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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19화 (119/298)

119화 봄 겨울 봄 그리고(4)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백성이 가득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생기라는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의 안색은 어두웠다.

한눈에 보더라도 수십 명의 백성이 주저앉은 거리였으나 황폐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작은 움직임이 신경을 자극하게 할 정도의 적막이 가득했다.

모두 알고 있었다.

움직임은 고통스러운 허기만 부추길 뿐이라는 걸.

“…….”

“…….”

종일 누구도 말이 없었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미약한 숨소리만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할 뿐이었다.

“……떠날까?”

누군지는 모른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다.

그저 한 명이었을 것이며, 이곳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누구라는 것과 어디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어디라도.”

“잡히면……?”

“아니지.”

“뭐……?”

“안 잡히면 산다던가?”

“…….”

“어차피 죽어.”

무언가를 긁어내는 목소리는 괴이한 잔잔함을 유발하였다.

“살자고 하는 말이 아니야. 어차피 죽어. 그런데 높은 분들이 입맛에 맞게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

“…….”

“나는 떠날걸세. 잡혀 죽을 수도 있고, 굶어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 새끼들이 원하는 장소에서는 안 죽을 거야.”

말이 끝나면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어디서 누군가였던 사람이 모두의 눈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힘겹게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죽고 싶은 곳에서 죽을 거야.”

“…….”

“여기는 아니야.”

울림은 서서히 번졌다.

그리고 한 명씩 뒤따르는 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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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안주목.

안주 목사는 미칠 지경이었다.

편히 발을 뻗고 잔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잠을 제대로 청하지도 못하였다.

눈동자는 퀭했고, 낯빛은 노랬다.

얼굴은 푸석했고, 입술은 부르텄다.

상투는 엉망이 된 지 오래였고, 의관은 흐트러질 만큼 흐트러진 상태였다.

답답하고 참담하여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백성은 고통받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관청을 나서기로 했다.

관청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여, 영감.”

“나, 나오셨습니까.”

“소, 소인들을 도와주십시오.”

100명이 훌쩍 넘는 백성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여, 영감…….”

“제, 제발 쌀 한 톨이라도 내어주십시오.”

“쌀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알아듣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목소리는 가냘팠다.

말조차 제대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굶주린 것이다.

여전히 현실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참혹했다.

하루가 갈수록 더해지는 참담함에 목사는 주저앉을 뻔했다.

그나마 버틴 것은 백성을 다스려야 할 목민관으로서 마지막 책임감의 발로였다.

“관청에도 이미 쌀이 없다.”

“…….”

“나 역시 끼니를 제대로 챙긴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이어지는 안주 목사의 말에 백성들의 얼굴은 절망으로 뒤덮였다.

좌절의 침묵이 사방을 에웠다.

하지만, 좌절의 침묵이 좌절 그 자체를 이겨낼 수 없었다.

“여, 영감.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아니라고 하면 소인들은 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산과 들로 가야 할 것이다.”

“여, 영감.”

“떠나라. 한시라도 빨리.”

“…….”

끝내 안주 목사의 목소리는 젖었다.

목울대로 치솟는 물기에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멍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망연자실한 백성들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내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울먹이는 목소리를 겨우 짓눌렀다.

시선을 돌려서 백성들을 바라봤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절대 너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

“절대 너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안주 목사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물기에 젖어 축축하였으나 말은 이어졌다.

“방법을 찾을 것이다. 만들어낼 것이다.”

“…….”

“그러니 죽지 말라. 살기 위하여 노력하라.”

다시 말했다.

“미안하구나.”

또 말했다.

“진심으로.”

안주 목사는 백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는 저 가여운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고작 이 정도가.

끝내 백성들은 오열했다.

너무나도 가슴이 시렸다.

너무나도 원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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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평양부.

평안 감사는 하늘을 바라봤다.

속이 뒤틀리고 불편하였기에 하늘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에 그저 하늘을 바라봤다.

“영감. 곡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고 있습니다.”

“…….”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을 지경입니다.”

“…….”

실로 엄청난 기근이었다.

평양부 전체가 마비됐다.

그나마 있던 비축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늘은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대부로서, 평안 감사로서 책임은 다하여야 한다.

쥐어짜듯 물었다.

“백성들은 어찌하고 있는가.”

“…….”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아니, 애초 질문 자체가 틀려먹었다.

지금 백성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한참을 고민했다.

“…….”

일찍이 중대본에서 내려온 구황 대책을 빠르게 도입하였으나 이는 한계가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을 상대로 일사불란한 집행과 통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구황 정책이 유일한 해결책이자 희망이었다.

“병졸에게 일러 최대한 백성을 집결시키게.”

“영감. 민심이 크게 술렁일 겁니다.”

“저항하면 엄히 다스릴 것이네.”

“…….”

관리는 평안 감사의 결단이 이미 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옳았다.

자세를 고쳐 잡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무엇이든 좋아.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구하게.”

“알겠습니다. 영감.”

“그러나 절대 이를 개별적으로 취할 수 없도록 엄히 단속하게. 또한, 관리가 독단적으로 나눠주는 행위도 금해야 할 것이야. 이는 철저하게 관청에서 통제하여 백성에게 알맞게 나눌 것이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말을 이어가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만일, 탈주를 시도하는 백성이 있다면 인정을 보이지 말고 모두 추포하게. 이는…….”

힘겹게 내뱉었다.

“중죄로 엄히 다스릴 것이네.”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웠으니 이것이 옳았다.

그래야만 하였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으나 버텨야 했다.

“시행하게. 지금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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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삭주 도호부.

도호부사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광대부터 입술까지 어디 하나 따갑지 않은 곳이 없었다.

태어나서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수준의 기근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도호부사로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섣불리 요란스럽게 사방팔방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큰 사달이 나지 않는 이상 관청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는 과거 송시열로부터 배운 재해 대책의 기본이었다.

당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모든 방침을 그대로 집행하였다.

그렇게 세세하게 내린 지침을 수행한 관리들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영감. 관리와 병졸을 모두 동원하여 백성들의 이동을 통제하였습니다.”

“젊은 장정을 꾸려서 구황 작물을 확보하게 하였습니다.”

“걸인들에게 적당한 식량을 주어 역병의 기미를 파악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소인이 그들을 통제할 것입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내리신 구휼미도 남았으며 그간 꾸준히 소량이나마 비축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이를 사용하면 기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관리들의 몰골은 꾀죄죄하였으나 언행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는 그간 꾸준하게 수행해온 준비태세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도호부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백성들은 어떠한가.”

“동요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발도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게.”

“당장 구황 작물부터 경험이 풍부합니다. 소인들이 매번 통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수준입니다.”

“위생 수칙은 어떠한가.”

“그 또한 문제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도호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명도 죽지 않게 한다는 건 오만일세. 그러나 최소한의 죽음으로 이 난리를 견뎌야 할 것이네.”

“예. 영감.”

“움직이게.”

덧붙였다.

“한순간도 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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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살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민생을 살피기도 하였으나, 한 명이 모든 걸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니 문서를 살피는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번은 개성부의 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안도의 대기근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엄중한 사안이었기에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개성부도 얼마 전에 큰 재해로 혹독한 경험을 하였기에 더 신경이 집중되었다.

“영감. 대책을 수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대책을 수립해야지. 음……. 우선, 개성부의 경계를 강화하게.”

“유민의 발생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1만 명 이상의 기민이 발생한 기근일세. 유민의 발생은 필연적이지 않겠나.”

“영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실은 소인들이 파악하니 이미 유랑을 시작한 백성이 제법 되었습니다. 시작은 삼삼오오겠으나 모이면 수백에 이를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쇄환을 잘 준비하겠습니다.”

“틀렸네.”

“예?”

“쇄환이 아니라 수용할 것이네.”

“여, 영감.”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이며 개성 부사의 말을 경청하던 관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 세월 유민을 향한 조정의 방침은 쇄환이었다.

또, 현실적으로 개성부도 상황이 넉넉하지 않다. 이제 겨우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는데 유민을 수용하면 새로운 문제점이 도출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정에 관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쇄환을 한다는 건 다시 사지로 떠미는 것이나 다름이 없네.”

“하지만…….”

“개성부의 형편도 넉넉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살고자 개성부로 오는 백성을 어찌 내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더는 언급하지 말게.”

“영감. 그렇지만…….”

“소인들이 그들을 가엽게 여기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개성부 형편도 어렵습니다.”

“예. 영감.”

“영감. 소인들이 어찌 함부로 나서겠습니까. 다만, 개성부 역시 재해를 완벽하게 극복한 것이 아니기에 우려되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마음이 쓰이신다면 일단 실태를 더 세밀하게 파악하는 건 어떻습니까.”

“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합당한 의견이었다.

그런데 개성 부사가 노기를 터트렸다.

“평안도 백성은 개성부의 백성과 다른 군주를 섬긴다던가?”

심지어 그 내용은 너무나도 거대한 권위를 품고 있었기에 관리들은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어찌 감히 함부로 하겠는가.

“더는 재론하지 않겠네. 또한, 구황 작물의 여분을 따로 확보하여 평양부로 보낼 것이니 그리 알게.”

“…….”

“허. 또 반대하나?”

“영감?”

“개성부와 평안도는 군왕이 다르더냐?”

“예?”

“물론, 나 역시 지엄하신 어명으로 개성부의 부사를 수행하고 있기에 임의로 모든 걸 진행할 수는 없다. 특히, 개성부의 재원을 경계 밖으로 옮기는 건 무리한 일이겠지. 그러나 지천에 있는 구황 작물을 평양부로 보내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는가.”

“…….”

“지금 개성부에 기근이 있느냐?”

“…….”

“다시 묻지. 개성부와 평양부는 다른 나라인가.”

관리들은 눈을 껌뻑이다가 서로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서로 눈을 마주친 그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영감. 소인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예. 어찌 백성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영감의 판단이 참으로 명쾌한데 어찌 더 나설 수 있겠습니까.”

개성 부사는 관복을 내저으며 말했다.

“잊지 말게. 우리는 오직 교지의 권능을 수행할 뿐이라는 걸.”

“……물론입니다. 영감.”

이만하면 되었다.

개성 부사는 흡족하게 웃으며 산회(散會)를 이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반가운 방문객으로 인하여 미뤄졌다.

바로 개성부의 사족들이었다.

“자네들이 어찌 왔는가. 백성을 챙기느라 쉴 틈도 없이 바쁠 텐데.”

“평안도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끙. 나라 전체가 난리일세. 부족하지만 구황 작물이라도 챙겨서 평양부로 전하고자 하네.”

“과연 영감이십니다. 소생들도 어찌 지켜만 보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많지는 않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하여 약간의 구휼미를 마련하였습니다. 영감께서 맡아주십시오.”

개성 부사는 크게 감탄했다.

대관절 이런 의기는 어디서 기인한 것이란 말인가.

“성리학 본연의 가치를 되찾았으니 어찌 침묵하겠습니까.”

“예. 소생들은 그저 행하는 것입니다.”

따뜻함을 품은 성리학 원리주의가 짙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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