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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12화 (112/298)

112화 또 다른 희망(4)

개경 유수의 얼굴은 밝았다.

기근이 발생하고 역병이 창궐한 이후 이렇게 밝게 웃은 적이 없었다.

아사자의 확산을 잘 막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관의 역량으로 해낸 일은 아니었다.

이는 개성부 사족이 대거 나선 결과였다.

“참으로 잘하셨네. 자네들이 백성을 구하였어.”

“아닙니다. 영감. 사대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하하. 아닐세. 아니야. 내 자네들의 선행은 이미 장계로 올렸네. 주상께서 크게 치하하실 것이네.”

“당연한 일을 하였는데 어찌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대화의 시작은 늘 훈풍이 불었다.

그러나 현실은 따사로운 것만이 아니었기에 불편한 대화는 존재하였다.

아사는 쌀이 있으면 막을 수 있으나, 역병은 의원과 약재가 없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개성부의 상황이 딱 이러했다.

“병자들은 좀 어떻습니까.”

“끙. 차도가 없네. 약재도 부족하고, 의원의 수는 더 부족하니 어찌 방책이 있겠는가. 그나마 자네들이 나섰기에 굶지 않으니 다행인 상황일세.”

“휴. 조정에서 시급히 해결책을 모색하여야 할 것인데, 답답하군요.”

“기다려보시게. 중대본에서 방책을 마련할 것이네.”

“영감!”

달려오는 관원의 외침에 개성 유수는 심장이 철렁했다.

또 무슨 일이 터졌을까 두려웠다.

“중대본에서 보낸 구휼미와 약재 그리고 의원이 도착하였습니다.”

“저, 정말인가?”

드디어 역병을 방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본부장 송시열 대감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진짜 일이 터졌다.

무려 송시열이 직접 온다면 무슨 채비라도 해야 한다.

개성 유수는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하였다.

“영감. 본부장 대감이 어떠한 의전도 필요 없으니 재해 대책에 전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쁘게 움직인 몸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현 상황을 기록한 문서를 관원을 통하여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내어주겠네.”

천만다행으로 문서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개성 유수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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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의 초안은 박세당만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족의 놀라운 행보는 나를 도성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였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연에게 청하여 직접 오게 되었다.

도착 즉시 의원에게는 약재를 챙겨 병자에게 달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관원으로부터 받은 문서를 읽으면서 개성부의 십자로를 걸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었기에 글자를 읽으면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음.”

기근이 발생하고 역병이 창궐하였으니 꼴이 멀쩡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생기가 느껴졌다.

원인은 오직 하나였다.

개성부 사족의 맹활약이었다.

“놀랍군.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하였을 정도야.”

“소생도 그렇습니다. 백성들에게서 활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어둠도 보이지 않습니다.”

박세당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충분하다.

이만하면 더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보게. 지금 드는 생각이네만, 개성부의 기근 대책에는 내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듯하네.”

“실은 소생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면, 나는 역병을 해결해야겠지.”

“허. 소생에게는 의원이 아니니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누가 직접 병자를 살핀다고 하였나? 총괄을 해야지.”

“이런. 소생이 실언하였군요. 이번에 대감께 많이 배우겠습니다.”

“자네는 되었네.”

“예?”

박세당이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지 않겠나?”

“무엇입니까.”

“성리학의 원리주의를 행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가?”

대저 성리학의 원리주의란 무엇일까.

이를 말로 설명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작금의 개성부 사족만큼 성리학의 원리주의와 가까운 이들이 있을까?

바로 그들이야말로 박세당의 길에 함께 할 사람들이다.

나는 부드럽게 권하였다.

“개성부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자네의 길을 걷게.”

“대감…….”

“아. 사양할 생각은 말게.”

“감사합니다. 대감.”

박세당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장 개성부 사족의 구호본부라고 할 수 있는 숭양서원으로 달려갔다.

그의 걸음이 참으로 가볍게 흥겨워 보인 건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게 잠시 박세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걸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평소 통치를 이따위로 하니 역병이 창궐한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당장 개경 유수를 만나서 박살을 낼 생각이었다.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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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本司)는 개성부 서부 암곳리에 있었다.

특별히 알리지 않고 왔기에 살필 시간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제법 기강이 잡혀 있긴 했다.

조금 더 살피고 싶었으나 재빨리 달려오는 개성 유수로 인하여 미수에 그쳤다.

퀭한 눈과 푸석한 얼굴, 부르튼 입술과 엉망이 된 관복……

행색을 보니 바쁘게 뛰어다니며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한 모양이었다.

안색은 핼쑥한 것이 끼니는 제대로 챙겼는지도 의문이었다.

마음고생도 상당했던 것 같았다.

“대감.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부족한 여건인데도 최선을 다하여 방비하였더군.”

“아닙니다. 사실 사족들이 아니었다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을 겁니다. 소직은 그저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공을 탐하지 않는다.

되돌아볼 때 애초 품성이 틀려먹은 인사였다면 사족의 공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원들의 분위기만 살펴도 개성 유수는 제법 인망을 갖춘 사람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하고 씁쓸했다.

“대감.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할 일이 많다.

편히 앉아서 쉴 시간은 없다.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나지막하게 운을 띄웠다.

“일찍이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셨네.”

“예? 대감. 무슨 말씀입니까. 교지라니요?”

“위생 수칙에 대하여.”

“아…….”

개성 유수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눈동자는 티가 날 정도로 흔들렸고.

허둥지둥하는 태도에서 난처함이 가득 느껴졌다.

그러다가 지그시 쳐다보는 나를 확인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감. 소직이 부족하여 어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위생 수칙을 잘 지키기만 하면 절대로 역병이 창궐하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지는 않겠네. 한데, 내가 주목하는 건 다른 걸세. 무엇인지 아는가?”

“일러주십시오.”

“600명이 넘는 병자 중에서 사대부가 있는가?”

“…….”

“개성부의 모든 사대부가 역병에서 벗어났네. 이를 아는가?”

“소직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역병에 눈이 달렸기에 사대부만 피하였는가?”

“…….”

내 목소리는 점차 날카로워졌다.

개성 유수는 몸을 더 움츠렸다.

“감당할 수 없는 역병이었다면 사대부가에서도 병자가 나왔어야 하네. 한데, 단 한 명도 없어.”

나는 반론까지 완벽하게 차단하고자 곧장 말을 이었다.

“그래. 알겠네. 이는 지금껏 늘 있었던 일이었으니 억울할 수도 있겠지.”

“아닙니다. 대감. 소인이 어찌 그런 생각을…….”

“듣게.”

“소, 송구합니다.”

“내가 기가 막힌 건, 병자 중에서 사대부가의 노비와 전호도 없다는 걸세.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600여 명의 병자 중 사족과 관련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사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상업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여 생계를 일구는 이들이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동시에 개성 유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족은 교화하였는데 관리는 통치하지 않았어.”

이게 핵심이었다.

무려 종2품 개성 유수부터 이러고 있다.

이런 식이었으니 원 역사의 조선은 군왕의 어명보다 산림 영수의 일갈이 더 위력적인 나라로 거듭난 것이다.

“이제 자네의 변명을 들어보지.”

“…….”

필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백성에게 손을 자주 씻으라는 어명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는가.

상점에서 판매하는 과일이나 채소 따위의 위생을 챙기라는 교지가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송구합니다. 할 일은 많고, 일손이 부족하여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습니다.”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답변이었다.

이는 개인의 성품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관성에 빠진 이 나라 조선 관리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왜냐면 개성 유수와 관원들의 기강 자체는 큰 탈이 없기에 그러하였다.

큰 규모의 재해에도 이 정도로 방비한다는 건 치하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별개의 일에 불과했다.

나는 공과를 하나로 보는 사람이 아니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이다.

“알지.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내 말을 이해하는가? 중대본은 실태를 알면서도 청하였고, 주상 전하께서는 인지하시면서도 교지를 내리셨어.”

“대, 대감.”

개성 유수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본다면 안쓰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참으로 오만방자하도다. 대체 언제부터 어명을 상황에 맞춰가면서 살폈지?”

“대감. 오해이십니다. 소직이 어찌 그토록 망극하고 불경한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잠시 시일을 미뤘을 뿐입니다.”

“주상전하께서는 교지에 즉각 집행이라고 이르셨네. 옥새가 찍힌 교지 말일세.”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목소리는 점점 싸늘해졌다.

또,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어도 알았다.

그냥 무표정일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에만 감정이 실렸을 뿐이었다.

하여, 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네는 백성에게 역을 부과할 때 그들의 사정을 봐주는가?”

“!!!”

“조세를 징수할 때 사정을 봐주었나?”

“!!!”

“어찌하여 백성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종2품 개성 유수는 자신에게 관대한가.”

“주, 죽여주십시오. 대감.”

“내게 개성 유수를 죽일 권한은 없네만.”

퇴로 자체를 차단하여 압박했다.

이는 개성 유수만이 아니라 관원들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족을 향한 의심을 가질 시간에 관성에 빠진 수령과 관리들을 때려잡았어야 했다.

지금 와서 후회하여도 무엇이 바뀌겠냐마는,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또 그래서 가슴이 철렁했다.

만일 오늘 개성부로 오지 않았으면 작금의 방만한 현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혹은 이를 기회로 삼는다……

내게 이런 흔해 빠진 말은 필요 없다.

“자네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는가?”

“어명을 수행하지 못하여 역병의 창궐을 방치하였습니다.”

“위생 수칙을 지키면 역병이 없다더냐?”

“그것이…….”

그저 핵심을 말하고, 벌할 뿐이다.

이것이 조선의 법도니까.

“가장 큰 죄는 지엄하신 어명을 새긴 교지의 권위를 사사로운 학연, 지연, 혈연으로 묶인 무리의 서찰보다 가볍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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