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03화 (103/298)

103화 르네상스

성리학(性理學).

이는 일찍이 남송의 주희가…… 됐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죽은 사람을 뭐하러 계속 언급하겠는가.

산 사람의 목소리가 지천을 울리고 있는데 말이다.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대단한 기세였다.

선창과 후창이 이어질 때마다 움찔하여 뒤로 물러날 뻔했다.

더욱이 도끼까지 더하였으니 그 날카로움을 감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솔직히 일이 이렇게 진행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작은 그저 쇠고기였다.

유민들에게 고기나 먹이고 싶었다.

정말 이 정도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성균관의 부정이 포착됐다.

이렇게 시작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일을 되새기는 것조차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사문난적을 결의하였으며, 위정척사가 태동하였고, 성리학 원리주의가 닻을 올렸다.

이 중 한 가지만 발생하였더라도 충격의 여파가 엄청났을 텐데, 며칠을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원리주의를 만난 위정척사가 도끼를 들고 핏대까지 세우며 외치고 있다.

참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대감.”

윤휴였다.

그의 표정도 정말 복잡해 보였다.

나도 이러한데 이 시절의 사대부는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음. 상황이 참으로 묘합니다.”

“그리 보이는가?”

“예. 종래 연좌와 상소는 군주께 청하거나 반대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지부상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여론전이니 말입니다.”

“한데, 작금의 지부상소는 성질이 다르지.”

“그렇습니다. 저들이 외치는 농우 정책의 폐지는 청이나 반대가 아니라 화답이니까요.”

윤휴의 말은 정확한 핵심이었다.

작금의 지부상소에 담긴 핵심은 바로 화답이라는 것이었다.

애초 사문난적 천명의 직접적인 계기는 성균관의 부정이었다.

이는 명백한 사유가 있는 것이기에 법도에 따라 벌하면 될 일이었다.

이 모든 흐름을 뒤틀어버린 것이 바로 이연의 사문난적 주창(主唱)이었다. 그때의 문답에서 나와 이연은 성균관이나 쇠고기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결과, 성균관은 죄를 청하여 현판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 농우 정책의 전면 폐지로 화답에 나선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러한 연좌는 없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선례가 되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 사대부의 상소와 연좌가 군왕의 결의에 대한 화답으로 이뤄지고 있으니 말일세.”

“하면,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말하면 입만 아프지 않겠는가?”

나는 피식 웃으면서 윤휴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백호. 우리의 후배들이 저토록 부르짖고 있네. 그러니 선배들도 무언가를 해야지. 안 그런가?”

“이런. 소생과는 생각이 다르군요.”

“어째서 다른가.”

“위정척사와 원리주의가 나섰습니다. 하면, 사문난적들도 무언가를 해야지요. 이토록 엄중한 사안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 사문난적의 정치적 공간이 너무 협소해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야말로 우문현답일세. 그렇지. 선배가 아니라 사문난적으로서 나서야지. 이거 내가 자네에게 크게 배웠네.”

“과찬이십니다. 대감.”

그랬다.

우리는 저들의 선배가 아니라,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다른 정파일 뿐이다.

그러하니 우리 사문난적의 수장을 알현할 때가 된 것이다.

바로 조선의 지존, 이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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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령탑을 만나러 왔는데 별말이 없다.

많이 어색했다.

그래서일까?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농우 정책을 폐지하여 주시옵소서!”

유독 지부상소의 외침이 크게 들렸다.

또 그래서 더 어색해졌다.

이럴 때는 내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어쩌겠는가?

나는 신하고, 이연은 왕인데.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하. 모든 것이 정도로 귀결되고 있사옵니다. 이는 모두 전하의 성은이옵니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탰다.

진심이었다.

단, 며칠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만일 이연이 사문난적을 주창(主唱)하지 않았다면 작금의 르네상스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부장.”

“예. 전하.”

“나는 신하의 공을 탐하는 어리석은 왕이 아니외다.”

“전하. 신은…….”

“그토록 많은 신하가 저리 나서고 있소. 어찌 홀로 독식할 수 있겠소.”

나 칭찬하는 거 아니었구나.

웃음기 하나 없이 정색하면서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다.

적당하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이연이 피식 웃었다.

퍽 기분이 나빴다.

물론, 나도 방긋 웃었다.

“경은 작금의 사태를 어찌 바라보시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지부상소가 그저 화답의 성격을 가졌다는 걸 물은 게 아니외다.”

역시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질문을 똑바로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사람 무안하게 말이야.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웃음기를 싹 지웠다.

지금부터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절대 가볍지 않기에.

“서인과 남인의 정책은 다르옵니다. 하오나 본질은 타고난 혈연에 기반하였사옵니다. 서인의 가문에서 태어나면 서인 스승을 만나고, 부모가 남인이면 남인의 정객이 되옵니다.”

선택권은 없다.

당색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러했다.

“하온데, 전하. 작금의 상황은 전혀 다르옵니다.”

“어찌하여 다르오?”

“성균관을 보시옵소서. 서인과 남인의 유생이 모두 위정척사를 부르짖고 있사옵니다.”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성균관이 쇠고기 반출이라는 부정으로 공고하게 단합하였기에 추악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의 반성은 동부의 오물을 직접 수거하는 실천과, 부정행위를 직접 고하는 농우 정책의 폐지로 귀결됐다.

성균관의 외침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존폐의 위기감은 들어 있지 않다.

이 과정과 결론이 명백하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위정척사라는 고매한 사상적 가치로 대동단결하였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인간의 무리 중 가장 위대한 것이 바로 사상과 정책으로 이뤄진 집단이 아니겠는가.

수백 년을 이어온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것이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박세당을 보시옵소서. 홀연히 원리주의를 말하고 있사옵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현대에서 흔히 언급한 유교 탈레반이 아니었다.

주자의 시체를 부여잡고 대성통곡하겠다는 선언도 아니었다.

그 옛날 이 땅을 열의로 가득 채웠던 성리학 본연의 가치를 찾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변화를 갈망하는 성리학의 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서인과 남인의 영수는 사문난적을 결의하였사옵니다.”

중대본은 이미 잔잔하게 사문난적의 길을 걸었으나 공식적으로 천명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이연의 주창에서만 비롯한 게 아니었다.

물꼬가 트이고, 장구한 흐름이 시작된 게 아니었다면 어찌 가능하였겠는가.

이미 지천에 씨앗이 흩뿌려져 양분을 흡수하기 시작한 게 아니었다면 이미 중대본은 몰락했어야 맞다.

그러나 작금의 결의를 보라.

이는 우리의 씨앗이 발아(發芽)를 시작하였다는 걸 의미했다.

하여, 말했다.

“이는 작금의 조선 성리학이 전인미답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걸 의미하옵니다.”

전인미답의 길.

이보다 우리의 길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겠는가.

“혈연과 지연의 붕당이 아니라 오로지 사상과 정책의 붕당을 이르시오?”

순전히 나의 느낌이었을까.

이연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하옵니다.”

“정녕 그러하오?”

“그러하옵니다.”

“일찍이 경은 붕당, 아니 탕평도 쉽지 않다고 하였소.”

“하온데, 이는 분명한 현실이옵니다.”

하나씩, 하나씩 쌓으며 태산을 만들어도 감격스럽다.

한데, 이토록 몰아치듯 단번에 대사(大事)가 이뤄졌으니 몰아치는 감격의 크기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나조차도 이토록 벅차오르는데 군왕인 이연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진실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전하. 농우 정책은 수백 년을 버텨온 법도이옵니다.”

농자천하지대본.

조선은 이 가치를 절대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변혁이 있을지라도 조선의 근간은 농업이다.

이는 태산과도 같은 원칙이며 현실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태산을 옮겨야 할 때가 있다.

이는 무척이나 고된 일이지만 해야 한다.

작금의 조선이 그러하다.

또 그리고 옮긴들 태산이 아닌 건 아니다.

그저 옮겨졌을 뿐이다.

작금의 농우 정책 폐지가 그러하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의 담론을 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어려운 현실을 뚫어내는 것이다.

절대 농업 정책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오나, 작금의 시대를 품지 못하는데 어찌 지킬 수만 있겠사옵니까.”

농우 정책의 폐지는 그저 소를 도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촌의 외부로 쇠고기를 유통하는 행위를 법제화하는 일이 아니다.

이토록 단순한 일이었다면 어찌 지부상소까지 발생하였겠는가.

현재 공식적으로 파악된 금액만 2만 5천 냥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또 이는 어디까지나 도성 내부의 일이었다.

조선은 한양도성 외에도 무려 8도가 있는 나라이지 않은가.

하여, 농우 정책의 폐지는 조선의 체질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나아가야 한다.

“전하. 바야흐로 농우 정책을 역사의 무덤으로 보낼 때가 되었사옵니다.”

여전히 침묵하며 경청하는 이연을 바라봤다.

200여 년의 역사를 책임지는 군왕의 단호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말했다.

“역사를 이어온 법도의 전면 폐지를 청하고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문난적의 길이 아니겠사옵니까. 전하.”

“하하하! 그렇소! 참으로 옳소. 이것이야말로 사문난적의 역할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하하하. 과연 그러하옵니다.”

이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농우 정책의 폐지를 윤허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침내 조선의 법도를 뜯어고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완성되었다.

오늘의 농우 정책 폐지는 그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가슴이 너무나도 벅차올랐다.

심장이 미치도록 벅차올랐다.

더는 감당할 수 없기에 다시 말하였다.

“전하.”

격해지는 감정을 다스렸다.

그러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여, 남김없이 꺼냈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200여 년이 걸렸사옵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래 걸렸소.”

이연의 화답에도 격한 떨림이 느껴졌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감축드리오. 진심으로.”

실로 첨예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던 사상전이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답게 귀결된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성리학의 르네상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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