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또 다른 희망(5)
개경 유수는 종2품으로 당상관의 관직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임의로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또한, 위생 규칙을 집행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 군현이 허다할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고려할 때, 권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처벌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비상시국이라면 더 그러했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이를 언급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나는 위생수칙으로 역병을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여겼던 ‘위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낼 수 있는지 명확하게 입증할 것이다.
하여, 교지의 권능을 가져온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어쩌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일 수도 있다.
또,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격리지역에 진입한 의원들까지 역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대본 역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질 만큼 쌓아왔다.
하여, 자신감을 가져야 했다.
그러니 이만하면 됐다.
분위기는 확실하게 잡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일이라는 걸 할 때다.
“개성 유수.”
“예, 예. 대감.”
“재해가 발생하였다면 관의 주도로 백성을 위로하는 게 옳네. 그러자고 우리가 관복을 입고, 녹봉을 받지 않겠나?”
“한데, 대감…….”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고루한 원칙을 앞세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아. 그렇습니다.”
“기근은 사족에게 맡기고, 관은 역병을 제압할 것이네.”
“묘책이 있으십니까? 과연 대감이십니다.”
“허. 이 사람아. 어찌 역병을 쉽사리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명확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송구합니다. 예?”
“사족이 저토록 맹활약하는데, 우리도 실력 발휘를 해야 하지 않겠나?”
“예? 물론 그렇습니다.”
“되었네. 그저 나는 병자를 편안하게 해주자는 말을 한 것일세.”
더 말할 필요 없다.
눈으로 직접 보면 될 일이니까.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오늘 중대본의 역량을 아주 제대로 구현할 것이다.
총력을 기울여서 말이다.
물론, 개성부도 힘껏 거들어야 하고.
나는 자신감을 보이며 걸었다.
아니, 의도적인 자신감을 일부러 표출하며 걸었다.
그래야만 했다.
무척이나 떨리는 속내와는 무관하게.
-----
숭양서원의 지척에 당도한 박세당은 숨을 고르듯 내쉬었다.
“휴…….”
되돌아보면 사족의 구호에 놀란 건 아니었다.
기나긴 조선의 역사를 지탱하였던 무수한 사족 중에 어찌 백성을 구호한 이가 없겠는가.
그러나 특정 지역의 사족이 집단으로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행동한 예는 없었다.
이를 알고 싶었다.
이를 들어봐야 했다.
하여, 달려오게 되었고 안색은 상기될 수밖에 없었다.
“…….”
첫 느낌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역병과 기근이 휩쓸고 있는 개성부에서 이런 활기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잔잔한 웃음부터 잊을 만하면 터지는 박장대소까지,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공간의 온기가 가득하였다.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처음 뵙는 분인데 혹시 조정에서 오신 분입니까.”
숭양서원에서 나오던 사대부가 말을 걸었다.
이립을 막 지났을 나이로 보였다.
박세당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개성부의 사족들이 백성을 구호한다기에 살피러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소식에 의하면 우암 대감께서도 오셨다고요?”
“예. 한데 대감께서는 역병을 살피러 가셔서, 당장 이곳으로 오는 건 어려울 듯합니다.”
“음. 그렇군요. 여쭙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지만, 어찌 개인의 욕심을 앞세우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실체적인 평가를 떠나서 대학자로서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 자는 태산보다 높았다. 개성의 사족들이 그를 만나고자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박세당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꼭 이곳을 방문하실 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공들이 청하면 시간도 길게 내어주실 겁니다.”
“아. 소생이 그분께 여쭙고 싶은 건 다른 겁니다.”
“예?”
“아닙니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시면 다른 이가 있을 겁니다. 실은 소생은 아직 합류하지 않은 사족을 설득하러 가던 길이라서요.”
“아. 이런. 내가 시간을 뺏었군요.”
“그러면 또 뵙지요.”
박세당은 곧장 서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직접 확인한 서원의 내부는 바깥세상과는 아예 달랐다.
온기가 느껴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평시였다.
이곳은 절대 기근이 발생한 지역이 아니었다.
박세당은 너무나도 놀랐다.
어찌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쌀을 나눠주는 건 가장 기본이지요.”
눈이 찢어진 사대부가 다가오며 말했다.
박세당은 가볍게 읍을 하며 물었다.
“하면, 그 외에는 어찌 됩니까?”
“일찍이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음. 여러 부족함으로 모두 이행하지는 못하지만, 할 수 있는 건 해내고자 하지요.”
“위생수칙을 이릅니까?”
“예. 이미 손 씻기 정도는 수시로 하도록 교화하였소.”
시작을 교지라고 하였으나 종국에는 교화라고 했다.
여러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음. 하지만, 노상 배변만큼은 쉽게 이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우습게도 평시에는 거의 불가능하였으나 기근이 발생하니 손쉽게 교화되었지요.”
사족의 말대로 서원 근처에서 오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대부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쌀을 매개로 백성을 강제한 셈이니 말입니다.”
“상황에 걸맞게 가장 바른 선택을 한 겁니다. 어찌 부끄러울 수 있겠습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 이런 소생이 결례를 범하였군요. 혹시 선생의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박세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계 선생이셨습니까?!”
찢어진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손을 덥석 잡았다.
박세당은 깜짝 놀랐다.
“참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소생을 아십니까.”
“원리주의를 주창한 선생을 모르는 사족은 개성에 없습니다.”
“아.”
“오늘 우리의 결의는 원리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예……?”
눈을 껌뻑였다.
아직은 이렇다 할 이론을 갖춘 것도 아닌데 어찌 뜻이 전해졌다는 걸까.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
애초 위생국 의원은 명의라고 제법 알려진 이들을 채용했다.
이처럼 원래도 기본기가 탄탄한 의원들이 강력한 지도력과 뛰어난 의술을 겸비한 허목을 수장으로 모시다 보니,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게다가 노점에서 다수의 백성을 매일 상대하였기에 실전에도 능하였다.
이들이야말로 위생국을 이끌어가는 핵심축이었다.
또 무엇보다 이들은 고루한 관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탄력적으로 행동하였다. 내가 내의원의 의원이 아닌 위생국 의원을 이끌고 온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이들을 믿을 뿐이었다.
어느새 격리지역의 지척에 이르렀다.
물론, 내부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대본의 간부는 격리지역 내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여러 비판에 노출될 수 있는 방침이긴 하였으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몇 년간, 수백 명 이상의 피해자를 양산할 역병은 수시로 발생할 것인데 그때마다 간부들이 달려가서 진두지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나, 혹시라도 위험에 처할까 우려되어 그런 것이다.
기근 극복의 사령탑인 중대본은 끝까지 버텨야 하니 말이다.
“대감.”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뒤덮은 우리 위생국 의원이 다가왔다.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뛰었다.
그 소리가 누군가에 들릴 것만 같았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마른침의 소리도 울릴 것 같았다.
긴장됐다.
너무나도 긴장됐다.
부디 어떤 해결책이 제시되기만을 바라였다.
나는 억지로 엷게 웃으며 물었다.
“파악하였나?”
“물론입니다.”
신이시여…….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 기쁘고…….
너무나도 놀라서…….
“허. 정말 파악하셨나?”
역시 깜짝 놀란 개경 유수가 끼어들었다.
위생국 의원이 격리지역에 진입한 지 불과 한나절이었다.
그런데 역병에 대하여 파악하였다고 하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도 놀라서 기절할 뻔했으니 말이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 모든 건 당연한 일이어야 하니까.
나는 대충 손을 내저었다.
중요한 대화 중에 불청객은 단호하게 사절해야 하는 법이다.
“말하게.”
“소인이 유심히 살펴보니 남녀노소 모두 같거나 비슷한 증상을 보입니다.”
“어떤 증상인가.”
“열감, 오한과 발열이 있고 허리가 아프고 뻣뻣하거나 종아리 근육의 통증을 느끼거나…….”
의원은 기록 문서를 확인하며 600여 명의 병자의 증세를 장황하게 언급하였다.
나는 끊지 않고 차분하게 경청하였다.
아무리 바빠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자부심은 존중해줘야 하는 법이다.
특히 목숨을 걸고 역병 창궐 지역에서 싸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니, 다 모르겠고, 이토록 빠르게 원인을 파악해낸 우리 의원들에게는 최고의 예우를 해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무조건.
“입이 마르고 혀가 갈라져 터지며 목구멍이 막히고…….”
600여 명의 사례였으니 얼마나 많고 길겠는가.
그런데도 내가 공손하리만큼 차분하게 경청하자, 개경 유수를 비롯한 관리 모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 모든 증상을 포함하는 역병은 장역(瘴疫)과 여역(癘疫)입니다.”
“자세히 모르기에 묻겠네.”
다시 자세를 낮췄다.
자연스레 다른 관리들도 자세를 낮췄다.
“애초 우리의 준비로 극복할 수 있는 역병인가?”
“물론입니다. 목욕치법으로 역병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오!”
“모, 목욕치법이라고 하였나?”
기쁨의 환호를 지르는 나와는 달리 대경실색한 개경 유수였다.
나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으며 불청객의 개입을 다시 짓밟았다.
“말하게. 자네가 요구하는 모든 걸 수용하고 집행하겠네. 말만 하게. 검토도 안 하고 그냥 다 주겠네.”
“음. 복숭아나무의 가지와 잎, 백지, 측백나무의 잎이 우선 필요합니다.”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대단한 자신감과 배포였다.
“특히 복숭아나무 가지와 측백나무 가지는 남동쪽으로 뻗은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대감. 해당 약재와 재료는 도성에서 대량으로 챙겨 왔습니다.”
“사용하게. 다 사용해. 흔적도 남기지 말고 다 사용하게.”
“식수(食水)가 필요합니다.”
“개경 유수. 들으셨나? 역병 창궐 지역과 아예 무관한 지역에서 가장 깨끗한 식수를 구해오게.”
“무, 물론입니다. 대감.”
“또한, 막대한 양의 땔감이 필요합니다. 목욕치법을 시행하려면 물을 데워야 하니 말입니다.”
“개경 유수. 송악산을 없애도 무관하니 땔감을 최대한 확보하게. 만일, 부족하여 목욕치법의 시행에 차질이 생기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지라 지그시 노려봤다.
“대감. 소직이 잘 해낼 것입니다.”
개경 유수는 알아서 잘 처신하였다.
나는 숨을 내쉬며 의원을 바라봤다.
“자네들만 믿겠네.”
“탈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십시오.”
무명 의원의 목소리에는 진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희한한 건 의원의 자신감이 나를 포근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엷게 웃으며 물었다.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비천한 신분입니다. 우연히 기회가 되어 위생국의 의원이 되었기에 부끄럽습니다.”
하면, 정말 비천한 신분일 것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조선에서 신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자신감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이러니 더 궁금하였다.
“알려줄 수 없겠는가.”
“아. 소인은 백광현이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의가 여기 있었구나.
위생국 수립이라는 변수가 백광현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진심이 담긴 진한 미소가 치밀었다.
그래서 말했다.
“지금부터…….”
백광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역사에 남을 이름 석 자와 의원들의 노고에 나는 절대적인 신뢰로 화답하기로 하였다.
“자네에게 전권을 주겠네.”
“예……?”
“나를 통하지 말고 개성부의 모든 걸 동원하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호쾌함.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