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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98화 (98/298)

98화 위정척사(衛正斥邪)(1)

삼고초려 정국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따가운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당시 유형원의 차가운 비웃음을 잊지 못하였다.

-고작 1,500명씩 100여 일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랬다.

분명 그랬다.

-청계천 역사의 핵심은 결국 개천에서 나오는 토사(土砂)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개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토사를 운반하여 쌓아야 합니다. 이러한데, 1,500명과 100일이라는 규모와 시일은 개천 인근으로 토사를 쌓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토사를 개천 가에 방치하면 비가 내릴 때 흘러 들어갈 것이고 다시 개천이 막히게 될 것이니 어찌 임시방편이 아니겠습니까.

1,500명과 100일.

임시방편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조정에서 1,500명씩 100여 일의 역사를 주장하였습니다. 기존의 방침에서 조금 더 보태면 작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형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다소 차분해진 유형원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스승님.”

“말하게.”

“위생 정책과 별개로 유민을 동원하여 거주지를 구축하는 일을 미루는 건 어떻겠습니까.”

“미루자고 하였나? 어느 정도를 고려하고 있나?”

“100일입니다.”

“100일……? 설마 자네, 청계천 역사에 유민을 동원하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유민에게 역을 내리자는 것이군.”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었다.

유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청계천 역사의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100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일거에 동원하기 어렵다면 매번 수만 명을 확보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찰나였으나 유형원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호판 대감께서 보여주신 문서에 의하면 1천 명의 백성을 동원하는 것도 숨이 넘어갈 지경입니다. 하면, 유민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정말 이상을 조선 땅에 내리꽂으려고 하였던 유형원이 맞나 싶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밤하늘의 별을 따오려고 한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한 판단력을 내세우니,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구나.

그냥 중간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면 철혈의 재상이거나.

“청계천 준설에 1,500명의 인력이 필요하니, 폭우를 고려해도 2,000여 명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는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유민 2천 명은 그냥 유민이 아니었다.

정치 공학이 복잡하게 얽힌 무리였다.

이를 냉철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세세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세. 거주지 확보가 더 미뤄진다면 유민 정책과 위생 정책은 큰 난항을 겪게 될 것이네. 반계. 이곳이 도성이라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되네. 무엇보다 주상께서 유민에게 성은을 약조하셨다는 엄중한 사실도 말일세.”

“한데, 본부장. 반계의 제안이 나쁘지만은 않소.”

“아니, 호판.”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허적은 남인의 영수다.

고루하고 괜한 말이 아니라, 온건한 성격에 원론을 중시하는 인사인데 유형원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민을 버리는 일이 아니지 않소이까.”

“동시에 거주지 확보를 100일 미루게 되오.”

“거주지를 바라고 유민의 삶을 결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소.”

“무엇이오?”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니 어찌 고려하지 않겠소?”

“…….”

“참으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

남인의 영수이기 이전에 곳간 지기로구나.

그래. 중대본의 핵심이라면 정책을 우선해야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대화를 듣던 유형원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인 나와 실무 책임자 사이에서 교감이 이뤄졌다고 판단한 듯했다.

“스승님께서 더 신경 써주신다면 능히 해볼 만한 방책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이 어렵다고 하시면 어찌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제자가 되어서 스승을 이리도 괴롭히나?”

허목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능히 해볼 만한 방책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인 듯한데, 내가 더 신경 쓸 게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해야지. 암. 해내야지. 모처럼 제자가 이토록 의욕을 보이는데 어찌 스승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겠는가.”

순식간에 결의가 이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유민을 동원한 청계천 역사가 결정된 것이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딱 그때였다.

“다 좋소. 다 좋은데 가장 중요한 게 빠졌소.”

상대적으로 낮은 톤의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윤선거였다.

“미촌. 그게 무슨 말인가. 가장 중요한 게 빠지다니?”

“우암. 유민을 모두 청계천으로 보내면 성균관 일대의 오물은 누가 치우나?”

아.

만악의 근원, 성균관을 잠시 잊었구나.

절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단지 유생들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 아닐세. 그 많은 오물이 사방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네.”

“…….”

“동부의 꼴이 참으로 참담해질 것 또한 우려해야 하지 않겠나.”

윤선거는 대체 정체가 뭘까.

이런 혜안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송시열에게 당하고 살았을까?

그런데 의문은 금방 해결됐다.

성리학의 나라이니 성리학의 경지가 세상의 위계를 정하였을 것이니까.

어쨌든 개운해지려던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마땅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슬쩍 유형원을 바라봤으나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재원을 확보하지 않은 상황이니 선택지가 아예 없는 상황이었다.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지만, 당장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일세.”

“실은 나 역시 대안을 떠올리지는 못하였네. 이거 괜한 말로 발목을 잡은 게 아닐까 우려되는군.”

“아니지. 아니야. 옳은 지적을 한 것인데 어찌 그러시는가.”

대안 없는 반대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직시하게 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더 논의를 이어가는 것도 어려웠다.

지금은 뭐라도 집행을 해야 하기에 그러했다.

나는 쓰게 웃으면서 허적을 바라봤다.

“예상 가능한 동부의 문제는 대안을 수립해야 하겠으나, 우선 청계천 역사부터 도모하는 게 어떻겠소?”

“그래야겠지요. 실무는 진행하며 대안을 논의하는 게 옳으니까. 반계. 곧장 유민을 이끌고 청계천 역사를 집행하시게.”

“그리하겠습니다.”

이렇게 절반의 집행이 결정됐다.

썩 개운하지는 않으나 어쩌겠는가.

일단 범람부터 막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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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유형원과 허목을 급파한 중대본은 다소 어수선했다.

침묵의 시간이었으나 공기의 어색함이 너무 진하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모든 건 재원이외다.”

“…….”

“…….”

“…….”

침묵으로 일제히 동의의 뜻을 밝혔다.

사실 그랬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고, 뛰어난 학자가 있으며, 높은 결심을 내세울 수 있을지라도 현실과 접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돈’이었다.

이번 사안도 어쩌면 획기적인 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었으나 재원의 부족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만나면서 제대로 논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속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나도 괜히 답답해서 슬쩍 던지듯 말했다.

“백호. 뽕나무는 어찌 되고 있나.”

“휴.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반석에 올리자면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당장 국고의 어려움에 보태지 못하니 소생 또한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굳이 이를 언급하시니 속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

분위기는 더 어두워졌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호판. 염전 정책은…….”

“백년대계외다.”

“…….”

허적에게도 한 대 맞았다.

나는 그냥 먼 산을 바라봤다.

그런데 허적이 굳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눈을 껌뻑거리면서 쳐다봤다.

“솔직히 위생국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오. 최근 파악한 바에 의하면 변승업도 사정이 어려운 듯하던데 참으로 답답하오.”

“…….”

“세세하게 파악해보니 그간 지원하던 약재의 수량도 줄었다고 하오. 음. 허 국장이 별말은 안 하지만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던데.”

“…….”

얼씨구?

이것 봐라?

점차 은근해지는 허적의 눈빛을 피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먼 산을 바라봤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변승업을 잘 설득하여 위생국 운영을 안정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전면 무역 개방을 위한 위대한 빌드업이니 말이다.

“본부장?”

안 들린다.

안 들려.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린다.

쳐다봐도 소용없다.

욕을 해봐라.

내가 미동이나 하는지.

계속 먼 산만 쳐다볼 거다.

그저 허적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겠으나 무역 개방을 위해서는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허적의 말이 안 들렸다.

상당히 길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니었다.

기쁨을 가득 담아서 쳐다봤는데 허적의 입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 계속 말하고 있다는 건데……?

그때였다.

외부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니까 소음이 잔소리를 덮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감. 성균관 유생들이 몰려왔습니다.”

관리가 전한 소식에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폭우로 난리가 났는데 집단행동이나 하는 무리를 향한 언짢음과, 군왕이 사문난적 선언을 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무리의 철없는 행동에 대한 염증이 올라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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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중대본을 나왔다.

바로 노기를 내지를 생각이었는데 멈칫했다.

유생들이 그냥 비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왕을 향한 연좌도 아니고 중대본에 항의 방문을 하러 왔는데 이러한 결기를 보인다는 건 너무나도 이례적인 경우였다.

이리되면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일단 유생들을 폭우로부터 피하게 하는 게 순서였다.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유생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두 명의 장의가 보였고…… 그들은 무언가를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

“!!!”

“!!!”

“!!!”

진짜 기함(氣陷)했다.

도끼를 들고 연좌하는 지부상소라도 이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의들이 들고 오는 건 조선 유학의 상징, 바로 성균관 대성전의 현판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부상소라도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오늘 왜 이리 사건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

“성현께서 이르셨습니다.”

장의의 낭랑한 목소리가 폭우를 뚫었다.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배척하라.”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잊을 수 없는 구호였다.

이는 바로

“소생과 성균관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결의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지고한 가치를 지키고자 한 위정척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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