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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04화 (104/298)

104화 원칙(1)

드디어 농우 정책의 폐지가 선언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게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실로 막대한 재원을 좌우할 일이기에 세밀하게 정책을 수립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초안으로 치열한 논쟁을 한 뒤 과감한 집행이 이어져야 하는 법이었다.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여, 현 상황을 정확하게 규정한다면 유예 기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중대본에는 막대한 재원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나의 잠재적 경쟁자를 확실하게 견제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그래서 나의 후원자를 만났다.

바로 변승업이었다.

“대감. 21개의 점포를 더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조선 제일의 부자라고 불리는 변승업도 대놓고 탐을 내는 규모라는 걸 의미했다.

“대감. 도성 48개 점포로 2만 5천 냥의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만일 8도의 요충지에 21개의 점포를 설치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최소 1만 냥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정말 쇠고기 유통은 이토록 엄청난 이권이 걸린 일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더 거대하군. 적절하게 분산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어.”

읊조리던 내 말을 들은 변승업의 얼굴에는 유독 긴장감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혹시라도 자신이 배제될까 우려한 것이다.

그동안 조정의 여러 일에 열심히 복무하였기에 여러모로 낙찰에 유리한 조건인데도 이토록 초조함을 보인다는 건, 실로 막대한 이권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감…….”

말을 끌면서 눈치를 살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보게. 변 역관.”

“예. 대감. 소인 변승업. 모든 힘을 귀에 집중하였습니다.”

“자네에게 다 내어줄 수는 없네.”

“아…….”

“그러니 나를 설득해 보겠나?”

잔뜩 실망하여 눈을 내리던 변승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니 생각해온 방책이 있는 게 분명했다.

“대감. 소인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네의 생각은 늘 경청하게 되더군.”

“쇠고기 전매권입니다. 소인이 아니라 어떤 상단이 가지더라도 조정은 큰 재원을 확보하겠지요.”

“물론일세. 그러니 여기저기서 난리가 아닌가.”

“예. 국고가 튼튼하다는 건 전면 개방을 늦추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런 똑똑한 사람을 보았나.

하마터면 끌어안을 뻔했다.

나는 자세를 슬쩍 낮추며 말했다.

“자네의 말은 너무 정확한 본질이라서 몸을 낮추게 하는군.”

“이런. 소인이 감히 그런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닐세. 하마터면 국고가 여유로워지는 우를 범할 뻔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나. 나는 지금부터 자네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길 것이니 서두르게.”

국고를 탕진한다는 건 조정의 세수 확보를 방해하거나 방만한 정책으로 고사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에 불과하다.

재정적 압박으로 손을 대지 못하였던 여러 정책, 특히 경신 대기근 방비에 꼭 필요한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게 골자였다.

그러니 조정의 국고에 쌀이 바닥을 보일지라도 쌀은 계속하여 국고에 들어와야 한다.

그것과 별개로 변승업의 재력이 지탱하던 정책에서 조정의 국고를 고사 직전으로 압박하여 결국, 국경의 전면 개방을 도출하는 게 궁극적 목표였고.

그런데 지금처럼 아예 변수로 등장하고 심지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책이 나온다면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여차하면 위생국 정책에서 변승업이 발을 뺐을 때 중대본이 버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방책은 정교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국고에 쌀을 수혈할 수 있는 내정개혁과 국고를 고사시킬 수 있는 외부의 압박이 절묘하게 이뤄져야 하니 말이다.

“아예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어떻습니까.”

“일을 크게 벌인다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실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으니 그간 엄두를 내지 못한 역사(役事)를 도모하면 될 일입니다. 이리한다면 인부는 품삯을 얻고, 조정은 골치를 해결하고, 국고는 그대로일 것이니 어찌 일석 삼조가 아니겠습니까.”

“고작 금과옥조라는 말이 자네의 의견을 담아낼 수는 없겠군.”

“위명이 자자하신 대감께서 그리 이르시니 소인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말은 참으로 달콤하며 건강하군.”

“과찬이십니다.”

“겸손이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일세.”

“오늘도 크게 배웁니다.”

“그래. 어디 더 내어보게. 이 정도 고민이라면 구체적인 역사도 가져왔을 것 같네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청계천 준설을 크게 일으키면 될 일입니다.”

이런!

조상님들이 괜히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을 만드신 게 아니었다.

진짜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원안을 추진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정말 우매한 짓을 하였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명사(名士)의 품격을 지켜야 하는 법이다.

“한데, 자네는 이익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천천히 대청 무역의 자양분으로 축적해야지요.”

그렇지.

바로 이거지.

이보다 듬직할 수가 없었다.

“전매권을 내어주지.”

“대감. 최고의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한데, 대감.”

“왜 그러나? 마무리가 깔끔했는데.”

변승업이 슬쩍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이대로 결정될 수 있겠습니까?”

“허. 자네 지금 나를 못 믿어서 이러나?”

어이가 없다.

내가 바로 송시열인데 이러고 있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헛웃음을 지으며 오만상을 찌푸리자 변승업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 소인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상이 워낙 뒤숭숭하니…….”

“됐네!”

그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자존심 상해서.

그리고 결심했다.

이건 무조건 해낸다고 말이다.

송시열의 자존심을 걸고.

“…….”

아.

내가 정말 송시열이 되어버렸구나.

그냥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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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먹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 문서가 복잡하게 흩어져 있었다.

사람이 걸어 다닐 수는 있으나,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높게 쌓인 문서와 부딪힐 수도 있었다. 만일 그리된다면 문서의 산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으나 문서의 주인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난국을 돌파하는 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일이었다.

“끙…….”

박세당은 앓는 소리를 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니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이가 보였다.

바로 집무실의 주인, 호조판서 허적이었다.

“대감.”

“…….”

“대감.”

“아…….”

그제야 허적은 고개를 들더니 엷게 웃었다.

피로함이 잔뜩 묻은 미소였다.

아니, 그저 묻어나는 웃음 없는 미소이기도 했다.

“서계. 자네 왔는가?”

“휴. 대감. 너무 고단해 보이십니다.”

“하하하. 나이 많다고 괄시하나? 참으로 서운하군.”

“소생이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대감의 건강이 염려되어 드린 말씀이지요.”

박세당은 낮게 한숨을 쉬며 집무실을 덮고 덮은 문서를 쳐다봤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실로 대단한 분량이었다.

문서에서 파생되는 묵향(墨香)은 숨을 쉬기 곤란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묵향이 참으로 좋지 않은가? 나는 그 어떤 향보다 묵향이 가장 좋다네.”

“휴. 대감께서는 여전하시군요. 그나저나 문서가 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중대본의 일까지 도맡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덕분에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네.”

박세당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리가 어려운 게 아니라, 집무실이 좁아질 정도로 문서가 많은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보다 더 잘 정리할 수는 없었다.

무례라는 걸 알았으나 절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소생은 죽을 때까지 대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 그런 말은 넣어두게. 어찌 선비가 그토록 작은 목표도 잡지 않으려고 하는가.”

“대감. 어찌 또 그러십니까. 소생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괜한 말이 아닐세. 보시게. 자네가 아니면 누가 이 혼탄한 시절에 성리학의 원리주의를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가 참으로 자랑스러워.”

“과찬이십니다.”

박세당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더 겸양을 부리면 그건 그대로 무례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는데 허적이 푸석한 얼굴을 연신 매만지면서 슬며시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대감. 소생을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으시군요.”

“이 사람. 그렇게 선을 그으니 서운하군.”

“송구합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대감께서 뜸을 들이시는 것 같아서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끌. 덕담도 할 겸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네.”

“상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허적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이리되자 박세당은 내심 긴장했다.

아니 크게 긴장했다.

아무리 원리주의를 주창하고, 농우 정책 폐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는 남인의 영수 허적이다.

감히 함부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조선의 거목 중 한 명이었다.

또 그래서 요청에 화답해야 했다.

박세당은 숨을 차분하게 고르며 예를 취하며 말했다.

“이르시지요. 대감.”

“농우 정책 폐지로 막대한 재원이 확보될 것이네.”

“그렇지요.”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소생이 중대본의 말석에 있긴 합니다만, 어찌 대감께서 소생에게 이를 상의하십니까. 소생, 참으로 버겁습니다.”

“틀렸네.”

“예?”

“다시 말해야겠군. 아니, 더 직설적으로 말하겠네. 자네의 위치에 대해서.”

너무나도 단호했다.

박세당은 내심 당황하여 눈을 껌뻑였다.

허적은 진중한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일세. 어찌 그리 가볍게 행동하는가.”

“대감.”

“하여, 자네는 나와 이를 논의할 자격이 충분해. 아니, 차고 넘친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러니 겸손은 거기까지 하게.”

감히 남인의 영수이자 대학자인 허적과 같은 선에 선다는 사실이 박세당은 곤혹스러웠으나,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또, 어쩌면 오늘 허적이 얻고자 한 건 논의의 상대가 아니라 새로운 정파의 수장일 수도 있었다.

박세당은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중하게 물었다.

“대감의 고견을 먼저 들어도 되겠습니까.”

“결심을 세웠나 보군.”

“부족하지만 나서보겠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박세당의 짧은 말은 정파의 수장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겠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단단한 결심을 들은 허적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금의 조선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비축(備蓄)에 있다고 생각하네.”

박세당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화답했다.

“소생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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