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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01화 (101/298)

101화 성리학 원리주의(1)

도성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폭우가 그쳤다.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날씨가 아름다워졌다.

한밤의 꿈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청계천 인근에 설치한 대책본부에서 열과 성을 다하여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하오? 일단 기도를 확보해야 하오.”

“그냥 말씀하시오! 다 적고 있소.”

“허. 답답하오. 참으로 답답하오. 이건 이해를 해야 하오. 이해. 어찌하여 매사 그리도 고리타분하게 접근하오?”

나는 윽박지르자 허목의 안색은 정말 말 그대로 썩었다.

목울대가 거칠게 꿈틀거리는 걸 보아하니 심한 욕을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하는 건 너무나도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달렸다.

“허 국장. 어제 나 송시열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셨소?”

“…….”

“답답하오. 다시 말하리다. 아니, 생각해보시오. 기억을 되새겨 보란 말이외다. 어제 나 송시열의 눈부신 활약이 단지 외우고만 있다고 하여 가능한 일이었소? 아니지요. 머릿속으로 깊게 이해하고 마음을 다할 때 몸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놀라운 성과를 얻어낼 수 있소. 아시겠소?”

그랬다.

나는 지금 조선인 허목에게 무려 심폐소생술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중이었다.

지난밤, 모두가 이미 죽었다고 말할 때 오직 나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폭우가 몰아치던 날,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 때 오직 나만이 옳다고 하였다.

누군가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오직 나만이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생각? 사고의 전환? 뭐. 이런 걸 해야 하오.”

앞서 나가는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겠는가.

“…….”

허목의 안색이 썩은 건 그저 뒤따르는 자의 숙명일 뿐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이를 살려낸 나의 위대한 업적은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가히 전설처럼 언급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반계는 볼수록 놀랍소.”

더는 나의 위대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허목이 말을 돌렸다.

나는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은가.

“대단하긴 하오.”

“내 제자요.”

“선생이 반계의 스승이지요.”

“허.”

내가 언제부터 유형원을 이렇게 칭찬하였을까 싶다.

그런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법이다.

폭우가 그치자 시작된 유형원의 활약은 정말로 눈부셨다.

아니, 정말 악랄했다.

유민을 일제히 총동원하여 모래 따위를 퍼 옮기고, 사방의 오물을 치우게 하는데 정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일을 강행했다. 불평불만을 들어주기는 하였으나 진짜 그냥 듣기만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자비함이었는데, 아예 사람을 굴리는 수준이었다.

진심으로 이대로만 간다면 나의 악명을 가볍게 덮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빨리 청계천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소.”

“반계만 참으로 고생이외다.”

“……오늘 우리의 대화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소이다.”

“그건 참으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소. 어쨌든 심폐소생술은 진심과 열의를 다하여 익히도록 하시오. 그저 외우기만 한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니까.”

“…….”

허목의 노여움이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졌으나, 그것으로는 나의 위대함을 감히 범접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볍게 넘겼다.

나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한 도발을 강행하면 최소 국지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허목이 먼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나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확인한 뒤 자세를 편하게 가졌다.

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는 덤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청계천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소인들이 왜 이렇게 피해를 봐야 하는 겁니까.”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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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보니 십수 명의 백성이 몰려온 상태였다.

대충 민원인들로 보였고, 허목이 자리를 잡고 대응을 하는 중이었다.

“선생께 불만은 없습니다. 저들과 말이라도 좀 해봐야겠습니다.”

“예. 그러니 소인들을 막지 마십시오.”

민원인들의 기세가 남달랐다.

민원 응대인이 허목이라는 걸 고려할 때 엄청난 강도였다.

“소인들이 틀린 말을 했습니까.”

“예.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뭡니까.”

“거지새끼들 때문에 사방이 난립니다. 평생 이런 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만 이런 줄 아십니까? 거지들이 도성에 들어온 뒤로 도둑이 늘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밤이면 밤마다 소란을 피우니 소인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음. 수위는 갈수록 엄청났다.

아니, 진짜 대단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경청하는 허목은 정말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급기야 언성이 올라갔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분위기는 급격히 험악해졌다.

“당장 오늘 먹을 게 없어도 조세를 냈습니다!”

“인정이라는 건 경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사정을 봐주신 적은 있습니까?”

“아니지요. 없지요. 늘 우리에게서 뺏어가기만 하셨습니다.”

투박한 말투였으나 내용은 투박하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허목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거지 새끼들은 뭡니까?”

“웃깁니다. 아니, 미치겠습니다. 내 새끼 먹일 쌀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쌀로 저 거지 새끼들을 먹이십니까?”

“우리는 병신들이라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까?”

“왜!”

온 힘을 다 쏟은 듯한 고함이었다.

“군말 없이 시키는 걸 다한 우리는 병신 새끼가 되고, 저 새끼들은 배불리 먹습니까?”

내용을 떠나서 이미 표현에서 선을 넘었다.

이건 곤란했다.

저들을 벌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장소가 아니다.

어느새 몰려온 유민과 오가는 백성까지 한둘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최소한 장소라도 옮기는 게 옳았다.

“하. 그런데 이제는 똥물입니까?”

“내 새끼 굶겨가며 바친 쌀로 저 새끼들이 처먹고 만든 똥물이라니요?”

“대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저 새끼들에게 욕이라도 퍼붓겠습니다.”

“다른 거 안 합니다. 그거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예. 욕이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소인들이 그 정도 자격도 없습니까.”

그러니까 개 같은 세상, 유민에게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건 우리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성난 백성을 강상죄 따위로 벌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방책이었다.

이는 지금껏 법도를 강조하였던 사안들과는 아예 결이 달랐다.

어째서……?

가장 평범한 백성의 항의가 오직 중대본 정책의 여파로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황이 펼쳐진 셈이었다.

남인 사족의 항의 방문, 폭우, 유형원의 변화, 성균관의 위정척사 그리고…… 백성의 항의.

며칠 새에 대형 이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불안함이 가득한 유민들이 보였다.

여기까지.

더는 곤란했다.

나서려고 할 때였다.

“백성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낭랑한 목소리.

얼마 전 남인 사족과 함께 항의 방문을 한 뒤로 내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졌던 박세당이었다.

그러나 청계천 역사에 손을 보태기에 더 지켜보기로 하였는데 이렇게 훅 치고 나왔다.

“본부장 대감. 혹시 소생이 저들과 대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다.

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문난적 박세당의 실력을 견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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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性理學).

이는 중국 남송 시절 주희가…… 됐다.

누가 만들었고 무슨 내용인지는 의미가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여태껏 사방에서 두들겨 맞으며 만악의 근원으로 전락하던 성리학의 위엄이었다.

“솔직히 나는 법도로써 엄히 다스렸을 것 같소. 허 국장은 어떠하오?”

“당위성을 역설했겠지요.”

말을 주고받는 나와 허목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는 바로 박세당이었다.

“자네들의 말에는 틀림이 없네. 나 역시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자네들이 더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리의 말씀을 들으니 속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진정하게. 자고로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설마 반전이 있는 겁니까.”

“진정하라고 했네.”

“아.”

“응?”

“예.”

박세당은 부드럽게 백성들을 제어하였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다.

“한데, 일은 발생하였네. 당장 저들을 내칠 수 없다는 건 자네들이 제일 잘 알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답답해서 그럽니다. 답답해서.”

“답답하고 불편하며 분할 것이네. 그러니 내가 자네들과 대화를 하는 걸세.”

“소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유민으로 인하여 발생한 치안의 문제는 한성부에 전하여 더 철저하게 단속해야겠지.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본부장 대감?”

갑자기 소환됐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물론일세. 내가 직접 업무 요청을 할 것이네.”

“자네들도 들었는가?”

“무, 물론입니다.”

“청계천의 범람은 늘 있는 일이지만, 오물로 인한 고통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를 되돌릴 수는 없네. 음. 본부장 대감. 이리하는 건 어떻습니까.”

“서둘러 말씀하시게.”

“청계천 준설을 미루고, 오물을 먼저 처리하면 백성의 불편함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합당한 의견이 아닐 수 없네.”

“자네들도 들었는가?”

“물론입니다. 나리.”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엄청난 전투력을 자랑하던 민원인들이 순한 양처럼 얌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마찰이나 갈등은 아예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만 존재하였을 뿐이었다.

속으로 크게 감탄할 때 박세당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들의 딱한 사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어려운 처지가 모든 걸 용인할 수 있는 건 아닐세. 청계천 역사에 동원되어 몸이 고되겠으나, 중대본의 방침을 최대한 따라주길 바라네.”

이는 유민을 향한 말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상황을 구경하던 그들은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박세당은 시선을 가볍게 옮기더니 또 나를 바라봤다.

“중대본이 유민을 위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성의 백성이 소외감을 느끼고, 불편하다고 여긴다면 어찌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겠으나, 규정을 확실히 세우고 방책을 준비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아.”

이보다 궁색할 수가 없다.

되돌아보면 중대본은 원주민의 불편함을 해결할 방책이나 규정을 아예 수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닥친 갈등을 잠재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인 폐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슬쩍 돌려서 먼 산을 보려는데, 허목은 이미 등산을 시작한 상태였다.

굉장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으니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본부장 대감께서 이리도 흔쾌히 동의하시니 도성의 백성은 시름에서 벗어나고, 유민은 더 조심할 것이니 어찌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방을 타격하는 박세당의 말에 일제히 먼 산을 바라봤다.

“그러니 자네들도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떠한가?”

“나리께서 그러시니 당연히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또 어려움이 있으면 소인들은 어찌해야 할지요.”

“음. 본부장 대감.”

“서둘러 말하게.”

“혹시 소생이 일대 백성을 만나며 소통하여도 되겠습니까.”

“내가 먼저 청하려고 하였네. 만일, 자네가 거절한다면 교지라도 받아올 생각이었어.”

“감사합니다. 그러니 자네들은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게.”

“아닐세. 그냥 이곳에 있게. 절차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허. 소생은 관복을 입고 있는데 어찌 보직을 임의로 하신다는 겁니까.”

“괜한 생각은 말게. 이는 주상께서 미리 하교하신 일이니까.”

진짜다.

이연은 누구라도 필요하면 데려가라고 했다.

내 말에 박세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상주할 테니 자네들은 언제라도 찾아오게.”

“정말입니까?”

“나와 함께 세상을 향한 불만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보도록 하지.”

참으로 대단했다.

어찌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세상은 이를 교감(交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시절 조선에서는 다른 용어로 불렀다.

바로 교화였다.

“교화의 정석이오.”

허목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야말로 정석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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