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거병(擧兵)(3)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몽진을 가지 않았다면 조선은 궤멸적 상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뭐, 그냥 더 할 말이 없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내세울 것 없는 역사라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과거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저렇듯 당시의 전황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정확한 평가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백주에 군왕이 직접 비루한 역사라고 쐐기를 박았으니 말이다.
신하로서 이보다 황망할 수는 없었다.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앙재해 대책본부 본부장 송시열은 답하라.”
“신 중앙재해 대책본부 본부장 송시열, 오직 하문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오래전 태조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역성을 도모하셨소. 이의가 있소?”
“어찌 이의가 있겠사옵니까. 오직 백성을 바라보았던 역성의 길은 그야말로 민본의 길이었사옵니다.”
이는 조선의 중추를 향한 이연과 나의 문답이었다.
아니, 문답의 시작이었다.
“묻겠소. 태조께서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셨소?”
멈칫했다.
설마하니 이토록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할 줄은 몰랐다.
정치적 수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할 때 성리학을 도구로 사용했다.
그가 세우고자 하는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여서가 아니라, 여말선초에 성리학이 가장 합리적인 학문이었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이는 금기였다.
역사가 이어지면서 성리학은 신성한 학문이 되었고, 조선은 신성한 성리학의 나라가 되었기에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금기로부터 자유로웠기에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이연이 내게 이를 요구하고 있다.
나의 처지가 궁색할까 두려워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군주로 즉위한 인물이 이토록 적나라한 물음을 던졌다는 사실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경은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이연이 재촉했다.
시선은 일제히 내게로 집중됐다.
이제 더는 답변을 미룰 수 없었다.
하여, 답하였다.
“성리학이옵니다.”
웅성거림은 없었다.
그러나 느껴졌다.
충격과 충격 그리고 충격을.
그리고
“경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이연은 충격의 강도를 최대치로 증폭시켰다.
여전히 현판을 바라보는 그의 목소리는 내용과는 달리 참으로 나근나근하였다.
마치 편안한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도구로서 성리학은 어떠하였소?”
“능히 민본의 도구였사옵니다.”
“그러하였소?”
“태조께서 성리학을 도구로 선택하심으로써 사전을 혁파하여 백성을 구하셨사옵니다. 또한, 지옥보다 끔찍하였던 이 땅에 생기를 싹 트게 하셨사옵니다. 어찌 부족함이 있었겠사옵니까.”
“참으로 쓸 만한 도구가 아닐 수 없소. 하면, 계속하여 예기를 자랑하였소?”
나는 현대인이다.
몸은 송시열이지만 내 정신은 현대인이다.
하여, 자유롭게 금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이연이 지속하여 당혹의 순간으로 내몰고 있었다.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왜……?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러했다.
이 대화의 끝이 어찌 귀결될지.
그렇기에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
맹렬하게 치솟는 군왕의 결의를 어찌 회피할 수 있겠는가.
선택지는 오직 한 가지다.
이연과 함께 걷는 것이다.
하여, 말했다.
“아무리 명검이라고 할지라도, 휘두르면 날이 상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나는 지금 조선의 성리학자를 버린다.
오직 이연을 바라본다.
하여, 장내를 지배하는 충격 따위는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개국의 열의를 모두 품었던 성리학은 이미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오?”
“고작 도구에 불과하였던 성리학이 이제는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한 세상은 어떠하오?”
“비루하옵니다.”
“그러한 나라는 어떠하오?”
“비루하옵니다.”
“그 비루한 나라의 국호가 어찌 되오?”
“조선이옵니다.”
문답의 내용은 정상 궤도를 아득히 벗어났다.
만일, 이 대화의 주인공들이 군왕인 이연과 유종인 송시열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수위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저 불나방처럼 나아갈 뿐이다.
이연과 함께.
“무릇, 성리학은 창이어야 하옵니다.”
“어찌하여 그래야 하오?”
“대저 창의 용도는 적을 무찌르고 제압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성리학은 최고의 위력을 구현하였사옵니다. 백성을 착취하는 지주를 벌하였으며, 농토를 갈취하는 무도함을 치웠사옵니다. 제도를 손질하였으며, 국방을 강화하였사옵니다. 그렇게 지옥을 지웠사옵니다. 어찌하여 가능하였겠사옵니까. 성리학은 세상의 모순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학문이기에 그러한 것이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여전히 성리학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학문이옵니다. 일국을 통치하는 위정자라면 대안을 모색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하여, 성리학은 창이어야 하옵니다.”
“경의 말은 늘 흥미롭소. 계속하시오.”
“전하. 성리학은 세상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옵니다. 하온데, 만일 이러한 무기를 방패로 삼는다면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옵니다.”
“방패라.”
“그러하옵니다. 성리학이 방패가 된다면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지게 되옵니다.”
창은 공격의 수단이고, 방패는 방어의 수단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용도의 차이는 세상의 성질을 규정하였다.
“무릇, 방패는 방어의 수단이옵니다. 하면, 성리학은 무엇을 방어하겠사옵니까.”
외적의 침입 따위를 방어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다시 내쉬었다.
또 내쉬었다.
말했다.
“성리학자를 방어하옵니다.”
무엇으로부터?
“세상의 모순으로부터 성리학자를 방어하옵니다.”
어찌 방어하는가.
“교화로서 짓누르며 방어하옵니다.”
“어찌 교화로 짓누르오?”
“작금의 조선은 성리학이 태동하던 시절과는 다르옵니다. 이 땅의 백성은 과전법이 집행되던 시절처럼 오직 토지만을 바라보지 않사옵니다. 하온데, 성리학은 무엇이라고 하옵니까. 오직 농업만을 외치고 있사옵니다. 농업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백성이 제 살길을 찾아가는 걸 막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이옵니까.”
“대관절 막는 이유란 무엇이오?”
“성리학은 오직 농업만을 통제할 수 있기에 그러하옵니다. 하여, 백성은 농민이어야 하옵니다.”
불구덩이로 던져진 나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이미 물러날 곳이 없기에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각오로 내질렀다.
“무릇, 정치란 늘 대립이 발생하옵니다. 위정자들이 성리학자가 아닐지라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옵니다. 때로는 원칙과 민심이 없는 오직 제 권세를 위하여 대립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를 어찌 막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런데도 그 대립의 명분은 원칙과 민심이옵니다. 내재한 본질은 추악할지라도 겉은 그러하옵니다. 신은 진실로 이리 여기옵니다. 하온데, 성리학이 방패가 된 세상은 아니옵니다.”
이 시절 성리학이 최고의 통치 철학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성리학이 위정자를 위한 최고의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작금의 조선은 이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대저 백성이란 참으로 귀찮은 무리이옵니다. 늘 무언가를 바라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옵니다. 하나를 이르면 잊지만, 하나를 내어주면 열을 원하는 무리가 아니옵니까. 하여, 관복을 입은 이에게 백성은 참으로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그러한데도 민심은 천심이기에 그들을 살폈사옵니다. 권신이라고 할지라도 민심을 명분으로 삼았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성리학이 방패로 굳건한 세상은 아니옵니다. 너무나도 견고한 방패가 있기에 정계의 대립과 논쟁에 민심을 담지 않사옵니다. 이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옵니다. 이는 관리의 문제가 아니옵니다. 그들을 둘러싼 사상이 만든 세상이 그러할 뿐이옵니다. 이를 일개 개인이 어찌 극복할 수 있겠사옵니까.”
역사를 되돌아봤다.
성리학을 방패로 만든 조선의 역사를.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고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준비했다.
지금까지 한 말도 수위를 가볍게 넘어섰다.
그러나 서론에 불과하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아니, 결론이다.
“속이 검더라도 백성을 명분으로 삼았던 과거와는 너무나도 다른 역사가 있사옵니다. 훈구와 사림, 서인과 동인, 서인과 남인……. 이 고루한 다툼에 백성은 존재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나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였사옵니까. 권세를 차지하는 과정에 백성이 아니라 성리학적 경지와 논리가 우선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세상을 규정하는 원칙에 백성을 웃게 만들고, 배를 불리는 경세가의 정책이 아니라 성리학적 해석이 중시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이는 과거가 아니다.
이는 오늘이었다.
“전하. 만일 서인과 남인이 1년 복과 3년 복을 언급하여 다퉜다면 어찌 되었겠사옵니까. 누군가는 권세를 가졌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몰락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을 것이옵니다. 복제로 다툴 수 있사옵니다. 해석이 다를 수도 있사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성리학적 예법의 해석이 현실 정치의 권세를 규정하는 것이옵니까. 이 과정에 대체 백성은 어디 있는 것이옵니까. 이는 실로 끔찍한 세상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작금의 조선이 이러하옵니다.”
절절하지 않았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살찌우는 정책을 입안하는 이가 요직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경지가 관직으로 직결되옵니다. 결국, 경세가가 아니라 성리학자가 숭배받는 나라가 되었사옵니다. 하여, 모두 성리학을 익힐 뿐이옵니다. 그저 익히고 익힐 뿐이옵니다. 오직 학문의 경지가 모든 것을 규정하기에 단지 성리학이 융성할 뿐이옵니다.”
그저 담담하게 한 마디씩 이어갈 뿐이었다.
“하여, 성리학은 견고한 철옹성이 되어 성리학자를 지킬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세상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 성리학자를 위한 견고한 성벽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성리학이 오직 방패로서만 존재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성리학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나라, 성리학이 창이 아니라 방패가 된 나라. 하여, 참으로 고약하고 지독하며 추악한 나라, 바로 하늘 아래 성리학이 가장 융성한 나라. 이 나라 조선이옵니다.”
그리고
“대체 무엇이 두려워 성리학은 세상의 변화를 포용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화두를 던졌다.
이연이 받았다.
“변화란 무엇이오?”
“성리학적 교화는 오로지 창이 되어야 하옵니다. 하여, 신들은 위생 수칙의 교화를 고하였사옵니다. 이것은 조선의 성리학이 비루함을 벗어나는 첫 시작이옵니다.”
“일전에 나는 민본을 일렀소. 하여, 묻겠소. 경의 조선에서 민본은 과연 무엇이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옵니다.”
송시열으로 살아가는 이상, 나는 이 원칙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을 선택할 것이며, 소수를 버리고 다수와 함께할 것이다.
나의 성리학은 이러했다.
“경의 말대로요. 일찍이 태조께서 백성을 구하고자 선택하셨던 도구, 성리학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백성이 아니라 오직 조선을 지켰을 뿐이오.”
다시 시작된 이연의 선언.
오직 들을 뿐이었다.
“대저 왕조의 흥망성쇠란 피할 수 없소.”
“그러하옵니다.”
“무릇, 민심이 천심이기 때문이외다.”
그 말과 함께 이연의 시선이 움직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방을 훑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본부장의 말이 참으로 옳지 않은가. 성리학이 방패가 된 우리 조선은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성난 민심이라고 할지라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지울 수 없는데, 대체 무엇이 두렵겠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의아함이 커질 때였다.
“성리학의 방패는 기어이 이 땅에서 다시는 역성의 불씨가 일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
“하여, 조선은 반정은 가능할지라도 역성은 불가능하다.”
“!!!”
이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조차도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는데 다른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대성통곡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선의 왕이 두려워하는 건 왕권의 쇠약함이었으며, 조선의 대신이 두려워하는 건 사화였다. 이 세상에 백성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여, 이 나라 조선은 비루하다. 비루한 역사를 이어왔기에 비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비루할 뿐이다. 그렇게…….”
“…….”
“나는 이 나라 조선의 왕이 되었다.”
“…….”
“하여, 나는 비루하다.”
“저, 전하…….”
이연의 용포가 휘날렸다.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비루함을 뚫고자 한다. 작금의 비루함은 성리학이 만들었다. 하여, 오늘부터 나는 사문난적이다.”
“!!!”
“!!!”
“!!!”
“!!!”
오늘의 문답은 고작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로 품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이연이 이 길에서 외로움에 빠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
최고의 예를 갖춰 말했다.
“신 중앙재해대책본부 본부장 송시열…….”
말했다.
“지엄하신 어명을 받들어 진실로 사문난적을 결의하옵니다.”
“!!!”
“!!!”
“!!!”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의 총본산인 성균관 대성관 앞에서…….
조선의 군왕과 조선의 유종이 사문난적을 선언했다.
이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한 충격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신 윤휴, 일찍이 사문난적을 결의하였사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윤휴가 예를 취하며 말했다.
그리고
“신 윤선도, 진실로 백성을 위할 수 있다면 기어이 사문난적이 될 것이옵니다.”
“신 허목, 하늘을 우러러 한순간도 사문난적을 두려워하지 않았사옵니다.”
“신 허적, 기쁜 마음으로 사문난적이 될 것이옵니다.”
“신 송준길, 사문난적의 창으로 성리학의 방패를 뚫겠사옵니다.”
“신 윤선거, 작금의 조선이 선택해야 할 길은 오직 사문난적이옵니다. 진실로 이리 여기옵니다.”
중대본의 집단 결의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신 유형원. 시작부터 지금까지 사문난적이 아닌 날이 없었사옵니다.”
유형원의 마무리였다.
오늘 군왕과 신하들이 사문난적을 결의했다.
하여, 이는 진실로 거병(擧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