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거병(擧兵)(2)
조선 유학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성균관 대성전이었다.
오늘 이곳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집결하였는데 참으로 고요하였다.
그저 사람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존재감으로 공간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제법 긴 시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물론, 조선의 내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침묵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시열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와 사람에 대한 호불호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않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자이며 대신이었다.
그의 세 치 혀는 조선의 2/3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으며, 그의 걸음은 조선의 무게추를 바꿀 수 있었다.
바로 그와 충돌하였다.
물론, 언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송시열이었기에 감히 정책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성균관을 기어이 징벌하겠다는 선언이 있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성균관의 모든 유생이 대성전에 집결하였고, 가장 앞에는 두 명의 장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참으로 흉흉한 소문이 무성하였네.”
“무성하긴 하였으나 흉흉한 정도는 아니었네.”
두 사람의 표정은 참으로 어두웠다.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무거운 바위였다.
허공을 향하고 있는 두 사람의 눈동자는 세상을 담고 있지 않았다.
물론 당색을 달리하였기에 대화가 아주 원만하지는 않았다.
“보시게. 어떠한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고 수용하는 풍모(風貌)를 보이기까지 하셨지 않은가. 이는 그간 자네들의 입을 통하였던 흉흉한 소문을 덮을 수 있지 않겠나.”
“험험. 뭘 또 흉흉한 소문이 우리 입에서 나왔다고 하는가.”
“그 소문이 남인 출신인 자네들의 입에서 나오지, 우리 입에서 나왔겠나?”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엄숙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대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참으로 진지했다.
“본부장 대감께서 성균관을 벌하겠노라 선언하셨네. 그간의 일을 되돌아볼 때 필시 큰 흉사가 닥칠 것인데 참으로 조용하지 않은가. 솔직히 나는 이게 더 두렵네.”
“일부는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본부장 대감은 신왕께서 즉위하신 이래 한 번도 흉계를 꾀하시지 않았네. 천지개벽보다 쉽지 않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생생한 현실이니 어찌 부정하겠는가.”
“부정하지 않네. 정사에 기록될 일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후대의 사가는 이를 필시 괴력난신이라고 전할 것이네.”
어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토록 오묘할 수가 있을까?
욕이되 욕이 아니었고, 칭찬이되 칭찬이 아니었다.
듣고도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며, 설령 화가 날지라도 듣지 않을 수 없으니 과연 이 나라 조선의 내일을 책임질 유생들의 수준 높은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이미 사달이 났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조용하네. 이는 필시 우리를 더 곤혹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네.”
“내가 비록 당색은 서인이지만 우암 대감이라면 능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이토록 당색을 벗어나 진실을 인정하니 내가 어찌 흠모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무릇 유자(儒者)라면 당색보다는 진실을 봐야 하는 법일세. 우리 서인은 이리 배운다네.”
“어련하시겠나.”
농처럼 가벼운 대화이기도 하였으나 무언가 아슬아슬한 수위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어두운 두 사람의 표정은 당면한 상황이 실로 엄혹하다는 걸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점포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하네.”
“끌. 참으로 적나라하게 밝혀졌다지?”
“작금의 사태는 정사에 기록될 것이고, 우리는 처벌 받게 될 것이야.”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우리는 단지 선의였거늘.”
“선의일세. 오직 선의였어. 나는 지금도 무너져가는 성균관을 부여잡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여기고 있네. 하지만…….”
묵직한 한숨과 동시에 말이 밀리듯 새어 나왔다.
“우암 대감의 일갈을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정하지 않겠네. 언로를 통하여 쟁취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우리는 이를 숨겼어.”
“쉽고 편한 길을 찾은 것이지.”
송시열이 던진 화두.
그것은 유생들의 심장을 무겁게 했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목적을 위해서 과정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독하고 차가운 정치에서 어찌 모든 과정을 정도로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정략은 필수적이며 추악한 과정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노회한 정객의 영역이다.
아직은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있어야 할 성균관 유생의 심장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
어쩌면 가장 순수해야 하며, 열의가 넘쳐야 할 성균관에서 도모한 일은 그 어디에도 원칙은 없었다.
-너희가 이끌어갈 조선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감히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침묵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침묵은 상당한 소란과 함께 사라졌다.
유생들은 의아하여 시선을 돌렸고, 그 즉시 대경실색하며 극진한 예를 취하였다.
소란의 주인공은 바로, 조선의 지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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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가 워낙 유별나서 아예 잊고 있었다.
정태화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다.
그는 그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아니라 아주 뛰어난 경세가였다.
더 놀라운 건 이 시절 관리들의 능력이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치밀하게 해당 사안을 감찰해낸 것이다.
하나 더.
덮었으면 모를까, 이미 내가 활시위를 당긴 일이었다.
정태화로서는 큰 치적을 남길 기회였으나 전혀 나서지 않았다.
아예 내게 넘긴 것이다.
그간 정태화를 오해한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게.
다른 곳도 아니고 성균관이었다.
나라의 동량(棟梁)으로 성장할 유생들이 반촌의 반인과 결탁하여 쇠고기를 반출하였다.
엄격한 우금정책을 강조한 조선의 법도를 철저하게 농락한 것이다.
다른 이들도 아닌 성균관의 유생들이 말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너무나도 보편적이었기에 말하고 듣는 것도 지겨울 정도다.
그러나 이 단어야말로 조선의 근간이며 역사이고 전부였다.
조선의 법도는 농사가 천하의 큰 근본이라는 명제를 향해서 나아갔다.
농업의 부흥은 조선의 태평성대였으며, 부국강병과 직결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농업의 나라였으며, 농업이 조선의 국고였다.
농업은 여러 가지를 중시해야만 했다.
시비법, 농법, 치수, 관개…… 참으로 여러 가지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으뜸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농우(農牛)였다.
농우야말로 농업의 성패(成敗)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조선은 농우(農牛)를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그랬다.
농우의 감소는 농업의 후퇴였다.
지금껏 그래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며, 지금 이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농업으로 역사를 이어온 조선의 가장 큰 법도 중 하나였다.
그러하기에 쇠고기는 그저 고기가 아니었다.
나라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축을 도살하여 얻은 귀한 고기다.
먹기 힘들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 소가 귀하였기에 귀하였다.
하여, 조선은 쇠고기를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이는 법도였다.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도였다.
원론적인 부분만 질타하더라도 큰 죄였다.
여기에 정태화가 파악한 현실을 접목하니 아예 결이 다른 사안이 되었다.
하여,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운을 띄우는 이는 없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밀어낸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소. 내가 어찌 모르겠소이까. 이 나라의 내일을 책임질 성균관의 어려움을 회피한 건 조정의 대신들이었소.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이까. 한데, 우리가 성균관만 방치하였소?”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기에 그러했다.
“이 나라 조선의 조정은 너무나도 비루하였기에 백성을 구할 구휼미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소. 백성도 방치한 이 나라 조정이거늘, 성균관의 경비를 확보하지 못한 게 대관절 무슨 문제란 말이오?”
이것은 자해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폭력이었다.
“이 나라 조선의 대신은 너무나도 고루하여, 백성의 절규가 아니라 이미 글자로만 남은 주자의 말만 들었소. 또한, 지금 죽어가는 백성을 바라보지 않고, 이미 오래전 썩어 흔적도 남지 않았을 주자의 시체만을 바라봤소.”
나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답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하는 것인가.
확실한 건 한 가지가 있다.
내가 감히 조선의 중추를 질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요. 우리가 이러한데, 성균관의 유생들이 무엇을 보고 배웠겠소이까. 우리가 조선의 내일이 아니라 현상의 유지만을 바라보고 있거늘,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감히 그러할 수 있다.
나는 저들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러하다.
하여, 말하였다.
작금의 현실을.
“아무리 거대한 전란이 나라를 집어삼킬지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전란이 이어질지라도, 수만 명의 백성이 터전을 떠나게 하는 재해가 있을지라도 이익을 취하는 자는 반드시 있소. 역사가 증명하듯 그들은 실패하지 않소.”
“…….”
“조선의 조정이 가난하다고 하였소? 백성이 어렵다고 하였소? 재해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하였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유해지고, 윤택하며, 기둥을 새로 세우는 무리가 있소. 이미 조선에는 영리를 추구하는 무리가 가득하오. 그들은 양반의 삶을 모방하고자 하였기에 쇠고기를 탐내었소. 세상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이외다.”
예상대로 무거운 침묵이 중대본을 짓눌렀다.
나는 이를 밀어내고자 다시 세 치 혀를 움직였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재력과 반촌의 쇠고기가 만났을 때 어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소.”
정태화의 문서를 펼치며 이 모든 사안의 본질을 하나씩 언급했다.
“도성에만 쇠고기를 판매하는 점포 48개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외다. 이는 최소치이지요.”
48개의 점포.
엄청난 규모였으나 무언가 추상적인 수치였다.
그래서일까?
문서는 정확한 수치 역시 명시하고 있었다.
“최소 2만 5천 냥을 확보할 수 있소.”
성균관의 경비가 1,800냥이었다.
그런데 48개 점포의 이익이 2만 5천 냥이라고 한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모두 문서를 통하여 숙지하고 있었으나 헛웃음을 내고야 말았다.
그만큼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그냥 웃었다.
웃음밖에 안 나와서 그냥 웃었다.
이 꼴이 너무나도 비루해서 그냥 웃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아파서 그냥 웃었다.
지금은 그냥 웃고만 싶었다.
어찌하여……?
도성에서 성균관 유생이 이토록 거대한 범죄 행위를 자행하였는데 조기에 파악조차 하지 못한 이 나라 조선이 너무나도 안쓰러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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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5천 냥…….
가난하고 가난한 나라, 조선의 사정을 고려할 때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듣기만 하였는데도 유형원은 심장이 울렁였다.
수시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었고, 입술을 깨물거나 들썩거렸다.
그런데도 진정하기 어려웠고,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오랜 세월 갈망했고, 머릿속에 그렸던 대계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걸.
공자와 주자가 다시 살아와도 비웃을 제안이었다.
이를 전한 사람은 벗, 윤휴가 유일했다.
오직 그에게만 전하였다.
그런데 벗은 크게 놀라며 해내자고 했다.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미 세상은 변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저 웃음으로 화답하였을 뿐이다.
변화는 분명하였으나 변화의 크기가 압도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송시열의 자조적인 웃음이 공간을 지배할 때 잠시 회상했다.
카랑카랑한 송시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생명력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끈질겼기에 지금도 심장을 흔들었다.
-조선의 법도에는 눈이 없다.
이는 무엇이었을까?
아니, 무엇인지 안다.
조선의 하늘 아래 누가 감히 법도의 잣대를 이토록 강건하게 규정할 수 있을까.
-유자로서, 사대부로서 원칙을 준수하지 못한 것이다.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고작 너희의 한계이며 그릇이다……. 사대부는 법도를 규정하며, 집행하며,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이는 학문을 익힐 때 심장에 새겨야 한다. 사대부는, 관리는, 위정자는 백성보다 백배는 강도 높게 법도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뻔한 말이었다.
누가 이를 모르겠는가.
조선의 사대부라면 알아야 하며, 새겨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알기만 했을 뿐, 새긴 이는 없었다.
해서, 뻔하고 뻔한 입에 발린 말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칭칭 감고 있을 정도로 질기고 긴 뻔한 말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일갈은 아니었다.
-조선의 혜택을 받았기에 이 나라에서 허용한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너희가 선택한 건 원칙이 아니라 편의였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애써 감췄던 진실은 송시열의 세 치 혀가 정확하게 구현했다.
너무나도 날카롭게 백일하에 나타났다.
-이 나라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한 이들의 선택과 결정치고는 너무나도 졸렬하지 않은가.
이는 조롱이 아니었고, 조소도 아니었으며, 비난이 아니었다.
비판이었다.
너무나도 냉정한 비판이었다.
이보다 신랄한 비판이 있을까?
조선의 하늘 아래서 누가 감히 이 비판과 만났을 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조선의 하늘 아래서 누가 감히 이 비판을 들었을 때 어깨를 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참으로 오만하지 않은가.
이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오만함이 원인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조선의 위정자가 옳지 않을지라도, 그를지라도 적어도 오만함은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오만하였을지라도 혹은 오만해 보였을지라도 그것은 개인에 국한할 뿐이었다.
수준의 차이는 있겠으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사대부에게 오만함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만함을 말했다.
-성균관의 유생이라는 지위를 특권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같잖은 오만함이 너희 행동의 타당함을 그토록 억울하게 역설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시 새겨도 날카로운 말이었다.
-누구도 너희에게 오만함을 내리지 않았다.
다시 새겨도 아픈 말이었다
-누구도 너희에게 오만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새겨도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가장 크게 실수하였는지 아느냐?
오만함을 규정한 것은 끝이 아니었다.
하면, 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들어야 한다.
들어야 했다.
대체 무엇인지.
유형원은 손을 꽉 쥐었다.
여운이 아니었다.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거세게 뛰었다.
숨이 거칠어질 만큼 뛰었다.
폭발할 듯 뛰었다.
숨을 내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뛰었다.
그 옛날 조선을 등졌다.
조선을 조롱하였고, 비웃었으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등졌다.
혹자가 이유를 물어볼 때 밤을 새워 말해도 시간이 부족한 이유가 있었다.
실망과 좌절의 이유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슴 어딘가에는 조선에 대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생각하여 다가서고자 하면 괴로울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달리 정말로 몰랐는지 되묻고 생각한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하늘처럼 섬겼던 스승과 피 끓는 우정을 나눈 벗들의 노고를 어찌 가벼이 말할 수도 있을까.
조선을 외면하였으나, 조선을 위하는 그들의 거센 심장 박동을 어찌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기는 복잡한 감정과 답답해지는 가슴을 어찌 속 시원하게 어떠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내밀었던 손을 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꿈에서라도 그들의 손을 잡고 이 나라 조선을 개혁하였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을 향한 어떠한 희망은 싹트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은 조선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고, 날카로운 눈빛은 조선의 썩은 부위만 보여줬다.
하지만 꿈에서라도 그들의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혼자만의 일이겠는가.
이름조차 알 수 없고, 남기지 못하였을 셀 수도 없는 많은 선각자가 재야에 은둔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조선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병마가 점차 커진다는 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의 수명을 갉아 먹는다. 너희는 이 나라를 기어이 재건하려는 이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송시열의 세 치 혀가 심장을 뚫었다.
심장은 더 뛸 수 없었다.
심장은 더 호흡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숨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송시열의 이어진 말은 귀를 통과하였고 아무런 장벽도 없이 머릿속을 지배하였다.
-너희의 행동은 조선을 병들게 할 것이다.
이보다 단호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확신과 신념이 이러한 단호함을 만들어낸 것일까.
-약조하지. 내 모든 걸 걸고 반드시 너희를 벌할 것이다.”
벌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오만함이었다.
이는 명백한 오만함이었다.
대관절 조선에서 성균관의 유생을 벌할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오만함이었다.
그러나 오만하지 않았다.
오만하지 않은 오만함이었다.
유형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감정의 폭풍은 여전히 거세게 몰아쳤다.
피하지 않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몸을 실어 그대로 맡겼다.
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변화의 크기는 생각한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요동치는 감정의 어느 한 곳에서부터 냉철한 이성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되새겼다.
그러니 놀라웠다.
다 놀라웠으나 가장 놀라운 건 송시열이 보여준 특권의 해체였다.
송시열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무게는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산림의 영수로서 가진 압도적인 권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쉬운 길, 편한 방법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여, 유혹은 거대하고 달콤하지 않은가.
그런데 만일 그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물음의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아 나올 수 있었다.
너무나도 뻔한 답이며 이는 조선의 역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랬다.
분열이었다.
송시열이 서인 유생을 매섭게 질타하였다면 성균관은 지금쯤 완전히 사분오열되었을 것이다.
서인 유생은 머리를 숙이고 송시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남인 유생은 불평불만을 토로하였을 것이다.
서인의 영수로서, 산림의 영수로서 가진 송시열의 권위라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태산보다 거대한 크기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놀라웠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 송시열은 오직 세 치 혀로 성균관의 분열을 원천적으로 막아냈다.
성균관의 서인 유생과 남인 유생이 논의하고 법도를 어겼고, 송시열이라는 장벽을 함께 만난 것이니 말이다.
자금의 변화가 이뤄진 모든 시작이 송시열이라는 말은 절대 과언(過言)이나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필생의 과업이라고 하였으나 아니었다.
꿈꾸었으나 그저 꿈이었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동의를 구해낼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해결해야 하는 건 오직 재원이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 재원의 해결책이 펼쳐졌다.
마침내 꿈은 현실의 목전까지 와있다.
울렁이는 속을 밀어내며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전하께서 성균관에 납시었습니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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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왕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나와 중대본의 인사들은 황급히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떠나서 이번 일의 시작이 나와 중대본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성균관에 당도하니, 생각과는 또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군왕의 권위나 유려한 언변으로 성균관 유생을 짓누를 줄 알았으나 전혀 아니었다.
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성전의 현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이대로 더한 압박이었다.
이연의 존재감은 이미 아득히 먼 곳에 있기에 그러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생들은 더욱 몸을 낮췄다.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나의 경고로 어수선한 상황에 군왕이 직접 등장하였는데, 존재감으로 사방을 제압하고 있으니 머릿속이 얼마나 새하얗게 타들어 가겠는가.
그때였다.
물끄러미 현판만 바라보던 이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현판(懸板).”
포문은 너무나도 간결했다.
하여,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현판은 위치와 모양, 글자 수에 따라 편액, 현액, 횡액, 주련 등 다양한 용어로 쓰이는데, 이 중 편액은 건물의 성격을 3~5글자로 함축한다. 가볍게 볼 때 현판은 건물의 명칭을 알리는 글자에 불과하지. 그러나 현판을 단지 글자로 접근하는 건 참으로 무지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현판이야말로 건물의 성격과 역사 그리고 전통을 가장 정확하게 규정하기에 그러하다.”
이어질 말은 무엇일까.
성균관 유생들은 바짝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대성전의 대성(大成)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서 유래하였다. 성리학 아니 유학을 가장 중시하는 조선에서 대성전은 가히 최고의 명예와 직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조선 땅에 어찌 대성전이 한 곳이겠는가. 하여, 그 무게와 위상은 오직 현판으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뜻 모를 소리였다.
하지만, 절대 선문답일 수는 없다.
군왕의 언행은 정치적이기에 그러했다.
하물며 이연이라면 더 그러하다.
“일찍이 명필이셨던 선조 대왕께서 한호의 필체를 보고 ‘기이하고 장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이르셨다. 이에 한호가 필생의 필력을 자랑하니, 바로 성균관 대성관의 현판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대성관의 현판으로 향했다.
보기만 해도 설암체의 근골(筋骨)이 강하게 나타나며 짜임이 방정하고 비후한 획법이 돋보이는 글자는 그야말로 성균관 대성전의 실체적인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무수한 대성관 중 성균관 대성관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이 나라 조선의 내일이니라.”
바야흐로 본론이 시작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지배했다.
“한데, 이 나라 조선은 참으로 비루하지 않은가.”
“저, 전하.”
“이 나라 조선이 어찌 명맥을 이어왔던가.”
공기의 흐름은 너무나도 격하게 뒤틀렸다.
이건 상상의 범주를 아득하게 넘어선 상황이었다.
“선조 대왕께서는 몽진과 몽진을 거듭하시어 조선을 지키셨다. 비루함의 시간이었다.”
“!!!”
“!!!”
“!!!”
황망함이 거세게 몰려왔다.
그리고
“어디 이뿐이었는가. 인조 대왕께서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으시는 치욕을 감내하시어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셨다. 이 나라 조선은 이토록 비루하고 비루하게 역사를 이어왔다.”
“!!!”
“!!!”
“!!!”
우리는 결국 감내하지 못하고 일제히 부복했다.
오직 이연만이 두 발을 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