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원칙(2)
유민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된 일에 그늘을 찾아 잠시라도 쉬고 싶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종일 눈을 가늘게 뜨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누구 때문이었다.
“서두르게! 하루라도 빨리 오물을 치워야 청계천 준설을 시작할 수 있네!”
바로 유형원이었다.
처음 거주지 공사를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늘 웃으며 다독이던 사람이, 청계천 역사를 시작하더니 아예 변해버렸다.
독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강도가 높았기에 유민들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진짜 죽겠군.”
“난 이미 죽었어.”
“그러면 입만 산 건가?”
“입이라도 살아 있는 걸세.”
땀 범벅이 된 유민들은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눈치껏 대화를 나눴다.
“도성에서 살아가는 건 참으로 고되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지 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암. 우리끼리 있으니 말하는 걸세. 사실 고되긴 하더라도 괴롭히는 양반들이 없으니 마음은 편하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일세. 딱 그거 한 가지가 제일 중요한 것일세.”
유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고된 일에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도성의 백성들은 볼 때마다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며, 욕설을 내뱉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큰 탈 없이 버틴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은 위정자의 수탈이나 괴롭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감내해야 하지 않겠나?
지나가던 박세당이 불평을 쏘아내던 유민들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길지 않은 말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되돌아보면 괴로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건 수령을 위시한 위정자들의 괴롭힘이었다. 그러나 도성에 정착한 이래 그와 같은 고통을 겪어본 적은 없다.
물론 위정자들이 모두 살갑게 대하며 웃음을 나누는 건 아닐지라도, 최소한 마음을 괴롭히는 이는 없었다.
“이 사람들아. 임금님이 우리 편이시니 어느 관리가 우리를 괴롭히겠나.”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솔직히 나는 몸이 고되더라도 끼니가 되면 뭐라도 챙겨주고, 밤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관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삶이 훨씬 나아.”
“나도 그래. 비록 풀떼기에 불과할 수도 있고, 맨바닥에서 잠을 청할지라도 지금이 훨씬 좋아.”
“그런데 사람이 참 웃기지 않나? 처음에는 그렇게 목욕하는 게 싫었는데, 지금은 안 하면 견딜 수가 없어. 너무 개운하지 않은가.”
“큭. 그걸 말이라고 하나? 고단해서 귀찮더라도, 종일 오물을 치웠으니 몸에서 얼마나 악취가 심하겠나. 목욕을 안 하면 잘 수가 없어.”
“참으로 신기하지 않나? 게다가…… 모두 조용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유민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시선을 돌려 확인하지 않았으나 필시 유형원이 다가오고 있을 터였다.
이는 그야말로 최대 위기였다.
여차하면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혼쭐이 날 수도 있다.
유민들은 기겁하며 입을 싹 닫고 손을 더 빨리 움직였다.
하지만 그간 경험한 유형원은 실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곡하게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점차 긴장감은 고조됐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반계.”
“아. 오셨는가.”
누군가 등장하여 유형원의 발목을 잡았다.
유민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참으로 대단하군. 이런 일사불란이라니. 마치 정예병을 보는 것만 같아.”
“하하하. 어찌 이리도 얼굴에 금칠하시는 건가.”
“허. 이 사람. 금칠이라니. 그저 사실을 말한 걸세.”
“되었네. 일단 자리를 옮기세.”
천운이었다.
그가 유형원을 데려갔다.
유민들은 참으로 기뻤다.
누군지는 몰라도 선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도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전 갑자기 더워진 것 같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 괴이한 건 그 누군가가 사라지니 다시 괜찮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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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을 한잔 들이켠 윤휴는 빙그레 웃었다.
벗의 환한 미소가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이토록 밝은 모습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늘 경험할 것이기에 너무나도 마음이 좋았다.
“반계. 입이 귀에 걸리시겠네.”
“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좋은가?”
“암. 좋고말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일세.”
윤휴의 앞이라서 그럴까.
유형원은 터질 듯 차오르는 기쁨을 아끼지 않고 표출했다.
평소 유형원을 아는 이라면 깜짝 놀랄 정도였다.
“평생 염원하였던 대의가 눈앞으로 다가왔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 마음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네. 나 역시 한때나마 그러하였으니까.”
교지 반포 직전까지 이뤄졌던 호포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윤휴라는 사대부의 심장에 새겨진 필생의 과업이었으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벗의 쓰린 마음을 살피지 못하였다.
유형원은 웃음을 거두며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너무 들떠서 자네를 배려하지 못하였네. 사과하겠네.”
“허. 무슨 말을 그리하나? 되었네. 이미 나는 양잠업을 나의 대의로 삼았어.”
“뽕나무가 만발하는 조선을 기대하네.”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필시 그리될 것이니 기다리시라고.”
“암. 그래야지. 응당 그래야지.”
자연스레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윤휴는 가볍게 손을 움직이며 몸을 옮겼다.
적당하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간 호판 대감의 행보를 고려할 때 필시 비축을 주장하실 것이니 말일세. 자네도 알겠지만, 작금의 조선에서 비축을 중시하는 건 절대 틀린 방침이 아닐세.”
“자네 말대로 문제는 나의 대의가 비축을 요구하는 시대의 방침을 넘어설 수 있는가일세.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그러나 이번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는 도모할 수 없는 대의일세. 나의 인생만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에서 말일세.”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대의와 시대의 방침이라. 참으로 적절한 표현일세. 그러니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지. 다만, 다른 측면으로도 길을 열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인가.”
“호판 대감과의 논쟁은 어차피 피할 수 없겠지. 하면, 최대한 여론을 모아내는 게 좋지 않겠나?”
윤휴의 말을 잠시 고민하던 유형원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오랜 관직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인의 판세 분석이라는 건 쉽사리 따라잡을 수 없다. 하물며 가장 선두에서 치열하게 서인과 다퉈온 윤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유형원이 아무리 처세가 뛰어날지라도, 정계에서 수위로 꼽히는 논객인 윤휴의 연륜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박세당은 원리주의를 주창한 뒤 성균관 유생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네. 그는 이미 정치적 거물이 된 셈일세. 그러니 설득하여 한배를 타는 게 옳지 않겠나?”
“가능하겠나?”
“하하하. 물론일세. 나만 믿게.”
윤휴는 호탕하게 웃으며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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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당혹스러웠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됐을 줄은 몰랐다.
어색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호판 대감과 의기투합했다고?”
“예.”
“허.”
“음. 송구합니다. 하지만, 선생께서 한발 늦으셨습니다.”
“끙.”
이보다 난처하고 궁색할 수가 없었다.
허적이 박세당과 손을 잡겠다고 움직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는 박세당이 동의할 줄 몰랐다.
“험험. 혹시 번복은 어렵겠지?”
“음. 상대가 호판 대감이십니다. 그리고 잊으셨습니까? 그분은 우리 남인의 영수입니다. 한데, 번복이라니요?”
“하하하. 이 사람. 뭘 또 그렇게 정색까지 하면서 진지하게 말하나? 농이었네. 농. 누가 들으면 내가 진심이었다고 오해하겠군.”
“이런. 소생이 실언했군요.”
“한데, 어찌하여 호판 대감과 한배를 타셨나?”
“소생의 평소 뜻과 같았습니다.”
“오. 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음. 선생의 대의는 무엇이지요?”
먼저 패를 꺼내 보라는 의미였다.
손을 잡을 수 없다면 어떤 수를 준비하였는지라도 은근슬쩍 알아보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망신살만 뻗은 셈이었다.
윤휴는 입맛을 다시며 먼 산을 쳐다보며 마지막 남은 동아줄을 찾았다.
“혹시 위정척사파도 함께하기로 하였나?”
“제안하니 흔쾌히 승낙하더군요.”
“끙.”
시발점이 성균관이었기에 그들의 여론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도 한발 늦었다.
우군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윤휴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유형원에게 호언장담하였는데 꼴이 너무 우스워졌다.
“이거 의도치 않게 선생과 논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많이 배우겠습니다.”
박세당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윤휴는 응수하지 않고 한숨만 푹 쉬었다.
구도에서 너무 불리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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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를 끝낸 유민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터벅터벅 걸었다.
어깨, 팔목, 허리, 허벅지, 종아리…… 통증이 안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괜찮나?”
“괜찮을 리가 있겠나. 이대로 대충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네.”
“오늘처럼 고된 날은 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늘은 우리가 씻을 순번이지 않은가.”
“희한하지 않나? 목욕하러 가는 건 정말 싫은데,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편안하고, 씻고 나오면 그렇게 개운하니 말일세.”
“자네 어찌 그리도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나? 희한하군.”
터벅터벅 걸으며 가벼운 대화를 하던 중 오후에 스쳤던 선인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동일 인물인데, 무언가 달랐다.
처음 봤을 때는 묘할 정도로 더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예 그런 게 없었다.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가도 마찬가지였다.
유민들은 눈을 껌뻑이며 한 마디씩 꺼냈다.
“그렇지?”
“암. 아까는 우리가 고된 일을 하다 보니 그냥 착각한 걸세.”
“그렇겠지? 그래. 맞아. 어찌 사람이 지나가는데 더워지겠는가.”
“힘들어서 착각한 걸세. 힘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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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중단된 유민의 거주지 공사 현장을 살피던 유형원의 눈에,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윤휴가 보였다.
늘 자신감이 넘치던 벗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결과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유형원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생하셨네.”
“휴. 면목이 없네. 설마 호판 대감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
“하하하. 백호. 어찌 사람이 거기까지 내다볼 수 있겠는가. 정말 괜찮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민망한 듯 시선을 계속 돌리던 윤휴는 유형원의 여유로운 모습에 표정이 밝아졌다.
바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계. 방책이 있겠는가?”
“백호. 유민들이 목욕하는 건 알고 있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면, 보시게.”
유형원의 손을 따라갔으나 별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시 중단된 유민의 거주지 공사 현장이었다.
“백호. 그 많은 유민의 배설물은 어디로 갔을까?”
“뭐……?”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한데, 눈에 보이지 않네.”
“그거야…… 허.”
대꾸하던 윤휴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이를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설마……?”
“낮은 단계로 시도를 해보았네. 그리고 성과를 보았어.”
“아니, 이 사람. 반계! 어찌하여 여태껏 말하지 않았는가?”
“하하하. 설마 일부러 그리하였겠는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함구한 것일세. 나 역시 조금 전에 확인하였고.”
“하하하! 이런 사람을 보았나. 그렇지. 그래. 이리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환하게 웃으며 격하게 축하하는 벗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유형원은 마음을 다해 미소 지으며 석양으로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백호.”
“말씀하시게.”
“저 석양 말이네.”
윤휴도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늘 보던 광경이었으나 오늘따라 느낌이 달랐다.
그저 아름다웠다.
“꼭 남기도록 하세.”
“만대에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