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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96화 (96/298)

96화 연모(戀慕)(1)

나는 알아버렸다.

드디어 알아버렸다.

조선 시대 왕들이 왜 상소라면 질색을 했는지 드디어 알아버렸다.

분명 방구석부터 하나씩 쌓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시작했다.

그런데 순식간이었다.

진짜 미친 속도였다.

서찰이 산처럼 쌓이는 건.

진짜 아예 산이었다.

문제는 서찰을 읽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씩 답변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으나, 사상전의 확전을 최대한 막고 내게 집중하도록 유도하려면 꼭 거쳐야 할 고난의 행군이었다.

나는 퀭한 눈으로 서찰들을 쳐다봤다.

멋지게 방패가 되겠노라 선언한 뒤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었다.

아주 그냥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수준이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어지러운 정도였다.

너무 혼미했다.

“…….”

특히, 남인 사족의 공세는 뼈가 아팠다.

공식적인 루트가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개처럼 달려들었다.

아예 두들겨 패는, 아니, 물어뜯는 수준이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영혼이 가출하려는 걸 겨우 잡았다.

코로 겨우 숨을 쉬면서 수명을 연장한 뒤 고개를 돌렸다.

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파악하였을까?

여태껏 가만히 있던 윤선거가 재빨리 먼 산을 쳐다봤다.

나는 힘겹게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촌……?”

“…….”

“이보게. 미촌? 자네는 지금 내 앞에 있고, 내 말이 들릴 수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그러고 있나?”

“아.”

“응.”

“아. 조선의 내일을 고민하고 있었지 뭔가.”

“참으로 위대한 고민이 아닐 수 없네. 한데, 벗의 내일을 먼저 살펴볼 생각은 아예 없나?”

“이는 오직 자네의 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바일세.”

“분명하게 말하겠네. 포문(砲門)은 자네가 열었어.”

“부정하지 않겠네. 한데, 이는 누가 자네에게 강권한 게 아니지 않은가. 나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네. 자네가 사문난적의 방패가 되겠노라 결의한 그 순간을 말일세.”

윤선거는 정말 완강했다.

이해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백두산을 무색하게 만드는 서찰의 엄청난 높이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을 아예 상실케 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아니, 그런데 미촌. 아무리 그래도 명백한 원인 제공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심지어 우리는 평생의 벗이 아닌가.”

“……우암. 누가 자네한테 독배를 마시라고 했나?”

와.

평소 윤선거의 소심한 성격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거의 소비에트연방 철의 장벽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연이 교지를 내리지 않는 이상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잡힐 만큼 서찰은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러면서 붓도 잡았는데, 거의 동시에 윤선거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이제 보니까 이 사람은 은근하게 나 약 올리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굳이 내 사가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다.

보통 고단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모든 건 송시열의 지난 업보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나?”

“허. 자네 어찌 이리 야박할 수 있나? 강우가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비 오면 못 움직이나?”

“그런 말이 아니지 않은가.”

한마디로 비가 적게 오거나 그칠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심오한 말이었다.

이대로 눌러앉아서 밥을 얻어먹으면 더 좋은 일이고.

소심하고 눈치를 보던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송시열의 기가 너무 세서 피했던 건지도 모르고.

과거 소심하고 내 눈치를 보던 윤선거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대체 이 인간의 말문이 언제 이렇게 트였는지 모르겠다.

물론, 여전히 눈치를 보긴 했고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열받는 건 열받는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붓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그러니까 딱 그때였다.

“우암 대감, 안에 계시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평화롭던 내 사가를 울렸다.

나와 윤선거는 동시에 시선을 마주치며 일단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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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나오고 보니 비가 상당히 많이 내렸다.

아니, 이 정도면 통상 폭우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윤선거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돌아가는 길이 험난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이토록 궂은 날씨에 기어이 벗을 쫓아내려고 한 것일세. 만일, 내가 자네 말대로 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일제히 손가락질하며 크게 욕하였을 것이야.”

……다른 건 모르겠고 ‘일제히’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보편적으로 저 위치에 배치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소심해도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남긴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은근하게 나를 긁는 건 가히 최고였다.

윤선거와 정겨운 우정을 조금 더 나누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미수에 그쳤다.

“우암 대감!”

손님이 있었다.

너무 중요한 분들이라서 잠시 잊었을 뿐이었다.

시선을 돌렸다.

얼추 십수 명이었다.

연령대는 제법 다양했고.

복색을 보아하니 제법 살 만한 양반들로 추정됐다.

게다가 대뜸 남의 사가에서 고함을 지르는 무례함과 나를 향한 명확한 적의.

이 정도면 이들이 누군지 안 물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남인의 사족들이었다.

저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대한민국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여기까지 타격하러 올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비도 오고 그러는데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이 정도로 폭우가 내리는데 굳이 여기까지 달려올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본질적인 의문이 치솟아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날이 좋지 않소. 모두 돌아가시고 좋은 날에 다시 오는 게 어떠하오?”

그냥 축객령을 내렸다.

물론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찌 감히 주자를 농모(陵侮)할 수 있소이까.”

“오만함이 하늘을 뚫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주자를 경시할 수는 없소.”

우리 남인의 정객들은 폭우를 뚫고 고함을 질렀다.

이 엄청난 날씨에도 이런 기세라니, 그야말로 신념의 강자들이라고 불러 마땅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한 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식상한 도입이 아닐 수 없다.

진짜 이 사람들은 주자 아니었으면 외로워서 어쩔 뻔했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아하니 최소 남인의 지부장 정도는 되는 인물들이니, 이렇게 만나서 논파하면 파급력이 크지 않겠는가.

우선 덕담으로 시작했다.

“먼 길 오셨는데 날이 참으로 애석하오. 어떻소? 좋은 날 다시 오면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소?”

“하. 참으로 무례하도다!”

역시 씨알도 안 먹힌다.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관절 내가 언제 주자를 경시하거나 비판하였소?”

“우암 대감! 보고 들은 사람이 지천에 가득하거늘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이오? 듣던 대로 참으로 무책임하오!”

“실제로 안 했소.”

공식적으로는 정말 한 적이 없다.

사석에서는 많이 했지만 말이다.

“하. 사문난적을 직접 언급하였소! 한데, 이리 발뺌하시오?”

“그렇소. 사문난적을 언급하셨지요.”

“그건 또 무슨…….”

시뻘게진 얼굴로 따지던 이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아주 급하게 멈춘 티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폭우가 최대한 가리고자 맹렬하게 퍼부었으나 무조건 알 수 있었다.

왜……?

사문난적을 언급하신 분은 내가 아니라 주상전하였으니까.

그런데 이건 아무도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미쳐서 간을 꺼내 들고 마라톤을 하지 않는 이상,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우암. 일단 안으로 모시는 게 어떠한가. 폭우가 내리는데 계속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네만.”

맞는 말이긴 했다.

그냥 보내면 제일 좋은 일이지만, 안 가고 버틸 사람들이 분명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밖에서 대치하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니었다.

딱 그때였다.

“대, 대감. 큰일 났습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관리였다.

순식간에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다급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폭우가 내려 청계천이 범람하였습니다.”

이건……?

늘 있는 일이잖아?

그냥 빤히 쳐다만 봤다.

그런데 이어진 말이 아주 충격적이었다.

“범람한 청계천의 물에 인분이 가득합니다! 이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도성이 똥물에 빠지고 있습니다!”

“!!!”

“!!!”

이런…… 씨발.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누군가가 수거하다가 은근슬쩍 청계천에 버렸다.

그러니까 인분을 그냥 투척한 것이다.

물론, 청계천에 떠다니는 모든 인분이 투척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똥물이라는 건, 엄청난 양의 인분이 추가되었다는 걸 의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걸 대체 무슨 수로 해결한단 말인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재해를 방비해야 할 중대본이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고작 이 정도로 지친다면 경신 대기근은 어찌 막아내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은 남인들과 사상전을 펼칠 때가 아니었다.

사상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당장 중대본을 소집하여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뭘 해도 그 뒤에 해야 한다.

이곳은 변방이 아니라 도성이었기에 그러했다.

심지어 위생 사업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그러한데 똥물 따위에게 빼앗길 수 없다.

윤선거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가실 수 없소!”

“기다리시오!”

“어찌 이리도 오만할 수가 있소이까!”

주희의 제자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니, 아예 가로막았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

우습게도 박세당이었다.

세상이 어쩌다가 사문난적의 적통이어야 할 박세당이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허탈하여 나도 모르게 말했다.

“선택이 고작 이거였다니, 참으로 실망이군.”

“…….”

박세당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됐다.

더 말해 뭐하겠는가.

그새 빗소리는 더 커졌고, 폭우의 기세는 광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매서워졌다.

그런데도 길을 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 청계천이 범람하여 사달이 났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러고 있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노려봤다.

“이 자리에…….”

살기까지 담았다.

“나 송시열보다 성리학에 통달한 이가 있더냐?”

“!!!”

한 걸음 걸었다.

“있으면 나서도록 하라.”

또 한 걸음 걸었다.

“기꺼이 응해줄 것이니.”

상대의 허점을 찾아 허수를 취하였다고 하여 승기를 잡는 건 아니다.

전투에서도 기습에 성공하였다 하여 전면전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그러했다.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달려온 주희의 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나 송시열을 상대로 성리학을 운운할 수 없다.

아니, 조선에서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송시열인 이상 그러했다.

“오라.”

“!!!”

다시 걸었다.

“다시 묻지. 나서겠느냐.”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는가.

주춤하며 물러설 뿐이었다.

또 걸었다.

그리고 길이 열렸다.

그 꼴을 본 나는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폭우로 백성의 고통이 하늘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오늘 너희는 성리학자가 얼마나 추악한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걸으며 말했다.

“사문난적의 문답을 해내고자 하는 이는 먼저 나와 성리학을 논해야 할 것이다. 그전에 경거망동한다면 실로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다. 내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또 걸으며 말했다.

“성현은 한 번도 너희를 성리학자라 이르지 않았다.”

“!!!”

“!!!”

“!!!”

다시 걸으며 말했다.

“너희는 수백 년 전 죽은 주희의 말을 그저 필사한 서책에 불과하다.”

어느새 사가의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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