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26화 (126/298)

126화 징조(徵兆) 그리고 새로운 길(2)

윤선거에게 버림받은 뒤 구시렁거리며 사가에 당도하였더니 방문객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방문객‘들’이었다.

바로 변승업과, 첫인상만 담백했던 김근행이었다.

두 사람은 그냥 봐도 기대감에 들뜬 상태였다.

처세로는 조선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이리도 감정을 보일 정도면, 청국 사신단과의 협상에 얼마나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뒤 가볍게 안부부터 물었다.

“잘 지냈는가?”

“대감 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대감의 덕입니다.”

“응?”

“소인은 상단의 일을 하면서 늘 이러한 꿈을 꾸었습니다. 조정의 중대 시책이 상업의 증진으로 연결되는 작금의 상황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그 과정에서 어떠한 부정도 없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경상도의 양잠업이 소인 덕분에 크게 증진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실 생각이시라면 미리 부끄럽습니다.”

“…….”

“그러나 소인 역시 이익을 창출하였습니다. 조정의 탁월한 시책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정말 첫인상만 담백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전보다 더 강력해졌구나.

진짜 이 나라에는 쉬운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 조정의 정책이 상업의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군.”

“대감. 하면, 이제 본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몸이 달아오른 변승업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말을 이었다.

“대감. 청국의 사신이 압록강을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조에서 협상 준비에 착수하였으니 일이 잘 진행될 것이네. 그러니 걱정은 마시게.”

“아.”

“왜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일러주지 않으십니까?”

“…….”

“송구합니다. 감히 조정의 일을 알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소인들도 발맞춰 대비하여야 하기에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

“대감……?”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변승업은 눈치를 살폈다.

담백하지 않은 김근행도 눈치껏 알아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나는 정말 진심으로 궁색했다.

이럴 때는 임기응변만이 살길이었다.

“이제 막 논의를 시작하였을 것이네. 초안도 나오지 않았거늘 자네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겠나.”

“아.”

“그 내용이라도 전할 수는 있겠으나 작게라도 자네들에게 혼란을 끼칠까 우려되어 함구하는 것이니 이해하게.”

“송구합니다. 대감. 소인들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괜찮네.”

“하면, 소인들의 뜻을 미리 전하는 건 어떠하십니까.”

김근행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 정도는 나쁘지 않다.

말은 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인가.”

“청국의 바다를 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 이거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군. 바다라.”

“대감. 제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연간 단 한 척이라도 좋습니다. 어찌 첫술에 배가 부르겠습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자네들이 정확하게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관건이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계획이 없다?”

“어차피 칼자루는 청국 사신의 손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칼자루를 확인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게 조선의 현실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청국과의 무역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청 사신단이 칼에 손이라도 대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예 그럴 의지가 없으니 칼자루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당장 두 상단으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건 기력 낭비에 불과했다.

아직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돌렸다.

“한데, 자네는 왜국과의 무역에 집중하지 않나?”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소인이 이리도 관심을 보이는 건 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무엇인가.”

“천하에서 가장 넓고 사람이 많이 살며 물산이 풍부한 청국과의 무역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군. 이런 게 우문현답이 아니겠는가.”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다.

본진이 동래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청나라다.

당연히 뛰어들고 싶을 것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의 의견은 잘 전달하겠네.”

“감사합니다. 대감.”

“기다리겠습니다. 대감.”

-----

변승업과 김근행의 제안을 윤선거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시급한 안건이 올라와서 미뤄졌다.

함경도 명천에서 올라온 장계였다.

“명천 바다에 새로운 어류가 나타났소.”

그랬다.

함경도 명천에서 지금껏 쉽사리 접하지 못한 어류가 등장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새로운 물고기의 등장 따위가 중대본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을 리는 없다.

일전에 윤선도가 발의한 어획량과 관련하였다고 할지라도 작금의 상황에서는 뒤로 미뤄도 될 일이었으나,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 언급되었기에 곧장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계에 의하면 어선이 나갈 때마다 만선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니 살피지 않을 수가 없소.”

“이 추세라면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될 수준이라고 하오.”

바로 엄청난 수였다.

기근과 싸우느라 온 힘을 다하는 우리로서는 지금껏 접하지 못하였던 물고기가 엄청난 무리를 이끌고 동해에 나타난 걸 절대 그냥 넘길 수가 없는 법이다.

어찌 크게 반기며 흥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청국 사신단이 국경을 넘은 이 엄중한 시국에 물고기 이야기를 하려고 모두 모인 것이었다.

“음…….”

윤선도가 슬며시 운을 띄웠다.

그는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기에 모두 집중했다.

그러자 윤선도는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명천의 토산에 무태어가 있소.”

“하면, 무태어요? 그런데 토산이라고 하면 어찌 어민들이 생소할 수가 있소?”

“……일단 들어보시오.”

“그리하리다.”

“태조 시절 명천의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진귀한 물고기를 잡아 군수에게 바쳤다는 말이 있소. 하여, 명천의 ‘명’과 어부의 성인 ‘태’를 더하여 명태라고 하였다고 하오.”

“명태……?”

“들으시오.”

“아.”

“……선왕 시절 강원도의 진상품인 대구알젓을 대신하여 명태알젓을 바친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소.”

“하면, 명태가 확실하오?”

“십중팔구 그러하오.”

“그렇다면 이미 아는 물고기인데 어찌하여 명천의 어부들은 그리도 호들갑이오?”

“말 그대로 평소 접하기 힘든 물고기였으니 그러하오. 또한, 명태라고 명칭도 민간에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오. 즉, 중요하지 않은 어류로 분류되었으니 그렇소.”

“한데, 갑자기 엄청난 수의 명태가 명천 바다에 나타났다는 것이구려.”

“그렇소.”

“그런데 무태어가 명태요?”

“알 수 없소. 이는 고증을 더 해봐야 하오.”

“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나의 질문에 새침하게 대꾸한 윤선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일찍이 서애 대감께서 남기신 징비록을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있소.”

“오. 서둘러 듣고 싶소. 아. 혹시 문서로 준비하신 건 없소?”

“방금 장계를 확인하여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는 것인데 어찌 문서가 있겠소?”

“송구하오.”

“……징비록에 의하면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서 한강에 이르렀다고 하오. 또한, 해주는 본래 청어가 났는데 근래 전혀 볼 수 없고, 요동의 바다로 이동하였다고 하오. 이때 요동의 사람들이 청어를 신어라고 했다고 하오.”

“…….”

“여러 문서에 의하면 산동과 요동의 바다에서는 청어를 잡는 그물이 많은데 무려 천만에 이른다고 하오.”

“…….”

“너무 많아 청어를 잡으면 소금에 절여 천 리 밖으로 팔기도 하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소.”

가끔 생각해보면 조선의 성리학자는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싶었다.

진짜 모르는 게 없다.

당장 눈앞의 윤선도만 하더라도 거의 물고기 백과사전 수준이지 않은가.

뇌의 용량이 어찌 되기에 지식이 쉬지 않고 나오는 걸까.

물론, 나 역시 송시열의 지식을 취하였으나 아쉽게도 정말 성리학만 잔뜩 있었다.

“되돌아보면 대구도 원래 동해와 남해에만 보였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해에도 나타났소. 이를 왜대구라고 하오.”

“그러고 보면 물고기들이 참으로 희한하지 않소이까. 알아서 살 만한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게 영락없는 사람이외다.”

“그렇소. 선생의 말씀대로 청어가 떠난 자리에 왜대구가 왔으니 참으로 신묘한 이치가 아닐 수 없소.”

“이는 필시 물고기의 터전이 바뀐 것이지요.”

여기저기서 물고기 찬사가 쏟아졌다.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는데 문뜩 뇌리를 스치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물고기의 터전이 변한 것이지요.

왜……?

어째서……?

자고로 생물은 이유 없이 터전을 옮기지 않는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일단 사람은 인문학적인 이유로 이사한다.

그러나 동물은 환경적인 요소가 전부다.

그러니까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인데…….

“…….”

그 순간 뒤통수가 둔기로 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어찌 이토록 미련할 수가 있는가.

경신 대기근의 원인은 기후의 변화로 인한 소빙하기의 도래였다.

한마디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이 1℃ 정도 떨어져서 생긴 대재앙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지구의 기후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변하겠는가.

전 지구적으로 순식간에 1℃의 변화가 생기겠는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신이 존재하여 지구를 냉방 시설에 가두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오랜 세월 차츰 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신 대기근은 일거에 올 수 없다.

조금씩 다가오는 것이다.

-물고기의 터전이 변한 것이지요.

맞다.

어류는 인간보다 기후 변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동해에서 발생한 어종의 교체가 이뤄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점차 기온이 내려가기에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 남하한 것이다.

윤선도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최소한 선조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니, 한반도의 바다에서 광범위하게 어류의 서식지가 변화했다는 뜻이다.

즉, 이미 오래 전 기후의 변화가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은 막연하게 생각한 경신 대기근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재앙인 경신 대기근의 공포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이 땅을 에워싸기 시작한 것이다.

손이 떨렸다.

진땀이 흘렀다.

두려웠다.

그런데

“오히려 잘된 일이오.”

윤선도의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명태의 수가 그토록 많다고 하니 어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외다.”

“…….”

멍했다.

솔로몬이 여기 있었다.

너무나도 명쾌한 말이었기에 그러했다.

진심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참에 어선을 잘 제조한다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만…….”

은근히 허적을 쳐다보며 재원의 조달까지 청하였다.

“이 문제는 조금만 더 상의하지요. 어선을 확충하는 건 좋으나 산적한 과제가 너무 많으니 쉽사리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끙.”

허적의 완곡한 답변에 윤선도는 한발 물러섰다.

두 사람의 건설적인 대화에 나의 어리석고 쓸데없는 걱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옳다.

어차피 올 재앙이었다.

하면, 필연적으로 생길 변화로 길을 모색하면 될 일이다.

동시에 스치는 윤선도의 말.

-산동과 요동의 바다에서는 청어를 잡는 그물이 많은데 무려 천만에 이른다고 하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

-청어를 잡으면 소금에 절여 천 리 밖으로 팔기도 하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소.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수량.

그리고 하나 더.

조선 최고의 거부(巨富)들이 내게 한 제안.

-청국의 바다를 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감. 제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연간 단 한 척이라도 좋습니다.

모든 것이 결합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됐다.

만일, 지금 내가 한 생각을 현실에 구현할 수만 있다면 조선은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경신 대기근과 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가 생기는 것이다.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윤선거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냥 웃었다.

고생은 윤선거가 할 것이니까.

내 머릿속으로 지배하는 아주 발칙한 생각.

바로 ‘조청 어업 협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