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태조 이래 최대 개혁
가끔, 아니 자주 느낀다.
원 역사의 유형원이 얼마나 원통하였을지 말이다.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이간질을 잘하고, 철저한 인맥 관리에서 비롯한 갈라치기식 정치력도 생각 이상이었다.
이건 진짜 당해본 사람만 안다.
죽이고 싶을 정도다.
또한, 청계천 준설로 입증된 실무 능력도 상당했다.
현실 정치에 오랜 몸담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쉽사리 믿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유형원을 보고 있노라면 원 역사에서는 대체 왜 자발적 낙향을 하여 세상과 등지고 살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나대는 성격이 아닌데 말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고향에서는 얼마나 나대고 다녔을까 싶기도 하다.
필시 여기저기 다 간섭하며 지적질하고 다녔을 것이다.
진짜 내 손모가지 걸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유형원의 개똥 같은 성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인과 남인의 거목들이 모두 인정하는 그의 능력이 진짜 핵심이었다.
물론, 학문적 성취로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유형원의 진가는 성리학적 성취가 아니라 성리학을 현실에 구현하는 경세가로서의 능력이었다.
주자의 경전을 덜 알거나 해석이 부족할 수는 있으나, 그 대신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심지어 분석으로 나오는 원인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해결책도 파격적이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면서 현실에서 줄타기도 하고 있으니, 탁상공론이나 일삼으며 이상을 그리는 이가 아니었다.
나대는 성격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평생 재야에 은둔하여 살았으니 얼마나 답답하였겠는가.
전국을 대상으로 미친 듯이 나대야 하는데 좁은 부안현에서 적당히 나댔을 것이니 얼마나 심심했겠는가.
혹시 그러니 책이라도 쓴 게 아닐까?
그래. 그래서 책이나 쓴 거다.
혼자 구시렁거리면서.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이랬다.
오늘은 심지어 유형원이 도성을 인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책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대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일, 사대부와 백성이 배설물을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자원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원이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국운과 영토를 넘어 무한하게 확보할 수 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지요.”
이래서 천재일까?
미쳐서 천재일까?
아니, 왜 배설물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대체 뭘 먹고 다니면 배설물을 보고 이익 창출과 자원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일찍이 인분으로 거름을 만든 사례는 많습니다. 옛 선인들이 여러 서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현재 민가에서도 사용하고 있지요.”
잠시 설마 인분으로 거름을 만들자는 걸까?
당장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으나, 섣부른 행동은 개망신의 위험이 있기에 일단 기다렸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자원으로서 가치를 입증하거나 사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사용할 뿐이지요. 또한, 우리 중대본이 중점으로 집행하는 위생의 척도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반계. 우선 핵심을 먼저 언급하겠나?”
“물론입니다. 소생은 뒷간 자체를 퇴비의 공간으로 만들 방책을 수립하였습니다.”
“뭐……?”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화장실에서 거름을 바로 만들어낸다는 말이었다.
조선의 화장실이라고 하면 노상 배변을 제외하면 구덩이를 활용한 사례가 전부였다. 이런 환경에서 위생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구덩이를 안전하게 비우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구덩이를 비운다 한들 기존의 배설물은 어찌 처리하겠는가.
특히, 인력을 새롭게 확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위생이 중요한 정책이긴 하지만, 조선의 국운과 직결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구덩이를 비운다는 발상은 고려 대상이 아예 아니었다.
게다가 이 역시 인분으로 거름을 만드는 건 마찬가지이긴 한데, 일단 더 들어보는 게 옳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흥미를 잔뜩 보였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배설물을 모아낼 용기 혹은 구덩이는 통풍이 잘되어야 합니다. 이후 나뭇잎, 톱밥, 재와 같은 부산물들을 배설물에 주기적으로 뒤섞어 줘야 합니다. 소생이 여러 확인을 거친 결과, 4개월이면 각종 벌레 따위도 사멸할 것입니다.”
유형원은 준비한 말을 쉬지 않고 꺼냈다.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이 시절 조선의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말문이 막힌다는 건 바로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 방책을 쓰면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여 농업을 진흥하며, 위생에도 걸맞으니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사례가 있다고 하였네.”
“동부 지역에서 유민 거주지 공사를 진행할 때 시범적으로 이를 해보았습니다. 배설을 모아낼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각종 부산물을 넣어 주기적으로 뒤섞고 있습니다. 소생이 수시로 확인하였고, 눈에 띄게 벌레 따위가 사멸되었습니다.”
“한데, 4개월의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 않은가.”
“4개월이라는 시간은 소생이 오래전에 홀로 확인한 시간입니다.”
실험과 도전 정신이야말로 천재의 미덕이 아닐까.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감. 이리한다면 백성은 제 뒷간의 인분으로 퇴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효과가 크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우매한 이가 노상 배변을 하겠습니까.”
“…….”
“작금의 조선이 취해야 할 첫 번째 집행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껏 유형원이 다양한 행보를 거쳐왔지만, 이번보다 더 나를 충격에 휩싸이게 한 적은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유형원이 회귀(回歸)한 줄 알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회귀자는 아닐 것이니 다시 생각해 보자면, 유형원은 애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원 역사에서는 도성을 견디지 못하고 낙향한 것이다.
이번 안건은 파격이 아니라 그냥 이 시절 조선의 상식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당혹감과 의아함이 미친 듯이 증폭하는 중대본의 분위기를 보면, 이 시절의 지식과 지성이 만나지 못한 영역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온기가 담겨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온기가 담긴 말은 거대한 희망의 구름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이다.
또한, 말 많고 탈 많은 조선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이들로 구성된 중대본이다.
사실 오늘 퇴비형 화장실이 안건에 상정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 송준길이 대간의 여론을 운운하며 허적을 압박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아니라면 유형원에게 공이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릇, 조정의 운영은 정책의 파격과 효율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담론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낼 수 있다.
즉, 유형원의 제안이 아무리 탁월할지라도 ‘비축’의 원칙을 덮을 수는 없었다.
또한, 국고를 탕진하여 무역 개방을 일궈낸다는 나의 방책은 기근을 대비한 ‘비축’의 장벽을 넘어서기 어렵다. 아니, 이런 우회 정책은 공식적으로 언급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나는 현대를 경험하였기에, 퇴비형 화장실이 얼마나 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알았기에 그러했다.
“소생은 평생 바랐습니다. 볼품이 없을지라도 이는 소생의 대의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고작 화장실을 뜯어고치는 게 무슨 대의냐고 할 수도 있다.
맞다. 이는 대의가 아니다.
고작 대의라는 말로 담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여, 말했다.
“대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네.”
“대감.”
“이는 진실로 태조 이래 최대 개혁일세.”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꺼냈다.
“만일 이를 해낼 수만 있다면 조선은 천하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네.”
유형원이 멈칫했다.
표정이 참으로 묘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본래 나는 오늘 청계천의 준설을 발의하고자 하였소.”
“본부장.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말 그대로요. 100만 혹은 10만 혹은 1만의 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대역사 말이외다.”
“허.”
청계천의 전면적 준설과는 아예 대척점인 비축을 주장한 허적은 그냥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피식 웃었다.
그랬다.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고의 탕진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거나 민심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정책만 아니라면 뭐라도 상관없었다. 때마침 청계천에 문제가 있으니 전면적 준설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했다.
솔직하게.
“참으로 가벼운 고민이었다는 걸 오늘의 논의를 보면서 깨달았소.”
“…….”
“기근을 염두에 둔 비축의 원칙과 위생과 농업의 진흥을 동시에 꾀할 수 있는 반계의 제안을 들으니 참으로 부끄럽소.”
“…….”
냉정하게 되돌아본다.
내가 그동안 직접적으로 한 일은 많지 않았다.
아니, 정책적으로 접근한다면 사실상 없다.
그러나 나의 행보는 이 시절과는 다소 괴리된 것이 많았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하나씩, 하나씩 단계를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작금의 조선이 품은 위생과 재해 대책은 이미 원 역사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원 역사와 다름의 효과는 조금씩 입증되고 있다.
남은 건 오직 시간이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위생을 입안하고 위생국 설립을 청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또, 곧장 중대본 수립을 추진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잘은 몰라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니, 모를 게 어디 있을까……. 거센 저항에 봉착했을 게 뻔하지 않을까?
실무적으로도 그렇다.
만일, 변승업을 만나지 못했다면 위생국 수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돈이 없는데 그 막대한 비용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의 조정이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그래서였다.
그래서 원 역사였다면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한 걸음씩 움직인 발걸음과 걸었던 길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광야에 서야 한다.
나의 오판이 이 나라 조선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국경의 전면 개방을 꾀하더라도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설령, 성사되더라도 쌀을 확보하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니, 경신 대기근 이전에 무역의 효과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여, 말했다.
“비축하지요.”
비축의 원칙을 버릴 수가 없다.
이는 기본이었다.
또 말했다.
“반계의 제안도 수용하지요.”
위생의 집행도 포기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길이다.
“모두 옳지 않소이까.”
허적을 바라봤다.
“어떻소?”
유형원을 바라봤다.
“어떤가?”
희미한 긴장감을 담은 침묵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긴장감이 커질수록 불편함을 동반한 침묵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나의 손을 떠났다.
그런데
“이왕 그리한다면, 성균관 운영에도 보태는 건 어떻습니까.”
옅은 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박세당이었다.
“성균관도 운영은 해야지요. 대감.”
침묵은 사라졌고
“소생이 위정척사파의 이권도 대변해야 할 처지인지라 어쩔 수 없습니다.”
잔잔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
모두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허적이 말했다.
“그리하지요.”
“동의합니다.”
유형원도 화답했다.
하여, 나도 말했다.
“주상께 고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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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조 이래 최대 개혁이 분명한 유형원의 담대한 제안(提案)을 고하러 왔다.
조선의 최종 의사결정권자에게 말이다.
“…….”
“…….”
이연의 장고(長考)는 이어졌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가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일국(一國)의 통치자로서 매사 신중하게 결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때로는 결정하여 집행한 사안의 파급이 감당하기 어렵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을 유발한다면 과감하게 번복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집행 이후 번복이라는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게 사실상 불가하다면 장고의 시간은 길어지는 게 옳다.
“늘 궁금한 게 있소.”
“이르시옵소서. 전하.”
“종래 조선은 늘 고민과 걱정이 많았소. 그리하여 빠른 결정과 집행이 어려웠소. 한데, 중대본은 예외였소.”
“의외로 간단하옵니다.”
“무엇이오?”
“중대본은 복잡한 정략이 끼어들 틈이 없사옵니다.”
말 그대로 복잡한 정치 공학이 끼어들 틈이 없는 환경이었다.
중대본은 원 역사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의기투합한 곳이다. 정치 공학은 불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대본 수립 전후로 진통이 없었던 건 아니었사옵니다. 하오나, 현재 중대본에서 당색을 앞세우는 이는 없사옵니다. 그러하니 어찌 정략이 들어갈 수 있겠사옵니까.”
만일 누군가가 기어이 당색을 앞세운다면 스스로가 얼마나 졸렬한지 자인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나의 존재였다.
그동안 송시열로 살아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원래도 알았으나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천일제염업의 원리도 모르며, 비누의 제조과정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만들지 못할지라도 보고 들은 게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겪은 기억과 경험은 이 시절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금은보화였다.
어찌하여……?
나는 이 시절 누군가의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를, 사대부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유형원의 담대한 제안은 그저 허무맹랑한 말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중대본의 인사들이 달라졌다 하나 그들은 여전히 ‘조선인’이지 않은가.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즉, 유형원의 제안을 들은 내가 미치도록 흥분하였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해볼 만한 일로 다가갔을 것이다.
이건 내가 잘났다거나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하여, 중대본의 역사는 짧았으나 여기까지 걸어온 신들의 신뢰는 ‘반대’라는 의사 행위를 ‘반대’할 정도는 되었사옵니다.”
“하여, 여기까지 성큼 올 수 있었구려.”
“하오나 전하. 이는 어디까지나 신하의 영역이옵니다. 군주의 고민과 판단 그리고 결정의 강도가 일개 신하와는 다를 수밖에 없사옵니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경신 대기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나 이연은 아니었다.
그는 백성만이 아니라 관리도 신경 써야 하며, 재해만이 아니라 국방과 외교도 바라봐야 하며, 오늘이 아니라 내일도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고민의 무게가 나와는 아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신들은 결정과 집행을 감행하면 되오나 전하께옵서는 장고를 거듭하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어찌 무게가 같을 수 있겠사옵니까.”
“…….”
이연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장고는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이러한 기다림에 익숙하였다.
이연이 판단을 내릴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내게 또 다른 상념의 공간을 허락했다.
입궐하는 나를 붙잡은 유형원의 간곡함이 가득한 말이었다.
-대감.
어쩌면 간곡함을 넘어 간절하게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 같았다.
-소생은 이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겠습니다.
나는 특별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때로는 백 마디, 천 마디, 만 마디의 말보다 묵직한 끄덕거림이 신뢰를 주는 법이다.
그리고 상념을 지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만 묻겠소.”
어느새 기나긴 장고는 끝이 났다.
하나‘만’이라고 했다.
무엇일까?
이 복잡하고 담대한 제안이 품고 있는 여러 역학 관계 중 무엇을 가장 중요시할까.
묘하게도 결과를 떠나서 지금은 이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이연의 한 가지는 너무나도 뜻밖의 것이었다.
“가능한 일이오?”
바로 가능성.
순간적으로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가능성을 타진하지 않았으니까.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지 않았다.
해내야 한다는 걸 바라봤을 뿐이었다.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성을 축조해야 한다면 축조할 수 있소. 대군을 양병해야 한다면 그리할 수도 있소. 어찌하여? 비록 힘에 버거워 중도에 그만두더라도 탈이 없기 때문이외다. 어째서? 성의 축조를 반대하는 신하는 국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고 버겁다 판단하고 나선 것이기에 그러하오. 힘을 써 강행하다가 멈추더라도 탓하는 이는 없소. 그저 부족함이 아쉬울 뿐이외다. 누구도 소요한 시간과 재원을 거론하지 않소. 이는 결국, 합의의 영역이기 때문이외다. 한데, 오늘의 일은 다르오.”
“…….”
“과연 합의가 이뤄질지도 의문이오. 이러한 일은 중도에 멈춘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소. 어쩌면 중대본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될지도 모르오. 하여, 묻소. 이는 가능한 일이오?”
“전하.”
이연과 눈을 마주쳤다.
“이는 기어이 해내야 할 일이옵니다.”
해내야 한다.
기어이 해내야 한다.
“가능성을 넘어 기어이 해내야 한다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나는 본부장과 중대본의 결심을 묻는 게 아니오.”
“전하.”
“경과 중대본이 내게 일렀소.”
이연은 내가 올린 상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는 그야말로 태조 이래 최대의 개혁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이는 태조 이래 최대의 개혁이 맞사옵니다.”
태조 이래 최대의 개혁.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토지 개혁이나 신분 해방처럼 거대한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정치적 의미로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유형원의 담대한 제안을 태조 이래 최대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이는 조선을 아예 다른 나라로 만들어 낼 역사에 없었던 방책이기에.
“감히 태조 이래 최대 개혁이라고 말하였다면 꼭 성공해야 하오. 하여, 가능성을 물었소. 해내겠다가 아니라 해낼 수 있는 근거 말이외다. 한데, 여전히 결심만을 말하오?”
“전하. 온 힘으로 해낸다면 조선은 천하에서 가장 청결한 나라가 될 것이옵니다.”
청결한 나라?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고작 이 정도 표현으로는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설물을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자원으로 귀결해낼 방법이다.
아니, 고작 배설물을 거름으로 만들어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여, 이는 혁명이다.
이제 이연의 물음에 답해야 할 때다.
가능성(可能性).
단 한 번도 타진하지 않았던 가능성에 대해서.
그런데
“가능성은 10할이오. 그러니 해내시오.”
이연의 말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이는 목숨을 걸어야 할 어명이오.”
이미 타진해야 할 가능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성사(成事)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신 중앙 재해대책본부 본부장 송시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어이 성사하겠사옵니다.”
“윤허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