 진짜 배불리 먹겠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만한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잡아서 하나씩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좋고 아름다운 내용인데 구태여 뭐하러 교정을 해주겠는가.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완벽하게 이연의 백성이 되었다.
불평과 불만은 아예 사라진 선량한 백성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나 역시 그날의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이연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이연이 아니라 송시열로 빙의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연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이연은 타인의 마음을 끌어내어 무한정 스며들게 하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진짜 타고난 사람이 분명했다.
물론 모든 영역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이연의 권능조차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허. 이보시오. 거리에서 소변을 금지한다고 전하지 않았소이까.
-거. 사람이 급한데 어찌합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아니,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금지하였소.
-내 평생 볼일 보는 걸 금지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소.
-아니, 말을 좀 똑바로 들으시오.
-됐습니다! 나 원참. 자기는 똥오줌 안 보고 사나.
-…….
집단의 연장자들이 동의하지 못한 내용은 전혀 보급될 수 없었다.
윗물이 맑지 않은데 아랫물이 어찌 맑겠는가.
어쩌면 위생 수칙 중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건 노상에서의 대소변 금지 조치일지도 모른다.
군왕의 권능도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쉽사리 감당할 수 있겠는가.
뭐……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씩 천천히 잡아가면 된다.
적당하게 확인을 끝냈다.
이제 비상이 걸린 중대본으로 가서 논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일만 남았다.
“저…….”
가봐야 하는데 누가 잡는다.
연륜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는데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일전에 이연과 문답을 나눈 이였다.
그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뒤로 몇 명이 더 있었는데 아마 대표로 나선 모양이었다.
아마도 일전의 작은 인연으로 자연스레 유민의 대표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높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딱딱한 나의 태도에 노인은 조금 당황했다.
이연이 남기고 간 내금위나 의원들은 친절하기만 하니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일이고.
“거주할 곳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는지요.”
“너희의 규모가 2천 명이 넘는다. 하루아침에 거주지를 확보할 수 있겠느냐.”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저 언제까지 이리 지내야 할지 궁금하여…….”
“하.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도성으로 들어오게만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당당하게 살 집을 내놓으라고 하나?”
“그, 그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게 아니라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대감께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누가 내게 물어보라고 했나?”
시선을 슬쩍 돌렸다.
지켜보던 내금위의 관리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경직됐다.
나는 전혀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하게 말하지. 너희는 법도를 어기고 유민이 되었다.”
“오, 오죽하면 그리하였겠습니까?”
“그래. 그런데 그러지 않는 백성은 뭐가 되나?”
“…….”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아무리 가혹한 법도라고 할지라도 버티는 백성은 있는 법이다. 그들이 어리석다고 할 수 있느냐?”
노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두려움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를 보듬어 줄 생각은 없었다.
“당장 쇄환해도 시원찮거늘 주상전하께서 너희를 살피겠노라 하셨다. 하여, 조정은 방법을 찾고자 밤낮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있다. 한데, 어찌 이토록 함부로 행동하는가.”
“소, 송구합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는 너희가 도성에 들어온 뒤 보였던 무도한 행위를 잊지 않고 있다.”
“!!!”
“또다시 그러한 일이 내 귀에 들린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노인의 허리는 땅에 맞닿을 지경이었다.
나는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저 감읍하며 기다리도록 하라.”
대답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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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
중대본으로 향할 때 나를 붙잡은 목소리, 허목이었다.
적적하니 같이 가보자고 불렀을까 싶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다른 용건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오?”
거두절미를 과하게 한 물음이긴 했으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백성의 손을 잡을 생각이 없소.”
“그 이야기는 이미 삭주에서 들었소. 그러나 누구보다도 백성을 위하지 않소이까. 본부장. 굳이 백성으로부터 싫은 말을 들을 이유는 없소. 그저 위로해주면 될 일이거늘.”
“모두 나서서 위로만 하면 뭐가 바뀌오?”
“하면, 대체 왜 뒤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이토록 뛰어다니시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누군가가 할 일을 하는 것이오.”
허목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답답함을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허 국장. 나는 위로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오. 백성의 손을 잡으며 그들과 공감하는 존재는 하늘 아래 군주 한 분이면 충분하오.”
“…….”
“저들을 향한 내 진심은 오직 문서와 정책으로 전해질 것이외다.”
“…….”
“이것이 내가 백성을 위로하는 방법이오. 군주에 대한 열렬한 환호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책, 이만하면 나쁘지 않소.”
복잡한 시선을 한 허목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이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외다.”
“그 길에 본부장은 어디 있소?”
“하하하. 길의 어딘가에는 있지 않겠소이까.”
“…….”
“그러니 마음 쓰지 마시오. 허 국장.”
허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마음을 썼다고 그러오?”
나는 더 답하지 않고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