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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18화 (118/298)

118화 봄 겨울 봄 그리고(3)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진짜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나도 모르는 새에 경신 대기근이 시작된 줄 알았다.

몇 번을 듣고 봐도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은 압도적인 수치 때문이었다.

[12,210명]

천 명이 아니라 무려 만 명이었다.

이러한데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말이다.

왜……?

12,210명은 아직 유민이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제 터전에서 굶주리고만 있는 기민(飢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도한 것이다.

미친놈처럼.

그러나 언제라도 유랑을 시작할 수 있는 무리가 기민이다.

통제에 작은 허점이 발생하거나 제대로 된 대책이 수립, 집행되지 않으면 유민화(流民化)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공포였다.

굶주린 12,210명이 걸어 다니는 건 인지(認知)의 영역을 넘어선 공포였다.

“…….”

참으로 간사(奸詐)하다.

참으로 조악(粗惡)하다.

만 명이 겪을 고통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안도하고 있지 않은가.

만 명이 겪고 있을 처참함을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만 명의 절규가 지천에 울리는데 귀를 막고 눈을 돌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모순을 너무나도 쉽게 합리화하고 있었다.

아니, 괴이하게 합리화했다.

늪이었다.

그야말로 모순의 늪이었다.

그러나 모순의 늪에 빠진 건 오직 나 하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외다.”

“시련이외다. 이보다 큰 시련은 없소.”

“백성의 절규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소.”

……

“서둘러 대책을 수립해야 하오.”

모두 백성의 절규와 고통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만 안도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

“본부장.”

“…….”

“본부장.”

“…….”

“본부장?”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통수에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였단 말인가.

나는 지금 왜 안도하고 있었나.

내가 진실로 지옥의 야차가 되고 있구나.

정신 차려야 한다.

야차의 길은 선택이어야 한다.

내가 야차가 될 수는 없다.

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장 정신 차려야 한다.

손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허목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기근은 언제라도 역병으로 이어질 수 있소.”

“범위는 평안도 전역이며, 규모는 1만 명이오. 위생국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찌할 수는 없소. 냉정하게 역병의 창궐 가능성을 주시하며 의원을 집결시켜 두는 게 옳소.”

현실을 반영한 가장 정확한 진단이었다.

역병이 창궐할 수 없게 대비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런 게 있을 리는 없다.

할 수 있는 건 위생 수칙을 강화하는 것인데, 아사 직전의 백성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이다.

하여, 아예 언급도 안 했다.

나도.

허목도.

나머지도.

“호판. 상황은 어떠하오?”

“국고의 마지막 남은 쌀 한 톨까지 긁어내도 감당할 수가 없소.”

“허…….”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관절 훈련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오!”

10만 석의 군량만 있어도 이 사달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진정 하삼도에서 추수하여 가져와도 이보다는 빠를 것이외다. 아니면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강대한 외적이라도 만나 전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개성부 재해일 때도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완이 어디서 놀고먹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속도에 불과했다.

필시 부지런히 군량을 운송하고 있을 것인데, 상황이 너무 촉박하고 절망적이니 화가 터져 나올 뿐이었다.

“서계. 혹시 기대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허적의 말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박세당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대감. 아직 접점이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1만 명의 기민이 발생한 초유의 사태입니다. 양반들의 곳간도 진작에 바닥을 보였을 겁니다.”

“…….”

기대는 말 그대로 기대에 불과했다.

입술을 터질 듯 세게 깨물었다.

기민이 유민으로 빌드업하는 순간 이 나라는 지옥의 초입으로 가는 것이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호판. 결단을 내려주시오.”

“해보지요. 부족하지만 해봐야지요. 어찌 백성이 굶어 죽는 걸 지켜만 보겠소. 국고를 모두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지요. 곧장 평안도로 다 보내겠소.”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막아냅시다.”

다시 말했다.

“반드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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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대장 이완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한숨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영감. 또 탈주하는 병사가 발생하였습니다.”

“……정확하게 전하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군량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허.”

기가 막혔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전시도 아니고 평시의 임무인데 말이다.

더욱이 훈련도감의 병력은 사실상 직종으로 분류된다.

그런데도 탈주를 하였다.

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영감. 며칠째 제대로 이동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대로라면 군량만 축낼 뿐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간 훈련도감의 병력이 여러 패악질을 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훈련도감은 오직 전쟁을 대비하고, 외적이 조선의 국경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억제력이었기에 그러하였다.

그러니 강군으로서 위용만 갖추면 된다고 여겼다.

비상시 발생할 전투에서 성과를 내면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군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평시에 해이해진 기강은 임무를 수행할 때 아예 문란함으로 번졌다.

군량을 옮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엄한 군법으로 벌하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어려웠다.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폭우까지 보태면서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한시라도 빨리 도성으로 가야 하거늘 이리도 발목이 잡히다니. 혹시 강화도로 간 병력은 어찌 되었나?”

“사정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엇이 다르겠는가.

같은 훈련도감인데 말이다.

이완은 하늘만 바라봤다.

조선 최고의 강군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사라진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는 평소 문란한 군기를 방기(放棄)한 자신의 잘못이었으니 말이다.

홀로 읊조렸다.

“선왕께서 이를 보시면 얼마나 책망하실까…….”

가슴이 너무 무거웠고, 심장이 따가웠다.

그러나 한 걸음이라도 가야 했다.

도성을 향하여.

그런데

“영감!”

부관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완은 그저 담담하게 바라봤다.

“얼마 전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하여 이동로가 막힌 상태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뜩이나 시간이 소요되는데 산사태라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회할 길을 찾도록.”

“한데, 파악한 바에 의하면 여러 명의 백성이 피해를 본 듯합니다.”

“뭐……?!”

이는 살펴야 한다.

이완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서둘렀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당도한 산사태 현장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를 악물며 부관을 노려봤다.

“……자네 이를 그토록 간략하게 보고했나?”

“소, 송구합니다.”

기가 막혔다.

보고로는 그저 사람 몇 명이 깔린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예 산이 무너진 수준이었다.

모르고 봤다면 원래 길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길만 막힌 게 아니라 민가까지 아예 덮친 상태였다.

산사태가 일대를 완벽하게 집어삼킨 것이다.

하루가 급한 이 시국에 미리 파악하지 못한 부관과 병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일단 억눌렀다.

지금 중요한 건 거대한 흙더미 어딘가에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죽었을 수도 있지만 숨을 쉬고 있을 수도 있다.

현장을 미리 파악하던 부관에게 물었다.

“피해를 본 백성의 수가 파악되었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인근 백성의 말에 의하면 족히 100여 명은 되는 듯합니다.”

“뭐……?”

“…….”

참으로 태평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죽일 듯이 노려보자 부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완은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 흙을 파내어 백성을 구한다.”

“영감.”

“영감.”

부관들은 당황하였다.

그리고

“…….”

“…….”

병졸들은 눈만 껌뻑이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완은 이 모든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으나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노여움, 분노, 염증…… 이런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워졌다.

입가는 조소가 지배했다.

차분하게 아니 무미건조하게 말을 시작했다.

“일찍이 선왕께서 이르셨다. 훈련도감은 조선 최고의 강군이라고.”

이완은 좌우를 돌아봤다.

“나는 여태껏 이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묘한 분위기를 느꼈을까?

부관들은 눈치를 살폈다.

“이토록 문란한 군기는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이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장수에게 후회는 부질없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저 선왕께서 한탄하실까 두려울 뿐이다.”

병졸들도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완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옳다!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훈련도감은 조선 최고의 강군이다.”

그의 외침이 좌중을 울렸다.

“옳다! 정예병이 백전백승만 일궈내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시에 조금 문란하면 어떠한가?! 하여!”

그리고

-차아아아앙!

칼을 뽑았다.

이완의 기세는 조금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눈빛은 매서웠고, 표정은 굳건하였다.

평소 서글서글 웃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은 애초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 훈련대장 이완은 편의종사권으로서 전시를 선포한다.”

“!!!”

“!!!”

“!!!”

이완은 싸늘하게 부관과 병졸을 바라봤다.

“전시에 군령을 어기는 자, 참수로 다스릴 것이다.”

조선 최고의 무장이 칼을 휘두르며 전시를 선언하였다.

이를 거역할 수는 없다.

“영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영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부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영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영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병졸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완은 칼을 들었다.

“전군…….”

그리고 외쳤다.

“진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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