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봄 겨울 봄 그리고(1)
아주 입이 귀에 걸리셨다.
절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하하!”
“…….”
그러니까 우리 주상전하 말이다.
피로에 찌든 사람을 불러 놓고 미친 듯이 웃기만 하고 있다.
“이 땅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역병과 기근을 방비한 사례는 없소. 과연 중대본이외다.”
중대본의 귀경(歸京)은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이연이 직접 궐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반겨줬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이번 중대본이 낸 성과는 대단했다.
이연이 이리도 웃으며 떠드는 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평가는 정확해야 한다.
“전하. 개성부 사족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사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기근을 방비하기 어려웠을 것이옵니다. 또한, 기근은 역병을 동반하옵니다. 600명이 1,000명이 되는 상황을 막은 건 바로 사족이었사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참으로 참담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것이니, 어찌 이를 고하지 않겠사옵니까.”
“음.”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그들의 선행도 중대본의 역할이었다고 강조하였다 들었소.”
“전하. 신이 어찌 중대본이 아닌 공을 탐하겠사옵니까.”
“박세당이 그리 전하였소.”
“…….”
대체 언제 박세당이 이연과 접선하였단 말인가.
아니지?
지금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대로라면 진짜 물어뜯길 수가 있다.
내가 박세당에게 한 불후의 명언을 되새기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했다.
“신은 그저 농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나도 농이외다. 하면, 설마 이를 공론화하겠소?”
“…….”
왕만 아니었으면 진짜…….
계급이 전부인 세상이기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대로 퇴궐하고 일이나 하기로 했다.
진심을 담아 적당하게 예를 취하며 물러났다.
서둘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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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의 입이 귀에 걸렸을 정도로 이번 개성부 재해로서 중대본의 위생 역량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초안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무엇보다 역병을 제압한 일등 공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목욕치법’이었다.
물론, 장역과 여역이 목욕치법으로 다스리기 쉬운 역병이었다는 건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어쨌거나 지금부터는 정말 정교하게 빌드업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사달이 난다.
나는 곧장 목욕치법의 최고 공신과 독대를 진행했다.
“변 역관. 한 치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말하게.”
“대감. 지금껏 소인이 위생국에 보탠 재원의 5할 이상이 사용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겠나?”
“이제 목욕치법은 불가능합니다.”
단호한 진단이 내려질 만큼 이번에 정말 엄청난 자본이 사용됐다.
사대부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목욕치법을 600여 명에게 시행하였으니 그 규모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음. 소인이 감히 조정의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역병을 잠재울 수 있는 방책은 참으로 달콤할 것이옵니다.”
이 말은 그야말로 백미(白眉)였다.
첨언(添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력과 여건만 갖춘다면 누구나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한 것이네. 자네 말대로 위정자들은 끝없는 유혹에 흔들리겠지.”
“말씀을 듣고 보니 소인이 참으로 큰일을 한 것 같습니다. 위정자가 그러한 유혹에 흔들리는 나라에 작게라도 보탬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허. 작다니. 무슨 말을 이리 섭섭하게 하나? 자네야말로 하늘 아래 유일한 나라의 건설에 일등 공신일세. 암. 그렇고말고.”
“대감.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네만…….”
은근하게 말을 끌었다.
말해야 하는데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변승업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
“…….”
빌드업을 할 만큼 했다.
눈치 빠른 인사이니 이쯤 하면 먼저 말을 꺼내도 될 건데 여전히 조용하다.
아니, 오히려 내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본다.
이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기에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음. 자네가 계속 보태는 가정은 아예 없나?”
“소인이 처세하는 건 가문과 상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차라리 상단을 가져가십시오.”
엄청난 속도였다.
하마터면 단어 몇 개를 놓칠 뻔했다.
“그렇게까지 거절할 필요가 있나?”
“송구합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유독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어렵다는 거군.”
“송구합니다. 대감.”
“아닐세. 결국,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어찌 탓을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역시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하시는군요. 소인 다시 감탄하였습니다.”
작은 틈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아쉬움이 거침없이 밀려왔으나 어쩌겠는가.
이건 억지로 시킬 수도 없으니까.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하면, 자네의 생각을 말해주게. 빠짐없이.”
“대감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지금부터 중대본 지원을 거둘까 합니다.”
“벌써……?”
“그게 옳습니다. 그래야만 조정의 논의가 방향을 달리하게 될 겁니다.”
이는 단지 목욕치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변승업의 지원은 위생국을 지탱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팽팽하게 움직였다.
“위생국이 통째로 흔들리겠군.”
“그리될 것입니다.”
판단해야 한다.
지금 위생국을 흔드는 게 맞을까?
기회라면 기회다.
송준길의 말대로 청으로부터 쌀을 얻어낼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이건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100만 석을 요청한다고 하여 100만 석을 내어주겠는가.
송준길과 윤선거의 결단이 아무리 파격적이라고 할지라도, 경신 대기근이라는 확정된 재앙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지금 국고를 흔들어버린다면 대청 외교와 무역, 모두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다.
솔직히 삭주부와 개성부를 모두 경험한 입장으로서는 재원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삭주부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통제를 강화하였고, 병자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중대본의 역량을 집중한 개성부 재해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아예 결이 달랐다.
물론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근심 따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이는 언제라도 생길 마음이니 어쩔 수 없다.
변승업은 조선 최고의 상인답게 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쉽사리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위생국의 존폐를 이토록 도박성 짙게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목욕치법을 포기하는 것과는 아예 다른 일이었다.
“이렇게 물어봐야겠군. 이미 자네는 결심을 굳힌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소인이 나랏일을 너무 가볍게 여겼습니다. 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위생국의 운영이 어려워지겠으나 소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 이는 단지 소인의 사정만이 아니라 참으로 적절하게 대의와 때를 함께하였으니 너무나도 다행이지 않겠습니까.”
변승업의 말은 모두 옳았다.
정확한 정세 분석이었다.
한 가지만 거짓이다.
그것은 바로 위생국 유지를 더 하기 어렵다는 말, 이는 엄살이다.
한마디로 변승업은 내가 협상안을 꺼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오늘 유독 말이 길군. 그래. 속에 있는 걸 꺼내 보게. 무엇을 내어주면 되겠나?”
“아닙니다. 대감.”
“구구절절한 사연을 더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네. 물론, 자네는 위생국 지원도 중단할 수 없네.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말일세.”
“이런. 소인의 어려움을 이렇게 알아주시니 어찌 거절만 할 수 있겠습니까.”
전광석화와도 같은 태세 전환.
변승업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면 개방이 어렵다면 의주 정도를 내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불가.”
“대감.”
“은광, 금광을 포함한 광산을 내어주지.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5곳 정도면 될 것이야.”
“소인이 목숨을 걸고 대감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죽기 전에 기어이 대감의 위명이 저 넓은 중원 땅을 흔들 수 있도록 할 것이니 부디 오래 사셔야 합니다.”
피식 웃었다.
엄청난 권리를 내어준 것이니 이리 나올 만하다.
그러나 선은 정확하게 그어줘야 한다.
조선에서 상단과 상인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잊지 말게. 억만금을 가졌더라도 상인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을 것이야.”
“소인 한시도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감께서 일러주셨기에 다시 새기겠습니다. 염려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알지. 그래도 말은 해야지. 그래야만 하는 일이니까. 안 그런가?”
“명심하겠습니다. 대감.”
다소 굳은 안색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승업이 조금 서운할지라도…… 응?
전혀 서운한 기색은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태연한 기색이었다.
“아. 대감.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편히 말하게.”
“쇠고기 전매권의 값을 다 치렀습니다.”
“응……?”
“예.”
“뭐?!”
변승업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려는 찰나, 내가 먼저 웃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나?”
“…….”
“고생하게나.”
나한테 한 방 먹이려고 한 것이다.
백 년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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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살폈다.
보면 볼수록 나오는 건 한숨이었고, 늘어나는 건 주름이었다.
제자를 빤히 쳐다보던 허목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계. 그러다 늙겠네.”
“아. 송구합니다. 스승님.”
“청계천 준설은 끝을 보이고, 재원은 확보되어 자네의 정책을 본격화하는 일만 남았네. 이토록 순탄한데 어찌하여 근심이 그렇게 크신가.”
“일정 수준의 재원을 확보하였으나 여의치가 않습니다.”
“애초 계획의 3할에 그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음. 혹시 일을 시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상한 시절에는 하루라도 빨리 역사를 마무리하는 게 좋기에,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형원의 말은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재해가 발생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작금의 조선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역사는 마무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또한, 언제라도 재원이 삭감되거나 취소될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재해가 발생하면 모든 재원을 투입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가장 우려되는 건 민심의 동요입니다. 도성의 백성들로서는 느닷없이 멀쩡한 뒷간을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퇴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잘 설명할지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애초 이런 우려를 버릴 수가 없었기에 최대 인력을 동원하여 단기간에 힘있게 진행하는 것이 좋았겠으나, 이미 방법은 달라졌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도 애잔하였다.
냉철한 분석이긴 하였으나 무언가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허목의 표정이 묘해졌다.
“해서, 소생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 이 사람. 참으로 고약하군. 어림도 없네.”
“스승님. 손을 좀 빌려주십시오.”
“하하하. 늙은 스승을 어디까지 곤란하게 할 생각인가. 그 많은 재원을 확보하였거늘, 어찌 변승업에게 기대어 겨우 연명하는 위생국에 손을 내미는가.”
“스승님. 변승업은 조선 제일의 거상입니다. 소생이 잘 설득해보겠습니다.”
“자네 그가 왜 조선 제일의 거상인지 아는가?”
“예?”
“돈의 흐름을 귀신같이 파악하더군.”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은 유형원을 보며 허목은 빙그레 웃었다.
“쇠고기 전매권을 처리한 뒤 내게 찾아와서, 절대로 자네를 거들 수 없다고 신신당부하더군.”
“…….”
“3할을 확보한 자네의 첫인상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 아니겠는가?”
변승업에게 여러 사정을 세세하게 물었던 기억이 떠오른 유형원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허목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비록 그가 일국의 위정자는 아니지만 한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 인물일세. 그런 이의 눈썰미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네. 하물며 돈과 관련한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를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소생이 큰 실수를 한 건 분명하군요. 머지않아 갚아 줘야겠습니다.”
“하하하. 변승업은 두 발 뻗고 못 자겠군. 자네에게 원한을 샀으니 말이야.”
사제 간의 정겨운 대화가 이어질 때였다.
관리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바로 수레 기술을 익히러 간 목수들이 도성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유형원은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스승님. 서둘러 가시지요.”
“암.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