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또 다른 희망(6)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막연하게 원리주의를 주창한 이후라는 정도를 알 뿐이었다.
그즈음 송시열이 묘하게 웃으면서 한 말이 있었다.
-자네, 사람 자체가 변했어.
-소생은 여전히 박세당입니다만.
-허. 설마 잊었나? 자네, 녹봉 삭감 연좌를 주도할 때 독기가 가득했다네.
-소생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뭐.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지금은 독기를 갈무리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자네, 그때 아주 사나웠다네. 통성명을 요구하는데 대놓고 거절할 정도로.
-…….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네만, 지금 자네의 모습은 절대 나쁘지 않아.
-이를테면 천지개벽이라는 말을 듣는 대감처럼 말입니까? 그렇다면 썩 내키지 않습니다.
-큭. 그래. 이래야 박세당이지. 그리워질 뻔했네. 그러니 가끔 독기를 개방하게나.
-…….
녹봉 삭감 연좌를 주도하였을 때나, 원리주의를 주창하였을 때나, 개경의 사족을 만나러 온 지금도 여전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다른 건 있었다.
과거에는 먼저 나서고 비판하였다면, 지금은 나서지 않고 경청하였다.
사람은 여전히 박세당이었으나 세상과 만날 때는 다르다.
어째서……?
과거 송시열은 말했다.
-이는 나의 길이외다.
그랬다.
이는 길이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한데, 이리 인연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개성의 여러 사족이 크게 환대하였다.
박세당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리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 말씀 편히 하십시오.”
오고 가는 말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말도 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원리주의를 주창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습니까? 소생들은 너무나도 듣고 싶습니다.”
계기가 있었다.
사문난적 선언 이후 남인 사족의 어처구니가 없는 행보.
그리고 실망한 듯한 송시열의 눈빛, 이는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었다.
“혹시 소생들이 들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박세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번뇌에 휩싸였을 때 백성을 만났소.”
되새겼다.
그들의 말을.
“그들은 너무나도 무지하였기에 답답하였소.”
-선생. 조세는 왜 내야 합니까?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였소.”
-왜 소인들만 이렇게 힘겹죠? 양반들은 늘 즐거워 보이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참았다.
억지로 대꾸하였을 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걸 자책하며.
“하나씩 일렀소. 천천히 일렀소.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소. 너무나도 자연스레 변하였소.”
-그렇지. 조세를 내었으니 당연히 목소리를 내어야지.
“그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소.”
-참으로 합당한 말일세.
“동의하였고.”
-내가 알아보겠네.
“소통하였으며.”
-하하하! 우문현답일세! 아. 자네 말이 다 옳다는 말이네!
“즐겼소.”
박세당은 담담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고 경청하며, 가르치지 않고 교감하였고, 호통치지 않고 웃었소.”
그렇게 그들이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그대로였소. 그들이 다가왔을 뿐.”
“…….”
“성현께서는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으나 결국 하나였소.”
“무엇입니까.”
“그 모든 가르침은 결국 백성의 삶을 위한 것이었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박세당은 그저 말할 뿐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기에 내가 그들의 손을 잡을 수 있었소. 그렇게 원리주의를 말하게 되었소. 그저 있는 걸 말하고 행하였을 뿐이오. 하여, 나는 그대로요. 거창한 표현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소.”
“세상은 선생을 성리학의 새로운 길을 제안하였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저 말하였소. 없는 걸 만든 게 아니라, 있는 걸 말하였소. 한데, 현자가 바로 이곳에 있었소.”
“허. 선생.”
박세당은 엷게 웃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공들은 내게 내 길이 옳다는 확신을 주셨소. 하여, 감사드리오.”
이 또한 진심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오직 본연의 성리학으로 현자의 길을 개척하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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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됐다.
이마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땀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600여 명이라는 압도적 수치는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역병의 대처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 숨을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병자들이지 않은가.
그때 백광현의 눈에 허둥거리는 이들이 보였다.
서둘러 약탕을 제조해야 하는데 손이 보였다.
부채를 들고 쉬지 않고 흔들어야 할 손이 말이다.
지나가며 거칠게 외쳤다.
“병자마다 세심하게 확인하여 발산풍한약, 발산풍열역 그리고 청열사화약 등을 처방하게.”
“아.”
“처방하게!”
“예, 예.”
딱 잘라서 분공을 내렸다.
눈을 따갑게 하는 매운 땀을 닦으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 의원! 열이 너무 심합니다.”
“진피, 지각, 목향, 향부자, 침향, 단향 중에서 손에 잡히는 것과 부자, 천오두, 오수유, 정향 중 아무거나 택일하여 함께 처방하게!”
“그리하겠습니다.”
백광현은 거침없이 내용을 전달했다.
사태가 조금은 진정되었으나 단지 그뿐이다.
언제라도 다시 악화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약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과장 좀 보태면 물 쓰듯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송시열은 조정에서 확보해온 구휼미 500석을 모두 병자에게 사용하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준비태세였다.
짧은 상념을 끝내고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살폈다.
작은 문제도 그냥 넘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때 관원이 다가왔다.
“백 의원. 목욕할 채비를 하였네.”
“혹시 몇 명이 동시에 할 수 있습니까.”
“자네가 요구한 목욕통을 구하고 있긴 한데…….”
“얼마나 구하셨습니까.”
과감한 거두절미에 관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13개일세.”
“하면, 고작 13명이 목욕을 할 수 있습니까?”
“아.”
“병자의 수가 600명이 넘는 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일세.”
“그런데 목욕통이 13개이면 대체 언제 다 시행합니까. 기다리다가 죽으라는 겁니까?”
까칠해도 이보다 까칠할 수가 있을까?
관원은 무척이나 불쾌하였으나 송시열의 엄명이 떠올랐다.
-의원 백광현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게.
그리고
-괜한 말이 들리면 내가 왜 악명을 달고 다니는지 알게 될 것이야.
엄청난 겁박까지.
그러니 기분이 더러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관원은 인내를 발휘할 뿐이었다.
“하.”
답답함이 가득한 백광현의 한숨이 들렸으나 또 참았다.
“일단 곧장 옮겨주십시오. 아. 땔감은 넉넉합니까?”
“부족함 없이 준비하였네.”
“그나마 다행이군요.”
“…….”
관원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물론, 백광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곧장 옮겨주십시오.”
“그러겠네.”
“한데, 목욕통을 구할 수 없다면 만들 생각은 아예 없습니까?”
“……영감께 전하여 시작하겠네.”
“예. 부디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
백광현은 한숨을 푹 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시간 나실 때 맑은 물에 생강즙을 달여 드십시오. 형편이 된다면 꿀을 소량으로 섞어 3번 마시면 더 좋고요.”
“응?”
“그렇게 땀을 잔뜩 내시면 감기가 멎을 겁니다.”
“아. 그걸 어찌…….”
백광현은 대꾸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불편한 표정을 짓던 관원은 눈만 껌뻑였다.
그새 백광현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네들은 지금부터 복숭아나무 10냥, 백지 3냥, 백섭 5냥을 골고루 찧고 체로 쳐내어 산을 만들게!”
“아.”
“그리고 매양 3냥을 가져다가 탕을 끓이게. 목욕탕마다 이리해야 할 것이네.”
“아.”
“지금 뭐 하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나?”
백광현은 다시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다들 뭐 하시는가! 우리가 조금만 머뭇거리면 병자들의 고통이 연장되고, 실수하면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나만 그리 쳐다보면 다 죽는 걸세!”
“아, 알겠네.”
“우리에게 휴식은 사치일세! 알겠나?!”
“심장에 새기겠네.”
겪을수록 보통 인사가 아니었다.
만일 백광현이 윗사람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였을 것 같았다.
잠시 감동하여 쳐다보던 관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감동은 참으로 짧았다.
“서둘러 움직이게!”
관원도 서둘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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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었으나 서원은 부산스러웠다.
백성들에게 이곳은, 인육을 탐하게 할 정도로 끔찍했던 기근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곳이었다.
비록 역병을 잠재울 수는 없었으나, 아사자의 확산을 막아냈다는 건 칭송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
“기근이 끝날 때까지 있고 싶다면 과한 욕심이겠나?”
“나도 매일 그 생각만 하고 있네. 그런데 당장 오늘이라도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게 우리 신세지.”
“휴……. 여기서 나가면 또 어찌 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만큼 바깥세상은 참혹하였다.
더 말해면 답답할 뿐이었기에 대화는 자연스레 끝났다.
모두 캄캄한 밤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자네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일전에 십자로에서 다툼을 중재하였던 사족이었다.
그가 이렇게 나서니 백성들은 긴장했다.
조금 전, 걱정 가득하였던 대화가 미친 듯이 되새겨졌다.
사실 이미 수백 명을 넘어선 규모였다.
곳간의 쌀이 바닥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숭양서원을 떠나라고 하여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다만, 두려울 뿐이었다.
이곳을 벗어난 개성부의 삶이 말이다.
걱정을 가득 담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하게 이어졌다.
“앞으로는…….”
알아서 살아가라는 말일까?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말일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눈물을 적시는 이가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자 먹먹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저 그리할 뿐이었다.
“절대로 사람을 해하지 말게.”
이만하면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어찌 말을 따르지 않겠는가.
아무리 굶주리고 힘들어도 금수의 삶을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사람을 해할 만큼 힘들면 차라리 우리의 곳간을 탐하게.”
이어진 말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멍하게 하늘로 향하고 있던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사족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가득했다.
백성들의 눈동자는 그 미소를 담아냈다.
“보아도 보지 않은 척을 할 것이네. 마주쳐도 고개를 돌릴 것이네.”
하늘 아래 이런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조선 땅에서 이런 말이 어찌 나온단 말인가.
백성들은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들을 뿐이었다.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던 말이 세상에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부디 이리하게. 우리의 곳간으로 오게.”
잔잔한 외침에 백성들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리하게.”
참으로
“꼭.”
따스한 시간이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본 박세당 역시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개성부의 사족과 나눌 대화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족이 번영하는 조선의 군현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가슴이 너무나도 벅차오르고 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