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봄 겨울 봄 그리고(5)
끼니는 당연하고 수면조차 사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엄중함이었다.
짙고 퍽퍽한 공기에 숨을 쉴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평안도의 기근이 발생한 직후 나는 문뜩 그런 생각을 했다.
경신 대기근은 대체 얼마나 끔찍할까…….
평안도의 1만 기민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이 정도는 기록으로만 남긴 경신 대기근은 대체 어떤 것일까…….
잠시 스치듯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말 그대로였다.
이조차 극복하지 못하면 경신 대기근 전에 국호 치워버리는 게 낫다.
전주 이씨와 성리학자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이들에게 넘겨버리는 낫다.
그러니 해내야 했다.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모처럼 좋은 소식이 전해졌소.”
“그런 소식은 당장 말씀하시오.”
“본부장이 아니었다면 이미 전해졌을 것이외다.”
허적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슬쩍 피했다.
나는 빨리 좋은 소식을 듣고 싶으니 말이다.
“개성부의 사족이 십시일반하여 구휼미를 평양부로 보내게 되었다고 하오.”
“허.”
“이런 소식이 있나.”
“참으로 의기가 가득한 이들이 아닐 수 없소.”
“그렇습니다. 개성부 사족이라면 이미 지난 재해에 많은 재물을 내놓았습니다. 한데, 다시 이리 나선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일제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조정의 여력만으로 구휼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다.
어쩌면 이 흐름이 일파만파 번져 평안도 사족들에게 선의의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박세당의 말대로 1만 명의 기민이 발생한 기근이기에 사족들의 형편도 어렵겠지만, 십시일반이 괜히 십시일반이 아니다.
만일 잘 풀려나간다면 능히 반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엄중한 정국이었으나 조금씩 빛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주인공이 안 보였다.
“한데, 이 기쁜 소식이 전해졌건만 서계는 어찌하여 자리에 보이지 않소?”
“오는 길에 보았는데 서둘러 어디로 이동하였소. 그런데 논의에 불참하다니.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소.”
“그렇소. 희한한 일이외다.”
그렇다고 하여 박세당을 기다릴 수는 없다.
곧장 논의를 이어가는 게 옳다.
아. 그 전에 확실하게 해둘 게 있었다.
“반계. 어떤 일이 있어도 자네는 자네의 일을 추진해야 할 것이네.”
어떤 경우라도 유형원의 개혁은 단행되어야 한다.
위생의 영역으로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조선이 다시 고개를 들 시기도 고민해야 했다.
모든 역량을 기근 방비에 쏟아붓더라도 이후를 대비할 씨앗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옳다.
물론 유형원이라면 흔들리지 않겠지만 세상만사는 너무 복잡하다.
노파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꼭 새기게.”
“물론입니다. 다만…….”
말끝을 흐린다.
안색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어떤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의아함이 커졌다.
“말하게.”
“변수의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변수라고 하였나?”
“유민입니다.”
“…….”
“1만 명의 기민을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평안도의 곳곳에서 기민의 유랑이 시작되는 건 막을 수 없겠지요.”
애써 외면한 문제이지만 결국 논의해야 할 부분이었다.
다만, 이를 유형원이 먼저 언급했다는 건 다소 의외였다.
그를 평가절하하는 게 아니라, 현재 맡은 역할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역이라서 그러했다.
“맞는 말이긴 하네만 굳이 ‘변수’라고 하였네. 유민의 발생 자체는 절대 변수일 수가 없지 않은가.”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중대본이 감당할 수 있는 유민의 규모를요.”
“중대본이 감당한다면……?”
“예. 유민은 필시 도성으로 올 겁니다. 철저하게 통제할지라도 다수를 어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소수라면 어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이 경우 유민이 도성의 지척에 당도하는 건 결국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점검해야 합니다.”
너무 맞는 말이었다.
차라리 수백 명의 유민이라면 통제할 수 있으나, 삼삼오오 움직이는 유민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밤길에 남몰래 이동할 그들을 어찌 쇄환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미 선례가 있기에 도성을 향하여 달려올 가능성도 아주 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목을 바라봤다.
곧장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허 국장. 위생국을 총동원하여 유민을 감당해야 한다면 어찌 되오?”
“음.”
허목은 침착하게 곱씹었다.
하나씩 차근하게 위생국의 상황을 되돌아볼 것이다.
“기존 유민은 이미 안정되었으니 위생국의 역량을 기울인다면 버거울지라도 500명의 유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한데, 도성으로 수용할 생각이시오?”
“당장은 어려울 것이외다. 일단 도성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그 말은……?”
“그들을 수용하더라도 여건을 먼저 갖추는 게 순서인 듯하오.”
시선을 돌려 유형원을 바라봤다.
이 문제를 미리 언급하였다.
또, 굳이 ‘변수’라고 하였다.
유민의 발생 자체는 절대 변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비책을 수립하였을지도 모른다.
기대를 담아서 쳐다봤다.
“시일을 끌어주신다면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겠습니다.”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허.”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유형원은 엷게 웃으며 말했다.
“도성 전역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동부로 국한되었습니다. 재원은 넉넉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알면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알겠네.”
남은 문제는 한 가지였다.
바로 유민을 구호할 식량.
이번에도 바로 쌀이 문제였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훈련대장은 배를 타고 원정이라도 갔단 말이오!”
이완.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다.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인사가 아닐 수 없소!”
“조선 최고의 정예군을 이끌고 갔으면 남들보다 빨리 와야 하오. 한데, 같은 속도로 설렁설렁 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이오!”
사방에서 분노가 터졌다.
그만큼 우리에게 쌀은 절실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완에게 사약이라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시뮬레이션을 하였는데도 이토록 열이 뻗쳤다.
실제 상황이었으면 진짜 살인 충동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미친 듯이 짧고 굵게 이완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대관절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우리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굳긴 굳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재해를 알릴 때와 같은 급박한 발소리는 또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다소 가볍다고 할까?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이완이 당도한다는 소식일 수도……?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우리는 크게 반색하며 쳐다봤다.
“급보입니다!”
“서둘러 말하게!”
“훈련도감이 당도하였나?”
관리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느낌 왔다.
실망했다.
“대감! 연좌가 발생하였습니다.”
죽여버릴까.
진짜.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군가. 내 모든 걸 걸고 오늘 내로 요절을 내버릴 것이야.”
“박세당입니다.”
“오. 그런가?”
잠시 잊었는데, 성리학의 르네상스가 열린 이후 연좌는 좋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 일단 가보자.
착한 연좌의 가능성이 상당했다.
아니, 착한 연좌일 것이다.
그는 성리학 원리주의를 주창한 착한 사대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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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패악질을 일삼으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문란하였던 훈련도감을 아는 이라면 놀랄 것이다.
어떤 이는 훈련도감이 그토록 오합지졸이었다는 걸 들어도 놀랄 것이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놀라움을 만들어낼 정도로 지금 훈련도감의 모습은 대단했다.
온몸이 땀이었다.
의복은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흙을 파낼 수 있는 도구는 모두 동원하였다.
큰 바위나 돌은 여러 명이 힘껏 옮겼다.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일사불란하였다.
그야말로 정예군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흙을 퍼내고 옮겼다.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바위를 옮겼다.
그래야 했다.
지금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엄중한 전시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어?!”
누군가가 외쳤다.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사, 사람이다!”
그 말에 근처 병졸이 일제히 달려갔다.
정말이었다.
흙더미에 가려졌으나 누가 봐도 사람의 손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존하였겠는가.
병졸들은 말을 아끼며 조심스레 흙을 치웠다.
그랬다.
그랬는데
-꿈틀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병졸들의 눈이 커졌다.
“사, 살았다!”
“살아 있다!”
병졸들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흙을 치웠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 손을 움직여 흙을 치웠다.
손의 움직임은 빨랐다.
그러나 부드러웠다.
그래야만 했다.
작은 충격이 생사를 가를 수도 있기에 그리하여야 했다.
그리고…… 흙더미에 깔렸던 백성의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또 그리고…….
“커헉……!”
탁하였으나 숨이 터져 나왔다.
이 순간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말을 아꼈다.
그저 말없이 손을 움직이며 그의 몸을 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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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이 주도하는 연좌의 규모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선두에 선 박세당의 뒤로 수십 명이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이 수십 명일 가능성이 커졌다.
바로 그때 박세당이 선창했다.
“전하! 신들은 그간 하해와도 같은 성은을 입어 참으로 호의호식했사옵니다. 하오나, 신하로서, 관리로서, 사대부로서 어찌 더 배를 불리며 사치를 품겠사옵니까. 하여,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그래.
들어보자.
오늘의 착한 외침을.
“신들의 녹봉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하.
이런 미친.
그토록 말했건만.
의기는 알겠으나 이건 너무나도 섣부른 행동이다.
사대부라고 하여 흙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관리라고 하여 모두 부유할 수도 없다.
녹봉이 인상되었다고 한들 여전히 박봉이다.
이를 거둔다는 건 관리에게 죽으라고 떠미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저들이 있어야 조선이 움직인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박세당의 말이 더 빨랐다.
“평안도 기근의 극복에 보탤 것이옵니다.”
녹봉을 거둔다는 게 월급을 안 받겠다는 게 아니었다.
이는 재해 극복을 위한 성금(誠金)을 내겠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절절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고통스러운 희생이었다.
그런데 내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랬다.
무릇 희망은 작지만 단단하다.
그간 우리의 노력이 발아(發芽)하였다.
그저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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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가 박봉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관리의 녹봉을 더한다면 상당한 규모였다.
과거 허적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녹봉의 규모는 3만 석이외다. 줄이거나 늘리거나 혹은 유지하거나…… 이런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할 때, 차액은 8천 석에 이르오.
차액만 8천 석.
이 가치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상비군 1,200명을 유지하는 군량이 연 2만 석, 즉 매달 2,400여 석이 필요하오. 8천 석이라는 건 잘 훈련된 훈련도감의 병력 1,200명을 3달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규모라는 것이외다.
병력 1,200명을 3달 이상 유지할 수 있는 규모.
이것만 해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런데 박세당의 연좌는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전체 관리의 녹봉을 일시 중단해야 한다는 엄청난 수위였다.
당연히 반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박세당이 말하는 삭감은 법도로서 관리의 녹봉을 삭감하는 게 아니라 일회성 성금의 형식이었기에 장기적으로는 탈도 없다.
1만여 명의 기민이 발생한 비상사태다.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을 뿐 유민은 이미 발생하였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유민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이러할 때 박세당의 연좌는 천군만마나 다름이 없었다.
고통스러웠으나 그러했다.
그러나
“…….”
용안(龍顏)은 어두웠다.
번뇌(煩惱)가 가득했다.
고통(苦痛)이 느껴졌다.
“전하.”
“늘 생각하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내가 이 나라의 군주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소.”
“전하…….”
“하늘 아래 그 어떤 위정자의 의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겠소. 조선의 사대부가 아니라면, 우리 관리가 아니라면 누가 이를 해낼 수 있겠소.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이면에는 죄스러움이 담겨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었다.
군주로서 신하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이를 내색할 수는 없다.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자부심(自負心).”
“…….”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열의와 고매한 의기를 가진 이들을 신하로 두었다는 자부심으로 버티겠소.”
“…….”
가난한 나라의 군주로서 이연이 내린 결정은 이러하였다.
그저 버티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버티겠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것이 나의 역할이 아니겠소이까.”
그저 침묵하고자 하였다.
그러고자 하였다.
어차피 사실상 윤허하였으니 괜찮지 않은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선의 사령탑은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하여야 한다.
하여, 나는 침묵할 수 없다.
“전하.”
“…….”
“열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의기를 보였다고 할지라도, 들떠 일어섰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니옵니다. 웃으며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무릇, 열의와 의기로 들떠 일어선다는 건 현실의 손해를 동반하는 것이기에 그러했다.
하여,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조선의 사대부만이 할 수 있는 결의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반드시 그들의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전제는 이연의 ‘윤허(允許)’다.
버팀의 선언이 아니라.
“전하. 조선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오늘의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옵니다.”
“…….”
“이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오늘 조선의 문무백관을 대변한다.
그들을 위하여.
“전하. 부디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최고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뇌와 버팀을 선언하였던 외로운 군주의 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그리고
“응당…….”
다시 조선의 군주, 이연이 나타났다.
“윤허할 것이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군왕의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자부심은 가질 것이오.”
절절한 진심이 새어 나왔다.
“영원히.”
나 역시 진심으로 화답했다.
“신도 그리할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