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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06화 (106/298)

106화 원칙(3)

변승업은 죽을 맛이었다.

잔뜩 긴장하여 눈알을 굴렸다.

“괜한 수를 쓰려고 머리를 쓰면 서로 불편한 일이 생길 것이네.”

“무, 물론입니다. 대감.”

고관대작과의 만남은 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대사헌 송준길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가장 어려운 사대부였기에 그러하다.

심지어 부름도 아니고 직접 찾아온 것이기에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하게.”

“대감. 소인의 처지도 고려해주십시오.”

“말하게.”

“그것이…….”

우물쭈물하는 변승업을 바라보는 송준길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평소 송시열을 책망하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엄이었다.

“내일 동이 트기 전 자네의 상단을 조선에서 지워버릴 수 있네.”

“대, 대감.”

“나는 우암과 다르네.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것이야.”

송준길과 송시열은 아예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껏 경험한 송시열은 탄력적으로 사고하며 타협하고 움직였지만, 송준길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명실상부 군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원칙을 앞세우면 아무도 못 막는다.

변승업은 진땀을 흘리며 쥐어짜듯 말했다.

“청계천 역사입니다.”

“의외군.”

“예?”

“뭔가 기상천외한 방책을 꾸려서 호판을 설득할 줄 알았건만, 이런 고리타분함이라니.”

혀까지 차면서 말하는 송준길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적당하게 위세를 가진 양반도 피해야 하는데, 무려 송준길이 면전에서 이러니 온몸이 얼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변승업은 자세를 더 낮췄다.

눈치를 살필 상황도 아니었다.

“적당히 하게.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어찌하는 줄 알겠네.”

“소, 송구합니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큰 일이군. 청계천 역사로는 호판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한데, 우암 대감은 자신감을 보였는데, 대감께서는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송구합니다.”

“아니, 청계천 역사를 확대하는 게 중요하냐는 말일세.”

“아.”

“당장 그걸 하지 않으면 죽는 이라도 있나?”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했다.

이미 임시방편으로라도 준설이 집행된 청계천이다.

그러한데 더 확대한다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재해가 수시로 발생하는 시절이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청계천 역사를 확대하는 건 전매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터.”

“…….”

“변 역관. 내가 우암이 아니라 자네를 직접 만나러 온 이유를 알고 있나?”

“그렇지 않아도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르시면 언제라도 달려갔을 겁니다.”

“국경 개방의 초안은 우암이 수립하였겠지. 그러나 이 일의 실제적인 실무자는 자네라고 생각하네만.”

“예……?”

“내가 말을 어렵게 했군. 이번을 기점으로 국경 개방을 도모할 생각인가?”

감정이라고는 들어가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변승업은 온몸이 땀에 절여지는 것만 같았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마른침이 따가울 정도였다.

머릿속이 창백하여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찰나, 스치는 것이 있었다.

지금 작은 거짓이라도 꺼낸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위치였고, 힘을 가졌으니까.

“그렇습니다. 대감.”

“보류하게.”

“예……?”

“우암과 합의를 보았나?”

“……구체적으로 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더 한 뒤 곧장 전할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자네를 핍박하고자 하였다면 우암을 바로 찾아갔을 것이네.”

맞는 말이다.

굳이 여기까지 직접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면, 송준길도 ‘우리’일 수가 있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여 움츠려있던 변승업의 눈이 커졌다.

어두웠던 표정을 싹 갈아치우며 재빨리 말했다.

“대감의 고견을 일러주신다면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심장에 새기겠습니다.”

“허……. 자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이런 태세 전환이라니.”

“소인은 늘 대감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태세 전환이라고 하십니까.”

정말 기가 막힌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송준길도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변 역관.”

“예. 대감.”

“청계천 역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뭐라도 이뤄지긴 할 것이네.”

“예?”

“그리만 알게.”

“아.”

“허. 자네,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송준길은 송시열과는 달리 관료로서 능력도 탁월했다.

관리로서 두 사람의 큰 차이는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지고한 학문적 성취를 앞세워 조정을 압박하는 게 송시열의 오랜 방식이었다면 송준길은 실무를 보는 하급 관리의 여론부터 중시했다. 하여, 고요하게 백관의 입에서 회자하게 하여 기어이 정책을 도출해냈다.

이 과정에서 마지막 순간 송시열이 늘 소란을 일으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기에 대외적으로는 덜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하겠다고 하였으니 의심은 불필요한 행위였다.

“그러니 준비한 일은 조금 더 미루지. 아직은 때가 아닐세.”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혹시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직은 불가능하니까. 더는 묻지 말게. 그저 이렇게만 알아두게.”

“예, 예. 대감.”

송준길의 단호한 답변에 변승업은 감히 더 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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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아주 맑고 밝았다.

특히 허적의 얼굴은 정말 압권이었다.

기쁨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의 곳간 지기로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이 집행되는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너무 미안했다.

나는 쇠고기 전매권으로 창출되는 재원을 몽땅 사용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이기에 허적이 기쁨을 만끽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주고자 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이가 나처럼 측은지심으로 무장한 건 아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유형원이 바로 그러했다.

“본부장 대감. 쇠고기 전매권의 수익을 집행할 정책을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유형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돈을 쓸 방책을 가져왔다.

일단 허적을 넘어야 하니 유형원에게 살짝 힘을 실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굳이 나를 걸고넘어졌다는 것이다.

보나 마나 허적은 나를 매섭게 노려볼 것이다……가 아니었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허적의 안색이 지옥의 야차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무섭게 굳어야 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여유로운 웃음까지 보였다.

이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계. 정책이라고 하였나?”

“대감. 막대한 재원입니다. 그간 국고의 어려움으로 미뤄뒀던 일을 집행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반계. 그건 틀렸네.”

“어찌하여 틀렸습니까.”

“중대본이 도모하는 여러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비축(備蓄)일세. 냉정하게 판단할 때 작금의 조선에서 중대본이 꼭 관철해야 할 정책은 존재하지 않네. 물론, 사안마다 모두 이유가 있고 필요하기에 때가 되면 집행하는 게 옳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닐세. 굳이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펼쳐서 국고를 낭비할 필요는 없네.”

“대감의 말씀대로입니다. 중대본이 가장 중시해야 하는 건 비축이 옳습니다. 또한, 필요하지 않은 일을 펼쳐서 국고를 낭비할 이유는 없지요. 비축이 옳습니다.”

박세당이었다.

원리주의를 주창한 이후 박세당은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중대본에 결합하였으나 특별한 역할은 없었기에 낮에는 전처럼 고충 처리반을 운영하였고, 밤이면 사족을 만나서 열띤 토론을 펼쳤다.

오늘처럼 중대본 회의도 와야 했고.

그런데 뭔가 묘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박세당이 참전하자 허적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물러서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서야 알았다.

두 사람이 사전에 손을 잡았다는 걸.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쩌면 상황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다.

“기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데 무리하여 일을 펼치는 건 구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축이 옳습니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만, 비축만을 중시하는 건 너무나도 수동적인 태도일세. 가뭄의 대비책으로 저수지와 보를 축조하지 않고 쌀을 비축하여 구휼이나 준비하겠다는 발상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람의 힘으로 재해의 발생을 어찌할 수는 없으나, 피해를 줄이는 건 가능하네.”

“그건 평시지요. 작금의 시대는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이럴 때는 비축이 옳습니다.”

“나 역시 서계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네.”

어……?

유형원이 다소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유형원이 승기를 잡는 게 좋았다.

그때 적절하게 참전하여 청계천 역사를 관철할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더는 곤란했다.

이제 참전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반계의 의견에 동의하오.”

송준길이 참전했다.

나는 봤다.

허적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말이다.

이는 송준길이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라는 걸 의미했다.

“대사헌께서 재원에 관심이 많은지는 몰랐소.”

“하하하. 내가 재원에 왜 관심을 두겠소이까. 그저 대사헌으로서 역할을 다할 뿐이지요.”

“대사헌의 역할이라고 하셨소?”

“부족한 게 많으나 명색이 사헌부의 수장이 아니겠소이까.”

“그래서요?”

유형원과 박세당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두 거물의 대화에 쉽사리 개입할 수 없기에, 둘은 한발 물러서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중대본 논의는 허적과 송준길의 대화로 재편됐다.

눈여겨볼 부분이 있는데, 송준길은 빙그레 웃고 있으나 허적은 다소 굳은 안색이라는 것이었다.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신 직후 대간의 여론을 살폈소.”

“…….”

“일제히 기근을 대비할 수 있는 방책의 수립과 집행을 원하였소.”

“…….”

딱딱하게 굳은 허적의 안색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대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과 학자로서의 권위.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송준길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사인지 알게 됐다.

되돌아보면 과거 호포제 집행 전후로도 송준길의 놀라운 수완을 경험한 바 있다.

물론, 헛발질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평소 잔소리만 하며 괴롭혀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대간이 어찌하여 재원의 일에 관여하오?”

“내가 실언을 했군요. 재원의 일에 관여하는 게 아니외다. 주상 전하의 교지에 감읍하여 길을 열어보고자 대간의 역할을 하는 것이오.”

“…….”

“이를 살피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겠소?”

압박은 거세졌다.

아무리 호조와 중대본에서 비축을 결정하더라도 대간이 움직이면 재논의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송준길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대감.”

박세당이 개입했다.

송준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서계.”

“예.”

“나는 성균관이 대오각성하였으나 범죄 행위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네.”

“…….”

오늘 박세당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는 성균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준길은 여차하면 성균관 유생을 감찰하겠다는 엄포를 대놓고 한 것이다.

이리되면 박세당의 운신 폭은 급격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뒤늦게 등판한 송준길이 모든 걸 정리하고 있었다.

너무 멋있었다.

“……대사헌의 요구는 무엇이오?”

“요구가 아니라 여론이외다.”

“그 여론이 무엇인지 물었소.”

송준길은 엷게 웃으면서 내가 아니라 유형원을 바라봤다.

느낌 딱 왔다.

여기도 손을 잡았다는 걸.

나만 빼고 다 잘 지내는구나.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자네가 나서겠나?”

자연스레 공을 넘겼다.

그런데

“소생에게 전권을 주신다면 도성을 인분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유형원의 한마디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뭐……?”

강경하게 비축을 주장한 허적도.

“예……?”

유형원의 허를 찔렀던 박세당도.

“허…….”

제안한 송준길도.

말문을 닫고야 말았다.

우리는 일제히 그의 입만 쳐다봤다.

“허언이 아닙니다. 소생은 이미 동부 지역에서 작은 성과를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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