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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27화 (127/298)

127화 대청외교(大淸外交)(1)

하마터면 곧장 예조판서 윤선거에게 달려가서 조청 어업 협정을 제안할 뻔했다.

그런데 이는 가뜩이나 부담이 큰 윤선거에게 너무 많은 짐을 넘기는 행동이었다.

또, 나도 그간 보고 듣고 느낀 게 많다.

특히, 밑바닥 여론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대사헌 송준길에게 확실하게 배웠다.

일찍이 김근행이 말했다.

칼자루는 청국 사신의 손에 있으나, 이를 보고자 한다면 조선 조정부터 넘어야 한다고.

너무 맞는 말이다.

하여, 나는 과감하게 나섰다.

“선생.”

“서둘러 용건을 말씀하시오. 할 일이 태산이니 짧다면 더 환영이외다.”

역시 윤선도는 도입부터 까칠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로 나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조청 어업 협정을 중대본의 중대 안건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어업 증진의 주창자인 윤선도의 지지는 필수이며 역할은 압도적으로 중요하였으니, 더 물러설 수가 없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방긋 지으면서 말했다.

“선생. 어선이 많으면 명태를 더 많이 포획할 수 있지 않겠소?”

“허. 본부장.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이 엄중한 시국에 굳이 뻔한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방책이 있으신가 보오?”

“물론이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시간이 남았기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소.”

“…….”

“그런데 때마침 본부장이 찾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소이까.”

“…….”

이건 나 따라 하는 거잖아?

말투만 듣고 완전 거울인 줄 알았다.

어쨌든 굉장한 태세 전환이었다.

구름을 타는 듯 고고하고 뻣뻣한 성리학자 윤선도도 세상과 타협하고 말았구나.

물론, 이는 너무나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본격적으로 낚싯대를 던졌다.

“산동과 요동의 바다에서 청어를 잡는 그물의 수량이 천만이라고 하셨소.”

“그랬소만.”

“심지어 청어가 너무 많아서 버리기도 하고, 버리다 못해 소금에 절여 천 리 밖으로 팔기도 하는데 이조차도 어렵다고요?”

“음. 대충 비슷하게 말한 것 같소만. 한데, 어찌하여 우리 명태가 아닌 청국의 청어를 언급하시오?”

“아. 명천의 어선은 내가 알아서 마련해주겠소.”

“뭐요……?”

시원한 공약을 던졌는데 윤선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어쩌면 조만간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굉장한 속도로 치솟았다.

하여, 다시 선수를 취했다.

“물론 조건이 있소.”

“필시 청국의 청어를 언급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오.”

“바로 그렇소. 선생. 생각해 보시오. 우리 어선이 청국의 바다에서 청어를 포획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나의 담대한 제안에 윤선도는 헛웃음을 지었다.

급기야 가자미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하려고 엄중한 시기에 나를 붙잡으셨소?”

“뭐가 가당치도 않소이까?”

“하! 청국은…….”

기어이 고함을 지른 윤선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단전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 게 분명했다.

나는 재빠르게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정확하게 말씀하시오. 청국의 바다에서 나는 청어는 쳐다도 보기 싫은 것이오? 아니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이오?”

“내가 비록 청국이라고 하면 치가 떨리는 사람일지라도, 그토록 사리 분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외다. 당연히 후자요.”

“한데, 왜 반대하시오?”

“반대? 본부장.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청이 제 바다를 우리에게 내어 줄 리도 없거늘 이를 언급하니 화가 날 뿐이외다.”

“하면, 이리 묻지요. 가능하면 어쩌겠소?”

“…….”

“왜 답변이 없소? 조금 전에 한 물음에 대한 답이 이토록 오래 걸리오?”

“하면, 우리는 영토라도 내어줄 생각이시오?”

“당연히 우리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오. 취하기만 할 것이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물론이오.”

확신에 찬 나의 말은 윤선도의 이성을 제자리로 돌렸다.

삐딱하던 자세도 금세 올바르게 자리 잡았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오?”

“동의만 해주시오.”

“하면, 어선은 어찌 확보할 수 있소?”

“내가 역관 두 명을 아는데, 조선 최고의 거부들이외다. 그들에게 잘 말해보려고 하오.”

“최선을 다해 동의하리다.”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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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를 설득하였으니 다음 산맥은 누가 뭐라고 해도 허적이었다.

중대본의 실무를 책임지는 허적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이 일은 시작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찾아왔는데,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다.

“휴…….”

허적은 사람이 왔는데도 문서와 씨름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마치 나를 보고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나도 강렬하여 민망할 정도였다.

“호판……?”

“휴. 훈련도감이 운송해온 10만 석의 군량 말이외다.”

“아. 그렇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소?”

“도성 밖의 유민에게 6천여 석의 구휼미를 전하였소. 정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수량이 필요하니 말이외다.”

“하면, 평안도는 어찌 되오? 그곳의 기민도 구휼해야 하지 않소이까.”

“족히 5만여 석은 사용될 예정이오.”

“……5만여 석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겨우 마련한 군량 10만 석의 6할을 일거에 사용하게 되었으니 어찌 근심이 크지 않겠소이까.”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아서 온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퇴각하고 싶었다.

“본부장도 들으셨을 것이오. 경상도에서도 기민이 발생하였소.”

“…….”

“그 규모가 이미 수천을 넘어서고 있으니 대체 어찌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소이다.”

근심이 땅을 뚫고 걱정이 하늘을 찔렀다.

쓰게 웃으면서 보태듯이 말했다.

“구휼미를 보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알지요. 보내야지요. 백성이 굶는데 어찌 쌀을 아끼겠소. 한데, 그 뒤는 어쩌오?”

“…….”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소. 소폭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기근과 싸울 동력을 갖추지는 못하오. 나라고 하여 명태 어업을 확대하는 것이 방편이라는 걸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더는 재원이 없소. 참으로 답답하오.”

“호판. 해서, 긴히 할 말이 있소.”

“평안도와 경상도로 구휼미는 또 어찌 운송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오. 너무나도 답답하오.”

응……?

이건 기회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절대 빌드업으로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군량 운송은 훈련도감에 맡기면 될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

“진심이오?”

“이미 전례가 있는데 안 될 건 뭐가 있소?”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시면 안 될 건 없겠지요. 하지만…….”

크게 티 내지는 않으나 내심 반기는 듯하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보였다.

대충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대장은 내 선에서 잘 설득할 수 있소.”

“음.”

“또, 전처럼 시일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요.”

“그렇소. 그런데 정작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은 따로 있소.”

“무슨 말씀이시오?”

“기근과 싸울 강력한 무기가 있소. 정책이나 개혁도 아니오.”

“무엇이오? 서둘러 말씀하시오.”

왜인지 허적도 내 말투를 따라 하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영 찝찝하였으나 따지고 할 일도 아니다.

목을 조금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청국의 바다에서 청어를 포획하는 것이외다.”

“참으로 좋은 의견이오.”

“오. 하면…….”

“가보시오. 바쁘니까.”

“아.”

“썩 물러나시오.”

“호판.”

다급하게 불렀으나 허적이 눈을 부라렸다.

온건한 성정의 인물이 이리 나올 때는 물러나는 게 옳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냉큼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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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허적을 설득하지 못하였으나, 대사(大事)란 원래 쉽지 않은 법이다.

나는 조청 어업 협정이야말로 조선의 비기라고 확신하였기에 절대 멈추지 않았다.

“본부장.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시오?”

“더 바쁜 일이 있으니 찾아오지 않았겠소?”

“허…….”

진땀을 흘리며 유민들을 살피던 허목은 한숨을 쉬면서 나를 따라왔다.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용건만 간단하게 전하라는 의사를 표출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자리에 앉으며 허목에게도 앉기를 권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 것이오?”

“청국의 바다에 우리 어선을 보내고자 하오.”

“…….”

“그 넓은 바다에서 청어를 포획해올 수만 있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열과 성을 다하여 설명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허목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북벌하자고 하시오.”

“아니, 허 국장. 대관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앉아서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비슷하지 않겠소?”

“…….”

“혹시 아오? 악에 받친 우리 백성이 기어이 요동을 점령할지도.”

“…….”

아니, 뭘 이렇게까지 말해?

냉소적인 허목의 말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허적은 실패하였으나 허목은 설득해야 했다.

“다른 걸 바라지는 않소. 그저 동의만 해주시오.”

“설마 진심이오?”

“여태껏 뭘 들으셨소?”

“본론으로 넘어가기 위한 서론이라고만 여겼소.”

“아니오. 이게 본론이오.”

“허. 대체 무슨 수로 청국의 바다에서 우리가 그물을 던지오?”

“그것이 바로 외교의 묘미(妙味)지요.”

“…….”

가볍게 대꾸하던 허목은 금세 심각해졌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무엇을 내주는 것이오?”

“내줄 게 있기는 하오?”

“청국이 언제 그런 걸 생각하고 내어달라고 하였소?”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오.”

“허. 그게 가능하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이오. 무조건 가능하오.”

“…….”

“우리는 그저 내어주지 않을 뿐이니까.”

다시 물었다.

“동의만 해주시오.”

“정말 가능하오?”

“물론이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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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부담스러웠다.

내가 자리를 잘못 찾아온 게 분명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대감.”

무려 윤휴였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진짜 뜨겁고 부담스러웠다.

“소생이 힘을 보탤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네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네만.”

“어선으로 위장하여 청국을 타격할 계획을 수립하셨습니다. 어찌 소생이 지켜만 보겠습니까.”

허목의 북벌은 그저 농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완전 진심이다.

정말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어렵지만 능히 해볼 만한 계책입니다. 세세한 계획은 어찌 됩니까.”

“…….”

“일러주면 소생이 곧장 전하께 청하겠습니다.”

뜨겁다.

그래서 머릿속도 뜨거울까?

그러니 이성을 잃은 것일까?

나라도 이성을 꽉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을 내렸다.

윤휴와 더 논의하는 건 시간 낭비다.

“백호.”

“예. 대감.”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허. 대감. 어찌…….”

“최소한의 군량을 확보해야 하니 양잠업에 더 박차를 가하게. 이게 더 중요하지 않나?”

“물론입니다. 최고의 성과를 내겠습니다.”

그래.

그거라도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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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

괜히 당대 최고의 천재가 아니었다.

사고방식이 너무 훌륭했다.

“그물과 어선부터 확보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저돌적인 자세와 관점.

너무 훌륭하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런 건 전혀 걱정하지 말게. 마음만 먹으면 수백 척의 어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인물들이 아닌가.”

“하면, 어선의 운용은 상단에 맡기실 겁니까? 아니면, 조정에서 운용할 겁니까?”

“음. 상단의 재력으로 건조할 건데 조정이 좌지우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물론 기본적인 관할은 해야겠지만.”

“하면, 그들이 가져올 어류는 어찌 받아내실 겁니까.”

“아. 적당한 광산을 몇 개 내어주면 될 것일세. 방치한 곳이 많으니까.”

“참으로 탁월합니다. 조선이 나아가려면 광산의 개발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역을 동원하여 광산을 어찌할 여력은 내기 어렵지요. 하지만, 상단이 이를 도맡아 한다면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니까 본질적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어주며 흡족함을 숨기지 못하는 유형원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번 일이 성사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군.”

“이상하군요. 이를 언급한 건 대감이십니다만.”

“음. 그렇게 대꾸하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일세.”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기어이 방편을 마련해야지요. 성사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군.”

유형원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위정척사와 원리주의의 움직임에 따라서 명운이 갈리겠군요.”

맞는 말이었다.

박세당 그리고 윤증.

정말 많이 커버렸다.

“그들을 따로 설득하실 겁니까?”

“누군가는 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군요.”

중대본의 여론 정리는 이만하면 됐다.

이제 남은 건 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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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사신단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소식에 윤선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주회인의 문제를 논하러 온 사신단이기에 우호적일 수 없다는 건 각오하고 있었으나, 전혀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뇌물을 과하게 요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불편함이 가득한 박세당의 말에 윤선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 사신단은 기근으로 뇌물을 준비하지 못한 조선의 목민관들을 핍박하였다.

“예조의 수장으로서 각오는 하였으나,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군.”

“무례한 이들의 패악질에 불과합니다. 소생은 고작 저런 이들로 인하여 대감께서 탈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고작 저런 이들이라…….”

“그렇습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보고도 뇌물을 요구하는 무리입니다. 예와 법도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청국 사신단의 억지와 패악질을 들었기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조판서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업무의 영역에 불과했다.

딱 이 정도였다.

그들을 비위를 맞추며 협상을 잘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원리주의를 주창하여 성리학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낸 박세당조차 이토록 고루한 말을 서슴없이 한다.

성공적인 대청외교로 난국을 타개해야 할 엄중한 시국이었기에 속이 체한 듯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애써 넘기고자 하여도 씻어 내려가지 않는 갑갑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밀어내고자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 내뱉듯 말을 꺼냈다.

“그게 현실일세.”

“예……?”

“우리 사대부들은 아주 큰 착각을 하며 살고 있어. 우리는 저들의 번국(藩國)이 아니라는 착각 말일세. 아닐지도 않을까가 아니라, 아예 아니라고 확신을 한다는 말이네.”

“대감. 송구하지만 청국이 대국이라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대부는 없습니다.”

“막연하게 그리 여길 뿐이지. 우리와는 무관한 중원의 주인 정도로 생각한다고 말하면 정확할까?”

윤선거는 굳이 ‘무관한’이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비록 전쟁에 패하여 사대하고 있으나 이를 표면에 불과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우리 조선은 언제라도 반청을 부르짖을 힘과 기세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은가.”

“대감. 비록 국세가 부족하여 머리를 조아렸으나, 청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닙니까. 어찌 와신상담(臥薪嘗膽)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나?”

“예……?”

“백성은 이미 청국을 잊었네. 백성은 이미 병자년의 한을 잊었어. 한데, 어찌하여 사대부만 와신상담을 꾀하나?”

“대감. 어찌 위정자와 백성의 길이 같겠습니까.”

“같아야지.”

“…….”

“백성은 하루를 버티기도 어려운데 위정자는 민심이 없는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게 옳은가?”

“…….”

“백 보 양보하여 백성은 우매하기에 위정자가 올바른 길을 앞서고 이끌어야 한다고 하겠네. 한데,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였나?”

“…….”

“와신상담(臥薪嘗膽). 방 천장에 쓰디쓴 곰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한 월왕 구천의 일화. 묻겠네. 조선의 위정자는 이리하였나? 하루가 다르게 강성해지는 청국을 이기고자 우리의 위정자는 어떤 혁신을 하였나?”

“…….”

“병자년의 치욕을 되새기며 소리소문없이 반청을 품으면 와신상담인가? 아니지. 이는 그저 일 할의 반성도 없는 고루한 위안에 불과해.”

윤선거의 말은 빠르지 않았다.

힘이 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듣고 있노라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현실을 일러주겠네.”

“…….”

“그들은 정축약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의 대신 따위는 치워버릴 힘을 가진 나라일세. 잊었나? 선왕 시절 우리는 청 사신단의 한 마디에 두 대신을 백마성으로 귀양 보냈네.”

“…….”

“주상께 죄를 물을 수도 있고.”

“대감.”

“부정하고 싶은가? 하면, 청 사신단이 주상께 죄를 묻고 대신의 처벌을 원하면 어찌 막아낼 수 있을지 대안을 제시해보게. 부끄럽게도 나는 방법이 없네.”

“…….”

박세당은 말문이 막혔다.

현실적으로 청의 요구를 어찌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적개심 따위가 아니라 사정을 봐달라며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

“대관절 자네들의 반청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

“일국을 이끌어 갈 이들이 이토록 허무맹랑한 사고에 빠져 있다면 이 나라의 내일은 어찌 담보할 수 있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윤선거의 말은 너무나도 지독한 현실이었다.

“일찍이 대명의 사신단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하여 반명을 부르짖은 이가 있던가. 그저 참고 또 참으면서 사대하였을 뿐이었네. 그것이 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찌하여 청국 사신단의 무도함에는 반청이 도출되는 것인가. 나는 우리 사대부들이 부디 어리석은 일에 기력을 낭비하고 몰두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차근하게 이어진 말이었으나 따가웠다.

박세당은 밀려오는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윤선거가 말한 사대부의 범위에서 자신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러했다.

“인지하게. 작금의 조선이 마주한 정세는 대명 외교처럼 명분의 다툼이 아니라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난무하는 대청 외교라는 걸.”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그들이 꾸짖으며 조아려야 하며, 채찍을 들면 꿇어야 하네. 그 와중에도 처지의 어려움을 전하여 너그러움을 구걸해야 해. 비굴할 정도로 생존을 도모해야 하네.”

윤선거는 시선을 올렸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겼다.

뭐라고 딱 특정할 수는 없으나 그러하였다.

“우리는 언제까지 굴종을 참아야 할지 자문하고 자답하였네.”

여전히 비슷한 속도와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원히.”

참으로 무섭고 씁쓸한 결론이었다.

“명은 중화의 질서를 세우고자 사대를 일렀으나 청은 달라. 그들과 우리의 시작은 전쟁과 굴욕이었으니까. 하여, 선대와는 달리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외교를 하며 고개를 숙여야 하네.”

박세당의 표정은 복잡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박세당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윤선거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며시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네.”

“…….”

박세당은 여전히 침묵했다.

윤선거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말도 전했고, 핵심도 정리됐다.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미촌. 여기 있었군. 서계, 자네도 있었나?”

환하기 웃으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송시열을 본 윤선거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워졌다.

본능적으로 불안함이 거세게 치밀어 오른 것이다.

이는 박세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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