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또 다른 희망(3)
개성부 동북쪽 4리 화원(花園) 북쪽에는 숭양서원이 있다.
과거 고려의 신하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옛집이었다.
일찍이 개성부에 서원을 세우면서 사당을 함께 세워 그를 제사하고 서경덕을 배향하니, 왕명으로 편액과 경적을 하사하였다.
평소 사대부의 발길만 허락하였던 숭양서원은 오늘따라 유독 많은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모두 갓을 쓰고, 말끔한 복색을 하였는데 한눈에 보더라도 개성의 사족(士族)이었다.
그중 눈이 찢어진 사족이 낮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준비는 이만하면 되었어.”
그러자 풍채가 좋은 사족이 냉큼 물었다.
“음. 어찌하여 일부만 꺼내왔는가?”
“우선 벼 300두 정도일세.”
“300두라. 하면, 굶주린 백성 70명 정도를 구제할 수 있겠군. 일단 오늘은 이리하나?”
“이 사람아. 당장은 그리할 수가 없네. 사람 한 명마다 1두씩 나눠야 하네.”
“허. 그리하면 부족하지 않겠나?”
“마음 같아서는 잔뜩 나눠주고 싶으나, 기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
“그러니 비축을 염두에 두고 구휼해야 하네.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허기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니,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
찢어진 눈 사족의 말이 타당하였기에 풍채 사족은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찢어진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걸 느낀 나머지 사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물론 곳간에는 쌀이 더 있네. 하지만 절대 임의로 사용하지는 말게.”
“알겠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네. 우리가 구휼에 실패하면 개성부 백성들은 모두 굶어 죽어.”
“물론일세.”
찢어진 눈은 참으로 매서웠기에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높은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서원의 외부에서 소란이 들렸다.
필시 굶주린 백성이 다가오는 것일 터, 사족들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모두 웃으시게!”
“물론일세!”
“나처럼 웃어야 하네!”
“자네는 될 수 있으면 뒤로 물러나 있게.”
“그렇지. 찢어진 눈에 백성들이 두려움을 느끼면 곤란하니 말일세.”
“…….”
사족들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농을 주고받았다.
그새 백성들이 모습을 보였다.
“…….”
“…….”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백성들도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사족들도 쭈뼛거리며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
“…….”
참으로 괴이한 대치였다.
정적(靜寂)과 정적(靜寂)이 만나 이뤄낸 대정적(大靜寂)이었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
“휴.”
눈 찢어진 사족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 정적이 깨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일을 해봤어야지. 자네들은 안 그런가?”
“뭐…… 음.”
“사대부로서 백성을 이토록 어색하게 여기다니. 그러고 보니 우리야말로 입만 산 서생들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하하하! 자네 말이 참으로 지당하군.”
사족들이 맑게 웃으면서 호탕하게 웃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자연스레 백성들에게 말을 건넸다.
“차례로 줄을 서시게.”
“한 명씩 천천히.”
“넉넉하지는 않으나 모든 이에게 쌀을 내어줄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말고.”
사족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함박웃음으로 화답하였다.
이는 훈풍이었다.
하늘 아래 이보다 더 따스한 바람이 어디 있을까.
오늘 개경부의 바람이 바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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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과 고작 166리의 거리가 있는 개경에서 그냥 재해도 아니고 역병이 창궐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는 실로 엄중한 비상시국이었기에 누구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동원하여야 할 시간이었다.
“허 국장. 약재는 어떻소이까.”
“그간 비축해뒀기에 넉넉하오.”
약재는 충분하다.
파견할 의원도 많다.
이곳은 도성이기에 삭주와는 아예 다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오직 한 가지였다.
“구휼미가 문제요.”
그랬다.
역시나 문제는 거지 같은 국고였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쳤다.
“대관절 훈련대장은 왜 이리도 오래 걸리는 것인지.”
이미 왔어야 할 시기가 지났다.
그런데 여전히 그림자도 안 보였다.
10만 석의 군량만 당도하였어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이 그 말이외다.”
“하삼도에 가서 농사라도 짓는 건지.”
“이보다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소.”
……
“보나 마나 설렁설렁 움직이면서 추억이나 회상하고 있을 겁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닥을 뚫을 듯한 한숨만 나왔다.
“일단 500석을 융통할 수 있소.”
허적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모두 반색하며 격하게 반겼다.
작금의 정국에서 500석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이기에 그랬다.
정말 어려운 형편이 아닐 수 없다.
남은 건 책임자 인선이었다.
그런데
“대감. 소생을 개성부로 보내주십시오.”
대뜸 박세당이 나섰다.
의아하여 바라봤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중대본에서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소생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음.”
“자중하며 행동할 것입니다.”
“하나 더 확실하게 약조하게.”
“이르십시오.”
“자네는 의원이 아닐세.”
섣불리 병자를 어찌하겠다고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박세당의 안색이 살짝 흐려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리하겠습니다.”
“가고자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아직은 없습니다.”
“얻어오시게.”
“예. 대감.”
인선까지 마무리되었다.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하께 이를 고하겠소.”
이연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개성부에서 역병이 창궐하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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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였다.
심각함이 만든 번뇌에 죽어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의연하였다.
그러고 보니 장계가 한가득하였다.
빤히 쳐다보니 이연이 내밀며 말했다.
“읽어보시오.”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받았다.
그렇게 펼쳤다.
-굶주린 사람 60명에게 벽 5석을 내었습니다.
-벼 300두를 내어 굶주린 70여 명을 구호하였습니다.
-밥 짓는 불길이 끊어지고 굶어 죽게 된 사람들에게 벼 3석을 내놓아 백성 30여 명을 구호한 뒤에 술을 접대하여 배를 채워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과 이미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변해 거의 죽게 된 62명을 모아 끼니를 챙기고 벼 7석을 내었습니다.
……
-어려움을 측은히 여기며 참혹함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벼 6석 10두로 생활이 곤란한 백성 180명에게 기꺼이 내어놓아 구호하였습니다.
문자는 읽었다.
읽긴 읽었는데, 이건 대체 어느 나라의 이야기일까?
아니, 판타지 소설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럴 리가 있나?
이연이 내밀었다면 이는 필시 조선의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놀라운 미담이라니?
눈을 계속 껌뻑거려도 내용은 변함이 없다.
대관절 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고개를 들어 이연을 바라봤다.
그렇게 나는 첨삭지도를 요구하였다.
“개성부의 사족들이 백성을 구호하였다는 내용의 장계요.”
“…….”
누가 무엇을 하였다고?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걸까?
이거 아무래도 인지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전하. 신이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서 여러 어려움이 생긴 듯하옵니다.”
“…….”
“황공하옵니다.”
“경의 귀로 들린 말 그대로요.”
“…….”
“개성부의 사족이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에게 쌀을 내어주었다고 하오.”
“…….”
나는 다시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말했다.
천천히.
“사족이 백성을 구호하였다고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의 수가 수백을 넘어 수천이 이르옵니다. 이들을 구호했다고 이르셨사옵니까.”
“본부장.”
이연의 눈동자는 복잡했다.
그리고 깊었다.
그래서인지 왜인지는 모른다.
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찍이 호포제를 관철하고자 하였을 때 반대하였던 건 경이었소.”
맞다.
내가 말했다.
나는 호포제 집행을 반대하였다.
사족의 반발을 막고자 함이었다.
왜……?
“재해를 극복하려면 사족의 힘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꺼낸 건 경이었소.”
경신 대기근을 감당하려면 사족의 힘은 필수 불가결이기에 그랬다.
“지금 경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사족의 힘이 구현되고 있소.”
구현되었다.
이루어졌다.
현실에서 말이다.
“한데, 어째서 반기지 않고 불신하는 것이오?”
이연의 물음, 이제는 말해야 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신이 사족의 힘을 품어야 한다고 청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그들을 믿은 순간은 없사옵니다.”
“참으로 모순이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온데, 전하. 신에게 사족은 설득의 대상에 불과하였사옵니다.”
“경은 서인과 산림의 영수이거늘 어찌 그들을 설득의 대상이라고 하시오?”
“신이 그들의 영수인 건 성리학의 세상에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곳간을 열어 백성을 구하는 건 현실이옵니다. 하여, 신은 여태껏 그들을 신뢰한 순간이 없사옵니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사족은 변화를 가로막았던 기득권에 불과하였으니까.
또 그래서 내 목소리는 떨렸다.
“하온데…… 그들이 이리 나섰다고 하였기에 감히 믿지 못하였사옵니다. 신이 부족하였사옵니다.”
“어찌하여 부족하오?”
“신이 그들을 불신하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움직였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였다면 어찌 군현의 준비태세에 어려움이 있었겠사옵니까.”
하찮은 나의 지식이 도출한 오만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 시절 사족의 입체성을 완벽하게 무시했던 것이다.
“다양한 이유로 호포제를 반대할 수 있사옵니다. 하온데 신은 오직 이 하나로 사족을 규정하였사옵니다. 개혁 법안을 반대하는 무리이니 신뢰하지 않은 것이옵니다. 그저 때가 오면 설득하여야 한다고 여겼을 뿐이옵니다. 이는 너무나도 큰 오만이었사옵니다.”
“무엇이 오만이었소?”
“되돌아보면 남인의 주요 인사도 호포제를 반대하였사옵니다.”
“그렇소.”
“하온데, 그들을 불신하지는 않았사옵니다. 배척하지 않았사옵니다. 오히려 동지가 되자며 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사옵니다.”
“어찌하여 차이가 발생한 것이오?”
“신이 신도 모르게 사람을 나누었사옵니다. 신이 또 다른 붕당을 만들고 있었사옵니다. 같은 사유로 사족은 불신하였으나 남인의 지도자들은 포용하였으니, 이보다 큰 모순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랬다.
나는 사람을 체급으로 나누었을 뿐이었다.
호포제를 반대하여 불신해야 한다면 허목과 윤선도부터 찍어 내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설득하였다.
반면, 그 노력의 1할도 사족의 설득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시작부터 세상을 나누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사대부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불신하였던 무명의 사대부들이 개성부를 살려내고 있다.
이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더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인 건 이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배려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하지만, 신하 된 도리는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나는 중대본의 본부장으로 해야 할 말을 꺼냈다.
“개성부의 역병을 반드시 제압할 것이옵니다.”
“경을 믿소. 그리고 중대본을 믿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