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봄 겨울 봄 그리고(6)
평안도의 어느 이름 없는 야산이었다.
적당하게 험했고, 또 적당하게 깊었다.
특별한 거라고는 없는 산이었기에 평소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평소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한 명씩, 두 명씩…… 다섯 명, 여섯 명이 모이더니 20명을 훌쩍 넘는 인원이 모였다.
그들의 일과는 단순했다.
동이 트면 먹을 수 있는 걸 찾고, 달이 뜨면 고단한 몸을 쉬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무언가라도 찾고자 종일 돌아다닌 두 남자는 터벅터벅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뭐라도 찾았나?”
“대충 칡이나 구했네.”
“얼마나?”
“탐내지 말게. 내 새끼들 먹이기도 부족한 양일세.”
“끙…….”
“왜? 혹시 빈손인가?”
“말도 말게. 뭐 하나 구하기도 어려워.”
“음.”
칡을 든 남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적당하게 나눠서 내밀었다.
“가져가게.”
“허. 그래도 되는가?”
“자네도 딸린 식구가 있지 않나. 우리는 굶어도 새끼들은 먹여야지.”
“고맙네. 정말 고마워.”
“됐네. 대신 다음에 자네도 나를 도와줘야 해?”
“암. 물론이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제대로 먹지 못한지 수일이 지났으나 그래도 온기라는 게 남아 있었다.
힘들고 버거워도 기대며 살아가는 법을 잊지 않은 덕이었다.
그런데
“거. 손에 든 게 뭔가?”
처음 보는 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피골이 상접한 사내들이었으나 수가 10명은 되었다.
또 기세가 참으로 사나웠기에 칡을 든 두 명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뭔가?”
“내놓게.”
“우, 우리가 구한 걸세.”
“됐네. 그러면.”
“무슨 말……!!!”
갑자기 사내들이 저돌적으로 덤볐다.
온몸으로 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종일 산을 돌아다니며 구한 칡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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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산길이었다.
길이 험하거나 외진 건 아니었으나 주된 교통로가 아니었기에 굳이 발자국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요 며칠 꾸준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앞에 선 두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했다.
“이보게. 이 길이 맞나? 평소 다녀본 적이 없어서.”
“길게 돌아가는 길이라서 올 필요가 없었지. 빠른 길보다 며칠은 더 걸려.”
“허.”
“이 사람아. 유랑하는 처지에 그런 걸 왜 따져? 눈에 띄면 바로 잡혀가는 거 모르나?”
“끙.”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게. 애들도 군말 없이 오는데.”
“거. 무슨 말을 그리하나?”
“됐네. 서두르게.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몸을 쉴 곳도 찾아야 하니까.”
재촉이 이어지자 일행은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지척에서 느껴졌다.
정확하게는 앞이었다.
관군일까?
긴장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새 모습을 보인 이들은 초췌한 몰골의 사람들이었다.
관군이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였다.
그러나
“먹을 거 좀 없소?”
들리는 말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알 수밖에 없었다.
앞서던 남자 둘의 안색은 잔뜩 굳었다.
“조금만 나눕시다.”
“……우리도 부족하오.”
“…….”
“……정말 조금이면 되겠소?”
“물론이오. 같은 처지끼리 해치고 싶지는 않소.”
이는 다행일까?
아니, 다행이었다.
다투면 모두 뺏기지만, 나누면 최소한은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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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안주목.
관청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물 따위가 나열되었다.
모두 어류를 포획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안주 목사는 다급하게 물었다.
“정녕 이리하면 더 많은 어류를 포획(捕獲)할 수 있단 말인가?”
“예. 영감.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최소 2배 이상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낯빛이 노란 안주 목사의 입가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감돌았다.
기근이 발생한 이후 절로 나오던 실소와 처연한 웃음과는 달리 진심이 담긴 기쁜 미소였다.
백성에게 일러 산과 들로 나아가라고 하였던 처절한 순간 이후 절치부심하며 해결책을 모색하였는데, 드디어 작은 성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이었다.
“허. 이럴 수가 있나.”
또 탄식하였다.
이는 일찍이 중대본에서 내려온 지침 중 하나였으나 제때 보급하지 못하였다.
뒤늦게 방책을 찾던 중 확인하였다.
물론, 어류의 포획량이 늘어난다고 하여 기근을 해결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미 뭐라도 해야 했으며, 빨라야 했다.
되돌아보면 기근 초기 구황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여 얼마나 크게 후회하였던가.
부랴부랴 집행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백성들의 질서 없는 움직임으로 무엇 하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그럴 시간은 지났다.
곧장 말했다.
“당장 시행하게. 청천강의 어류를 몽땅 다 포획하란 말일세.”
“예. 영감. 그리하겠습니다.”
안주 목사가 숨을 내쉴 때였다.
관청의 외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여, 영감.”
“무슨 일인가?!”
불안함에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사족들이었다.
의외였다.
아니…… 반가웠다.
개성부의 기근을 해결한 사족의 일화를 모를 수가 없다.
어쩌면……?
이들도……?
묘한 기대감이 거세게 치솟았다.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며 물었다.
“어찌 오셨나.”
“영감. 소생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하였습니다.”
“저, 정말인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아, 아닐세. 어찌 그리도 겸양을 떠는가.”
수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족이 기근 극복에 결합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이는 무엇보다 든든한 우군의 등장을 의미하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안주 목사는 진심으로 기뻤다.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자, 자네들은 뭐 하는가? 당장 백성들을 불러오게! 어딘가에서 굶주리고 있을 우리 백성을 모두 불러오게!”
“그리하겠습니다! 영감.”
그러나 이미 많은 백성이 산과 들로 떠났다.
이를 모를 수가 없으나 누구도 언급하지는 않았다.
기근 이래 처음으로 웃음꽃이 만발한 이 순간을 잠시라도 즐기고 싶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러고 싶었다.
그저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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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평양부.
관청은 소란스러웠다.
많은 백성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관리와 병졸은 철저하게 백성을 통제하며 질서를 유지하였다.
평소보다 더 엄격하였다.
이러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부로부터 구휼미가 당도하여 이를 나누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묘한 분위기였다.
엄숙하였으나 생기가 있었고, 기대가 느껴졌으나 불안함도 감돌았다.
이 중에서 백성들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바로 불안함이었다.
결국, 한 명이 나섰다.
“나리. 정말 모두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일세. 넉넉하지 않을지라도 빠짐없이 나눌 것이니 차분하게 기다리게.”
평양부 사족까지 지원하였으나 구휼미의 수량은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쩌면 고작 한 끼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근이라는 건 그러했다.
“저, 정말입니까?”
여러 감정이 담긴 물음이었다.
조심스레 눈치까지 살핀다.
관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 사람도. 어디 속고만 살았나?”
“그,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아. 영감께서도 끼니를 챙기지 않으시네. 왜 그러시겠나? 한 명이라도 더 구호하시려는 넓은 마음이시네. 알겠나? 그러니 믿게.”
“하면 영감께서는 아예 안 드십니까.”
“뭐…… 솔잎이나 칡 정도는 드신다네.”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평양 부사다.
그러한데 쌀을 모두 백성에게 나누고 구황작물로만 버틴다고 하니 어찌 황망하고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껴야 할 것이야. 기근이 얼마나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고, 구휼미는 원래 기대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분위기는 맑았다.
그리고 관리는 은근슬쩍 평양 부사에 대한 말을 보탰다.
“이보게. 다른 곳은 난리도 아닐세. 그래도 이곳은 영감께서 조기에 구황작물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어 살 만한 것일세.”
“소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토록 어려운 시절일수록 백성들이 목민관을 믿고 따라야 하는 법이다.
믿음이 흩어지면 민심도 흩어지고 대규모 유민이 발생할 뿐이었다.
지금도 대략적이나마 파악해보니 아직은 문제가 없다.
그러니 이만하면 됐다.
관리는 눈치껏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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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삭주부.
도호부사는 쉬지 않고 문서를 면밀하게 살폈다.
삭주부의 모든 상황이 빼곡하게 나열된 문서로 검토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나태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음.”
기근의 강도가 생각보다 강하였기에 어려움이 컸다.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였으나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았다.
“영감…….”
막 모습을 보인 관리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침울하였다.
도호부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9명이 아사하였습니다.”
“…….”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매장하겠습니다.”
“……유가족은 어찌하고 있나.”
“그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록해두게. 이 난리가 끝나면 그들의 생계를 챙기고 넉넉하게 위로할 것이니.”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가보게.”
“음……. 그리고 영감.”
나가려던 관리가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했다.
도호부사는 빤히 쳐다봤다.
“아사를 모두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네.”
“영감의 선정을 모르는 백성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 마십시오.”
“이보게.”
“예.”
“이만하면 잘 방비했다고 여기는 순간, 더 많은 백성은 죽게 될 것이네.”
“…….”
“단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백성의 죽음을 괴로워하지 않는 순간 1,000명의 목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는 걸세.”
관리는 말문이 막혔다.
도호부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 나는 이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배운 참된 관리의 모습이니까. 어리석었던 시절에는 진심을 몰랐기에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을 뿐이야.”
누구를 이르는 말인지 묻거나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관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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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몰랐을 백성의 수는 더 많았다.
어쩌면 천운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천운은 따로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
“정말로 감사합니다.”
“…….”
“이미 죽었을 몸이거늘 살았습니다.”
“예. 덕분에 이놈의 아들이 살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무사하셨습니다.”
……
“우리 식솔을 모두 구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눈물을 보이며 병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가득 담긴 그들의 눈물에 병졸들은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조선을 지키는 최고의 강군이라고요.”
“늘 백성을 도와준다고요.”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여러 말에 병졸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조금 전과 다른 건 그들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모두의 머릿속으로 다양한 기억이 스쳤을 것이다.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예. 도성에 백성을 괴롭히며 패악질하는 무리가 있다던데, 그들이었다면 어찌 소인들을 구하였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훈련도감이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이 넘치는 백성들의 말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병졸들은 누구도, 어떻게도 화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소인이 훈련도감의 보인입니다.”
“하하하.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이들이었다.
“보람이 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병졸들은 그저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래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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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국고에 관리들의 녹봉을 차곡차곡 비축해놓았을 수는 없다.
그러니 당장 쌀을 꺼내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금의 결의가 현실로 구현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
나는 궐밖에 섰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오가는 관리들을 바라봤을 뿐이다.
“…….”
누구도 부산스럽게 떠들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을 간단하게 주고받았을 뿐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자세히 봤다.
더 오래 봤다.
관리들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눈에 담긴 결심은 확고하였다.
걸음에는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꽉 쥔 주먹은 흔들리지 않을 신념을 담아냈다.
그래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오늘 저들의 살신성인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찰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러했다.
너무나도 슬프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는 절대 이를 하나의 장면으로만 남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살신성인을 기어이 이 나라 조선이 새기게 할 것이다.
그렇게 중대본으로 향할 때였다.
나는 다시 이 땅의 사대부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기회를 얻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다가왔다.
빈손이었으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묘한 건 그들의 가장 앞에 이립의 사대부가 있었는데 성균관 유생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외쳤다.
“전하!”
모든 시선이 쏠렸다.
나는 주목을 받은 이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예조판서 윤선거의 아들.
“평안도 백성의 군포를 면제하여 주시옵소서!”
원 역사 소론의 초대 영수.
“이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윤증이었다.
그가 지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위정척사파의 수장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