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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25화 (125/298)

125화 징조(徵兆) 그리고 새로운 길(1)

바쁘다.

너무 바쁜데 엄청나게 더 바빠야 할 일이 생겼다.

무려 북사(北使, 청나라 사신)께서 압록강을 넘으신 것이다.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청국의 사신이었기에 최고의 의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 조선으로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허. 북사라니…….”

허적의 목소리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입술까지 깨물며 이마를 짓누르는 그의 행동에서는 불편함까지 느껴졌다.

너무 이해할 수 있었다.

평시라도 청나라 사신의 입에 들어갈 음식이 아까운데, 기근의 압박이 심한 지금은 더 말해 뭐하겠는가.

조선의 관리로서는 정말 짜증이 솟구칠 만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조선인‘만’ 그러했다.

슬쩍 시선을 돌려봤는데 송준길과 윤선거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드디어 거사(擧事)를 결행할 때가 되었으니 피가 끓어오를 것이다.

“이는 우리 예조에서 탈 없이 해내겠소. 그러니 호판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윤선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허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엄중한 시국에 공이 예조의 수장이니 너무나도 든든하오. 나는 예판만 믿겠소.”

“믿음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훈훈한 대화로 오늘의 논의를 끝냈다.

그렇다면 이제 사전 논의를 해야 할 때다.

모두 퇴청할 때 나는 자연스레 흐르듯 윤선거를 불렀다.

“미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뜨거운 일렁임이 느껴졌다.

윤선거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암.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말하지.”

“응?”

“먼저 가보겠네.”

“미, 미촌?”

당황하여 황급히 불렀으나 윤선거는 그냥 갔다.

“…….”

이렇게 그냥 가면 우리의 계획은?

사전에 치밀하게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송준길이 보였다.

하소연이라고 하였으나

“또 보지.”

그도 그냥 가버렸다.

“…….”

혼자 남아버렸다.

입맛을 다시며 퇴청한 뒤 혹시나 해서 윤선거의 사가를 가봤으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릴까 하다가, 예조의 업무에 녹초가 되어서 돌아올 게 뻔해서 물러섰다.

내일 동이 트면 오늘의 수모는 반드시 따지고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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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의 사가를 방문한 윤선거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의 중간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잘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송준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즐겁나?”

“하하하. 우암의 표정을 보셨지 않습니까. 그 민망함이 너무 강하게 전달되어 같이 민망해질 뻔했습니다. 어찌 민망함을 그토록 나누고 싶어 하던지. 서둘러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네가 이렇게 짓궂은지는 요즘 알았네. 어찌 평생 숨기고 살았는가.”

“하하하.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작에 이리 살았어야 했습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우암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자네와 나의 깊은 뜻을 모를 것이네.”

“알면 우암 송시열이 아니지요. 아마 지금쯤 노여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고요.”

“하하하.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암에게 너무 많은 짐을 줄 수는 없으니 말일세.”

“예. 우리가 거들어야지요. 우암은 이미 서인의 영수가 아닌 조정의 중심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송준길과 윤선거가 볼 때 서인과 산림의 영수로서의 송시열은 이미 없었다.

그는 지금 중대본을 중심으로 사문난적, 위정척사 그리고 원리주의를 묶어 세운 조정의 기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데 서인 영수의 역할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판단이었기에 이번 논의에서는 아예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송준길은 익살스럽게 말했다.

“서인의 영수라는 사람이 허구한 날 일만 펼치고, 서인을 다독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나라도 해야지.”

“괜한 말씀은 넣으십시오. 누가 들으면 대감께서는 서인만을 대변한다고 오해합니다.”

“틀렸나? 우리 서인의 명예를 위해서 이러는 것일세. 후대가 우리 서인이 위대한 길을 걸었다고 평가해주길 바라서 말이야.”

“하하하.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대감이 아니라면 누가 이토록 담대한 길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원 사람도. 그나저나 자네 아들의 활약이 대단하더군. 단번에 위정척사파의 수장이 되었지 않은가.”

“끙…….”

윤선거는 괜히 시선을 슬며시 돌렸다.

타인으로부터 아들의 칭찬을 받는 건 늘 좋은 일이다.

그 타인이 송준길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민망했다.

윤선거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괜한 말을 툭 던지듯 꺼냈다.

“아비가 사문난적인데 아들은 위정척사라니요. 시간 내어 크게 혼을 낼 생각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넣어두게. 그리고, 차고 넘치는 아들일세.”

“부끄럽습니다. 한데, 대감.”

“원 사람도. 아들 칭찬은 길게 들어야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말을 돌리나?”

“하하하…….”

“되었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청국의 사신들이 이번에는 어떤 억지를 부려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따지듯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에 탓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요.”

“억지가 아니라 명백한 우리의 탓이 있다?”

“청국에 끌려갔던 우리 조선인 즉 주회인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은 청국과 정축약조(丁丑約條)를 체결하였다.

그중 가장 크게 외교적 문제로 불거지는 건 바로 주회인이었다.

[군중의 포로로 잡혀있는 자가 압록강을 건넌 후에 만약 도망쳐 돌아온다면, 잡아서 본주(本主)에게 돌려보내라. 만약 속환하고자 하면 본주의 편의를 듣고 따라라. 대개 우리 병사가 죽기로 싸워 부획(俘獲)한 사람을, 너는 나중에 차마 결박해 보낼 수 없다는 것으로 변명하지 말라.]

한마디로 조선인 포로가 도주하여 압록강을 넘더라도 즉시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상기한 송준길은 한숨을 쉬었다.

“어찌할 생각인가.”

“돌려보내야지요. 그래야만 구걸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방책은 있는가?”

“우리가 내어줄 게 있습니다. 청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그게 무엇인가.”

“조선의 자존심이지요.”

“…….”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없다.

이는 참으로 단호하고 드높은 결의였다.

윤선거의 단호한 말에 송준길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시겠는가.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네를 탄핵하고 자네의 가문을 싸잡아 욕할 것이네.”

“그 정도면 다행이지요.”

“…….”

“대감께서 괜히 제 아들을 언급하셨겠습니까.”

“…….”

“어쩌면 아들로부터 탄핵당할 수도 있으니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야지요.”

송준길은 더 말을 보탤 수 없었다.

시선을 돌려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저 이 나라의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윤선거의 결심이 너무나도 슬펐다.

대단하였으나 슬펐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감.”

“…….”

“이리 말해야 할 거 같습니다.”

“…….”

“능히…….”

윤선거의 어깨가 송준길의 어깨와 맞닿았다.

그리고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해볼 만합니다.”

괴로웠으나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송준길은 힘겹게 말했다.

“무운을 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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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西海).

조기를 잡는 닻배의 규모는 상당했다.

닻배가 이동하는 곳은 연안이 아닌 제법 먼 바다였다.

그렇게 서서히 이동한 배는 조기가 많이 모이는 어장에 당도했다.

그러다가 조기 떼가 몰려오는 때를 기다리다가 배에 실어 놓은 그물을 바다에 펼쳐 조기를 잡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나…….”

“조기 떼가 몰려와야지.”

“그런데 중선망? 이거 효과가 괜찮겠지?”

“다른 배 소식 못 들었나? 바다에 있는 조기란 조기는 다 잡았다더라고.”

“오. 그래?”

중선망은 중대본에서 윤선도가 발의한 방식이었으며 중선망 어선은 최소 7명, 최대 30명이 넘는 어민이 승선해야 했다.

실제로 닻배에는 30여 명의 어민이 그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막연하게 기다리던 어민들이 그물을 던지며 끌어 올렸다.

그런데 모두 흥얼거리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충 눈으로 봐도 엄청난 수의 조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이게 태평성대가 아니면 뭐가 태평성대겠나!”

“암! 세상이 오늘부터 살기 좋아졌어!”

어민들은 흥을 감추지 못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조선 서해의 바다는 참으로 흥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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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海州).

그물을 손질하는 어민들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또,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도 잔뜩 걸려 있었다.

기근으로 인접한 평안도 전체에서 1만여 명의 기민이 발생한 시기라는 걸 고려할 때 참으로 이례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최근 어류의 포획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그물이었다.

얼마 전 관청으로부터 새로운 그물 제조법을 전해 들었는데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민들의 목소리에는 흥미 가득했고, 콧노래까지 여기저기서 들렸다.

풍요로운 분위기는 여유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어른 사이에서 뛰어놀던 아이 중 한 명이 해맑게 웃으면서 외쳤다.

“아버지. 이 물고기들이 대구(大口)라고 하셨어요?”

“하하하. 대구가 아니라 왜대구라고 했잖느냐.”

“대구와 왜대구가 달라요?”

“음…….”

아들의 물음이 아버지는 웃으면서 자연스레 바다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던 노인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네 아비는 바쁘니 내가 말해주랴?”

“그럼요! 어서 말해줘요!”

“원래 대구는 우리나라의 동해와 남해에서만 살던 놈들이었지.”

“그래요? 그러면 언제 여기로 온 거예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서 전해 들었으니까.”

“아.”

“나도 너만 할 때 어른들에게 들었단다. 동해의 대구는 이놈들보다 크다고. 그래서 자잘한 우리 바다의 대구를 왜대구라고 부르지.”

“아.”

간단하고 투박한 설명이었으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새 모여든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러면 왜대구가 오기 전에는 원래 무슨 물고기를 잡았어요?”

“청어(靑魚)라는 물고기였지.”

“청어요?”

“너희는 잘 모를 거야. 이제는 보기 어려우니까.”

“청어는 그러면 어디로 갔어요?”

“풍문으로 들어보니 요동의 바다에서 많이 잡힌다고 하더구나. 물고기도 다 자기 살길이 있지 않겠느냐? 청어가 가니 왜대구가 온 것처럼.”

아이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신이 났는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맛을 보며 아주 짜지 않더냐?”

“예. 너무 짜요.”

“나 어릴 때는 없어서 못 먹었어. 그러니 어른들이 주면 부지런히 먹어둬. 먹으면 기운을 북돋으니 참으로 좋으니까.”

“아.”

“특히, 창자와 비게는 맛이 더 좋고. 나 어릴 때는 정말 구경도 못 해본 진미였지. 그러니 줄 때 그냥 먹어. 이 녀석들아.”

“…….”

“그리고…….”

노인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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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명천.

배를 탄 어민들은 눈을 껌뻑이며 바다를 쳐다만 봤다.

“저게 대체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생전 처음 접하는 광경에 어민들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는 그야말로 난생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바닷물과 물고기가 절반씩이었다.

이는 풍요로움 그 자체였으나, 어민들은 쉽사리 접하지 못한 물고기와 엄청난 수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평생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괴기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일단…….”

“그, 그러자고.”

어민들은 힘껏 그물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물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말 그대로 그물을 끌어 올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만선(滿船)은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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