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정의의 여신(5)
한 여인이 있다.
주로 안대를 하였으나 때로는 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졸기도 했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으며 매섭게 휘두를 때도 많았다.
늘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추상같이 화를 내거나 세상의 불의에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그러했다.
역사는 이 여인을 정의의 여신이라고 말한다.
홀로 되묻는다.
조선은 이 여인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아니, 후대는 오늘의 조선이 만난 이 여인의 모습이 어떠하였다고 말할 것인가.
작금의 조선이 휘두르는 법도는 백성의 회한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조선의 법도로 고통받는 백성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었다.
작금의 조선이 말하는 법도는 무능력하다.
왜……?
성균관 유생들의 말을 어찌하여 틀렸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작금의 조선에 아로새겨진 법도는 시대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데 법도를 일관되게 적용하는 건 참으로…….
되었다.
이 모든 건 쓸데없는 고민이다.
나는 이미 길을 선택했다.
지금 나의 고민은 삭주에서 선택한 길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돌아갈 수 없다.
무릇, 법도의 적용은 엄격해야 한다.
무릇, 법도의 잣대는 같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취해야 할 건 그녀의 가려진 눈과 칼이다.
지금 내가 숨을 쉬는 시대에 내게 저울은 의미가 없다.
저울을 들 수 있는 이는 오직 이연뿐이었다.
작금의 조선에서 살아갈 정의의 여신은 안대로 눈을 가릴 것이다.
절대 벗지 않을 것이다.
후대의 말 따위는 의미가 없다.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이 시대는 바로 우리의 것이니까.
하여, 나는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뿐이다.
그렇게 말했다.
“조선의 법도에는 눈이 없다.”
침묵은 공간을 지배했다.
아니, 짓누르고 억눌렀다.
오직 나만이 침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성균관의 존폐라고 하였느냐? 하면, 생존의 위기에 군역을 어긴 백성은 어찌 다스려야 하는가?”
“대, 대감. 어찌 동률로 둘 수 있는 사안입니까.”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판단하나? 사안의 무게를 따지는 저울은 오직 전하의 권능이거늘.”
듣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권위로 짓눌러버렸다.
“성균관의 위기가 누군가의 목숨을 해할 정도였다면 너희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한 가지였다. 너희는 이를 알지 못하는가?”
“…….”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몰라서 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알기에 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 길은 명백한 원칙을 품고 있으나 너무나도 고되고 험난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언로가 열린 나라다.”
조선은 말과 글이 지배하는 나라다.
타당한 사유가 있다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해결할 수 있다.
“성균관의 사정을 전하께 고하였어야 한다. 서책을 내리고, 상투를 풀고 절절하게 전하여 어심을 움직였어야 한다. 하여, 대안을 찾았어야 한다. 너희가 고심하여 꺼낸 대안이 쇠고기였다면 이를 고하였어야 한다. 결과, 쇠고기가 반촌을 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법도의 틀 안에서 쟁의하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를 어겼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유자로서, 사대부로서 원칙을 준수하지 못한 것이다.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고작 너희의 한계이며 그릇이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였다.
이들은 원칙을 어겼다.
나는 거칠게 손을 내저으며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유민을 가리켰다.
그들의 눈에는 여전한 두려움의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아마 이 상황이 그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저들도 법도를 어겼다.”
유민들은 몸을 움츠렸다.
어떠한 미사여구를 가져올지라도 자신들이 법도를 어겼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만일 지금이라도 이연의 마음이 변하면 당장 도성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말 한마디가 두렵고 무서울 것이다.
그래서 우습다.
백성은 이토록 법도를 두려워하는데, 법도를 집행해야 할 유생들은 가볍게 여기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이것이 우습지 않으면 무엇이 우습겠는가.
그런데 지금 궁금한 것이 생겼다.
지금 내 얼굴에 덮은 감정은 무엇일까?
지그 내 얼굴의 근육은 어떤 표정을 보이고 있을까?
대체 어떠하길래 나를 바라보는 유생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담기고, 초점은 흔들리며, 표정은 경직되었고, 안색은 어두울까.
“법도에는 관용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뭐……?”
“저울을 언급하셨지 않습니까.”
자신들을 이토록 몰이 사냥하듯 타박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성균관 유생들이 유민과 처우를 비교하는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단순 비교는 불가하다고 하던 이들이 말이다.
실소가 나왔다.
꼴이 너무나도 비루해서였다.
“나라 전체가 재해로 고통받고 있다. 비록 저들이 법도를 어겼으나 이 또한 조정의 힘써 지키지 못하였기에 생긴 일이다. 한데,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성은을 내리시어 유민을 수용하셨다. 하여, 이것이 부당한가?”
“…….”
“나 또한 알고 있다. 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걸. 다수의 백성은 어렵더라도 이를 지키고, 그러지 않은 백성은 소수다. 나 역시 선택의 순간이 오면 다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순간이 아니다. 아니, 이따위 말은 중요하지 않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웃음을 담았다.
그리고 노려봤다.
“너희는…….”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유민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작 이 정도가 조선의 내일을 책임질 무리란 말인가.
“너희와 유민이 같다고 여기느냐? 아니, 지금껏 한 번이라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 아닐 것이다. 사대부가 위정자인 나라에서 사대부가의 자제로 태어나 학문을 익히고 성균관의 유생이 된 너희가 저들과 한배를 탔다고 여길 리가 없겠지. 보라. 저들은 내 말 한마디에 몸을 움츠리고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법도를 어긴 너희는 너무나도 당당하지 않은가. 이는 너희가 자신을 또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인지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나라의 법도는 오직 백성만 지키는 것인가? 사대부는 법도를 휘두르기에 그저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껏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사대부는 법도를 규정하며, 집행하며,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이는 학문을 익힐 때 심장에 새겨야 한다. 사대부는 관리는 위정자는 백성보다 백배는 강도 높게 법도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저들은 그저 백성이기에 조선을 위하여 복무한다. 조선의 백성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무런 편의도 없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법도를 어기는 것이 유일했다. 그러나 너희는 아니다. 조선의 혜택을 받았기에 이 나라에서 허용한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너희가 선택한 건 원칙이 아니라 편의였다. 하물며 생존의 갈림길도 아니고 그저 너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대체…… 너희는 무엇을 위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는가? 너희는 무엇을 해내고자 유학을 익혔는가.”
법도가 가혹하여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법도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기에 따로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대부는 지키지 못하거나 우회할 수 없다.
그것이 사대부의 의무이고 역할이다.
“재해가 만백성을 죽이고자 달려들고 있다. 하여, 작금의 시대를 난세라고 한다. 이에 백성은 법도를 지키기 어렵다. 하면, 위정자는 법도를 고쳐서 백성을 살리고자 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였느냐? 백 보 양보하여, 쇠고기로 백성을 구호하였느냐?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너희는 위정자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였을 뿐이다. 이 나라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한 이들의 선택과 결정치고는 너무나도 졸렬하지 않은가.”
고작 쇠고기였다.
겨우 쇠고기였다.
그러나 무려 쇠고기다.
또, 지엄한 법도였다.
작금의 조선은 이러했다.
무려 쇠고기며 지엄한 법도가 맞다.
하여,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또, 상황에 임하는 태도는 더욱 그러했다.
“참으로 오만하지 않은가. 너희는 너희가 스스로 조선의 동량지재이며 중추라고 여겼기에 법도를 우습게 여긴 것이다. 해서, 쇠고기를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이라는 지위를 특권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같잖은 오만함이 너희 행동의 타당함을 그토록 억울하게 역설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저들의 문제였다.
“누구도 너희에게 오만함을 내리지 않았다.”
대기근과 싸울 조선의 위정자는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
“누구도 너희에게 오만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근과 싸울 조선의 위정자는 오직 열의로만 살아야 한다.
시대는 이러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웠다.
고작 남는 고기라고 할지라도 절대 반촌을 넘지 못하게 한 조선의 설계자들이 말이다.
오늘 내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은 설계였다.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건 단지 소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함이었다.
쇠고기로 이익을 취할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였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쇠고기로 최고의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값이 비싸더라도 쇠고기를 맛본 이들은 이를 다시 찾을 것이며, 반드시 법도를 어기는 무리가 나타난다.
수백 년간 억제한 것이 작금의 시대에 터진 것이다.
난세에 말이다.
어찌 노엽지 않겠는가.
“고작 이따위라면 당장 서책을 집어 던지고 낙향하라!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건 경장을 도모할 관리이지, 죽은 주자의 말에 목숨을 거는 성리학자가 아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오직 입신양명만을 위하여 경전을 익히는 무리는 단 한 명도 용납할 수 없다! 너희는 경전을 읽을 자격이 없다! 조선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필요에 따라 법도를 짓밟는 무리를 동량지재로 인정할 수 없다!”
“!!!”
“!!!”
선언하듯 외쳤다.
시선을 돌렸다.
그때…… 허목과 허적 그리고 유형원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내가 해야 할 말이 더 있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나왔다.
“너희가 무엇을 가장 크게 실수하였는지 아느냐?”
나도 모르겠다.
그냥 한숨이 나왔다.
너무나도 애끓는 한숨이 나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병마가 점차 커진다는 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의 수명을 갉아 먹는 것과 같다. 너희는 이 나라를 기어이 재건하려는 이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덧붙였다.
“너희의 행동은 조선을 병들게 할 것이다.”
이 시절 조선과 함께 할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에는 칼, 나머지 한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
언제라도 안대를 내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말했다.
“약조하지.”
나는 송시열이다.
“내 모든 걸 걸고 반드시 너희를 벌할 것이다.”
할 수 있다.
작금의 조선이 필요한 법도를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