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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23화 (123/298)

123화 희망은 있다(1)

냉정하게 살필 때 1만여 명의 기민을 유발한 평안도의 기근을 어찌할 역량은 없다.

그러나 도성으로 다가오는 유민은 감당해내야 한다.

만일 이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위생국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도성 내의 병자를 살피는 기구로 미약하게 시작하였으나 현재로는 중대본의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로 위상이 커졌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어쩌면 중대본의 재해 방비 역량과 직결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여, 나와 허목은 도성 밖으로 나왔다.

나오긴 나왔는데 상황을 보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넉넉하게 보더라도 100명을 넘지 않는 규모였다.

예상 인원보다 턱없이 적기에 실소를 머금은 게 아니었다.

한성부 관리의 눈부신 해명에 정말 눈살이 찌푸려졌기 때문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크게 무리를 지어 이동하지 않았기에 파악이 어려웠습니다.”

말을 버벅대는 한성부의 관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 범벅이었다.

얼마나 뛰어다녔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으나, 공사는 명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이미 우리는 유민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또 이런 일이 생기자 한성부까지 중대본에서 담당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순간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데 도성의 행정까지 보태서 괴로움을 자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쨌거나 만일 이대로라면 한성부는 인원 파악을 완벽하게 실패한 것이다.

그나마 욕이 나오지 않는 건 전과 달리 예상 인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작은 안도에 불과하고,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했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애초 500여 명이라고 하였네. 어찌하여 이리되었는지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네만.”

“송구합니다. 무리가 아닌지라 파악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자네 그 말은 조금 전에 이미 했네만.”

“소, 송구합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삼삼오오 모여서 움직이는데 어찌 규모를 정확하게 산정할 수 있겠나. 하지만, 도성으로 다가오는 인원이라고 하면 필시 규모화가 이뤄졌고 이를 파악하였다는 걸 의미하지 않겠나? 설마 대충 인원을 파악하였는데, 일전의 실수가 떠올라서 부풀리기라도 했나?”

“그것이…….”

맙소사.

정말 부풀렸다고?

무려 5배나……?

정확한 상황 파악이 필요하였기에 매섭게 노려봐줬다.

“대, 대감.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보는 사람이 아닐세. 보고를 받고 판단해야 한다네. 한데, 자네가 이러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소, 송구합니다.”

“그만 송구했으면 좋겠네만.”

“잘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잘해보려고 했다니?”

“애초 눈에 띄는 무리는 100여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전의 실수도 있기에 더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검토하였습니다. 결과 삼삼오오 움직이는 유민을 고려하니 500여 명이 되었습니다. 이는 최소치입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한성부에서 소규모로 움직이는 유민을 무슨 수로 파악하였냐고 묻는 걸세. 이걸 정확하게 해명하지 못하면 자네들은 과거의 실수를 상기하여 의도적으로 보고를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대감. 실은 반계 선생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유형원이……?

눈을 잠시 껌뻑거렸다.

유형원의 능력을 떠나서 뉴타운 건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대체 언제 한성부의 일을 거들었는지 본질적인 의문에 휩싸일 때였다.

“그렇군. 담계가 거들었나?”

“그렇습니다.”

“담계……?”

반계와 무척이나 비슷한 담계라는 호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하였다.

일찍이 삼고초려를 할 때 주막에 있던 유형원의 제자, 담계 김서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막 10세가 넘었을 그 아이가 무려 한성부의 일에 깊게 관여했다는 것이다.

황당해서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렇지. 그 아이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

허목이 이런다.

그래서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소인도 깜짝 놀랐습니다. 대뜸 지도를 펼치더니 삼삼오오 다가올 유민의 수를 예측하는데, 보고 있노라니 말문이 절로 막히더군요.”

“잠시. 그게 무슨 말인가?”

“아. 대감. 들어보십시오. 글쎄. 그 아이가 평안도에서 올라온 여러 장계의 내용을 읽으면서…….”

들을수록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니까 김서경이 도성과 가까운 평안도의 군현 인구를 숙지한 뒤 장계의 내용을 바탕으로 발생 가능한 유민의 수를 추산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도성과의 거리와 유민의 이동 거리까지 고려하여, 사방에서 산재하여 다가올 인원을 최소 500여 명으로 규정하였다는 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정말이지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도 안 나왔다.

“담계는 역법의 기초이론으로 불리는 기삼백(朞三百)을 홀로 풀어낸 아이외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숫자에 관하여서는 반계조차 한 수 물릴 정도였으니, 유민의 수를 나름대로 파악한 게 아닌가 싶소.”

대충 수학 천재라는 뜻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으나 믿는 사람이 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허목이 믿고 있다.

또, 한편으로 나도 모르게 정말 유민이 500여 명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만일 그리된다면 경신 대기근과 싸워야 할 중대본이 당대 최고의 수학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유민의 규모를 산정할 수 있는 수학 천재말이다.

하여, 나는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딱 다른 한성부의 관리가 달려왔다.

재빨리 물었다.

“유민이 다가오고 있나?”

“어, 어찌 아셨습니까?”

“몇 명인가?”

“대감. 10여 명의 유민이 더 다가오고 있습니다.”

“허.”

“어찌할까요?”

“그걸 왜 묻나?”

“합류시킬까요?”

“당연하지 않겠나?”

“송구합니다.”

고작 10명이 늘어난다고 하여 변하는 건 없다.

혀를 차면서 관리의 경직성을 타박하는 건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규모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감! 유민입니다.”

“몇 명인가?”

“대략 20여 명입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감!”

“몇 명인가?”

“10명이 조금 넘습니다.”

대규모로 다가오는 인원은 없었다.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20명 남짓이었다.

이렇게 쉬지 않고 보고가 이어졌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100여 명이었던 유민은 200여 명을 훌쩍 넘었다.

어쩌면 이러다가 정말 500여 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미친 기대를 할 때였다.

“허!”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시선을 끌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것이오?”

“아니…….”

“시끄럽소! 그냥 두면 탈이 나오! 지금 내가 내 몸을 걱정하고 있소?”

“내 몸이긴 하오만…….”

“알면 가만히 있으시오!”

이 많은 이들 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이, 바로 백광현이었다.

개성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그는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허 국장. 혹시 따로 가르침을 주고 있소?”

“그건 아니외다. 한데, 참으로 대단하오.”

“허 국장이 보기에도 그렇소?”

“물론이오. 사람이 거칠고 투박하긴 하지만 열정이 대단하고 병자를 살피는 마음은 진심이오. 저만한 실력과 열의를 겸비한 의원은 잘 없을 것이외다.”

진심이 가득한 칭찬이었다.

허목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백 의원은 여태껏 경험한 조선의 의원과는 다르오.”

“다르다니요?”

“탕약과 침만을 신뢰하는 이가 아니라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외과 의사라는 말이었고, 나 역시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약을 제조하는 능력과 침술이 제법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소.”

오늘따라 허목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찬사가 나왔다.

되돌아보면 그럴 만도 했다.

위생국의 책임자로서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지 가장 실용으로 사고할 것이니, 김서경과 백광현처럼 제3의 영역에서 두각을 보이는 이들의 성장이 기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허 국장.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소?”

“물론이외다. 모처럼 여유가 있으니 참으로 기쁘오.”

여유라고 하기도 우습지만 여유가 생겼다.

500여 명이 한 번에 집결하는 것과 100명부터 조금씩 늘어나는 건 너무나도 달랐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 정도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절망이 덮어진 조선의 산하였기에 고작 이 정도 여유조차 사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었다.

오늘 최종 집계는 300여 명이 넘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500여 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정신 나간 기대를 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사가로 돌아가도 무방하였으나 괜히 오늘은 도성 밖 유민 대피소에서 보내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달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으나 뭐 어떤가.

그저 걸었다.

뒷짐 쥐고 밤바람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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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은 진땀을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달조차 모습을 숨긴 밤이었기에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무엇 하나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한참을 주시하였고, 누구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다시 살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짧은 순간에 수차례나 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어떤 소리가 들릴까 봐 쥐 죽은 듯이 움직였다.

희한한 건 그의 손에 서책 한 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자를 읽기조차 어려운 어두운 밤이라는 걸 고려할 때 참으로 괴이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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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대처를 잘하더라도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부족일 수도 있고, 이미 수명이 다한 상태로 당도하였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라도 그러하였다.

자연스레 시체를 매장한 곳을 따로 두었는데, 걷다 보니 이곳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의 방향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

묘한 느낌이었다.

참으로 어두운 밤에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니, 보였다.

그저 짐승일까……?

아니었다.

분명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

아사자의 가족일까?

그리워 찾아왔을까?

나도 모르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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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눈에 온 힘을 다하여 시체를 조심스레 살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백광현의 얼굴은 묘할 정도의 희열이 담겼다.

“허…….”

환희에 찬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머지 한 손으로 가져온 서책을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부스럭!

인기척이 들렸고.

“!!!”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온몸이 경직됐다.

그리고

“자네…… 백 의원이 아닌가?”

익숙한 목소리에 백광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본부장 송시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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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하였으나 또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백광현이었으니 시체의 매장 상태를 다시 확인하러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이 밤중에도 위생을…….”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다가갈수록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였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어째서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더 괴이한 건 백광현의 행동거지가 절대 단순한 확인을 하려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개성부에서 나조차도 당황하게 하였던 당당한 패기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네 지금 뭐 하나……?”

“대, 대감…….”

다가갔다.

백광현이 벌떡 일어서더니 황급히 말했다.

“대, 대감.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분명 뭔가 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성큼 다가갔다.

백광현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지척에서 확인하니 시체는 매장의 흔적조차 없었다.

너무 멀쩡했다.

그런데 시체의 옆에는 칼이 있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 뭐하나……?”

“대, 대감.”

백광형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서책을 들고 있다.

본능적으로 뺏었다.

제목조차 없었다.

곧장 펼쳤다.

보이는 글자…… 아니, 딱 다섯 글자만 보였다.

[활인(活人)]

그리고

[전유형(全有亨)]

그 순간 송시열의 방대한 지식이 꿈틀거렸다.

-전유형은……

동시에 시선이 옮겨졌고

-해부학자다…….

해부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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