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대청외교(大淸外交)(4)
국가 비상사태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이 말 외에 작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건 진짜 완벽한 비상사태였다.
“…….”
“…….”
“…….”
청국 사신단을 대놓고 도발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행위의 주체를 광인이라고 욕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의 군왕이다.
그래서 비상사태였고, 정국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누구도 섣부르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예조판서 윤선거를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는 사신연 이전에 군왕을 알현하였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하교하셨던 일이오.”
윤선거의 말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들어야 했다.
*****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박이 강했다.
조선의 척추까지 뽑을 기세였다.
그래서인지 용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압박이 참으로 대단하오. 용포가 떨릴 정도로.”
“전하. 신에게 저들을 설득할 방책이 있사옵니다.”
확신이 가득한 윤선거의 말에 이연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경이 해결하지 못하리라 여기지 않소.”
“신을 믿으시옵소서.”
“…….”
이연은 윤선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굳게 닫힌 입술과 단호한 표정.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꽉 쥐어진 주먹까지.
생사를 넘어선 대신의 결의가 느껴졌다.
“한데,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
“그 방책에 대해서 말이오.”
이연이 재차 물었으나 윤선거는 답하지 않았다.
명백한 불충이었으나 군주도, 신하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의 군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내 백성을 재해로부터 지키듯, 내 신하를 청국의 겁박에 노출하지 않겠소.”
흔들리지 않을 굳건함으로 버티던 윤선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유려하게 허공을 지배하는 용포는 언어의 구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군왕이 모든 책임을 진다면 저들이 감히 항거하지 못할 것이오.”
“저,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어찌…….”
“이는 나의 일이오.”
“전하. 신하로서 어찌 군주의 곤궁함을 지켜볼 수 있사옵니까.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곤궁하여 지킬 수 있다면 굴욕도 좋소.”
군왕의 결심이 날카롭고 선명했다.
설득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윤선거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하하. 우려하지 마시오. 설마 저들이 나를 폐위라도 시키겠소?”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감히 저들이 어찌 그런 언사를 입에 담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니 되었소.”
“하오나 전하. 저들은 예와 법도를 모르는 무리이옵니다.”
“알지요. 너무나도 잘 알지요.”
“감히 용상을 어찌할 수는 없으나, 옥체가 상할까 우려되옵니다.”
어떤 과정을 거칠 것이며, 무슨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청국의 압박은 조선의 군왕이라고 할지라도 벗어날 수 없다.
저들은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주고자 할 것이다.
작은 주저함도 보이지 않고 강행할 것이다.
하여, 어심이 아무리 단단할지라도 막아야 했다.
신하로서 절대 지켜볼 수 없다.
그러나
“해서, 신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뒤로 숨으라는 말이오?”
이연은 타협을 차단했다.
“나는 그럴 수 없소.”
“전하.”
“조선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군왕이 결정하며 옥새를 찍어 교지를 내리지요. 하여, 모든 결정을 왕이 하오. 틀렸소?”
답변의 끝에 어떤 결론이 다시 도출될지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답변하여야 했다.
윤선거는 눈을 질끈 감으며 쥐어짜듯 말했다.
“신이 어찌 부정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나라 조선은 오직 전하의 나라이옵니다.”
“그러니 책임도 왕에게 있소. 결정을 내가 하였으니 말이오.”
“…….”
“하여,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외다.”
“…….”
“그러니 경은 경의 일을 하시오.”
방책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길을 가자고 이를 뿐이었다.
군왕의 결의와 신뢰에 윤선거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잔잔한 웃음이 담긴 말이 포근하게 울렸다.
“나는 군왕으로서 모두를 지킬 것이외다.”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좌중은 무거워졌다.
윤선거가 차분하게 말했다.
“함구하라고 하셨소.”
“…….”
“필시 반대할 것이니 함구를 하교하셨소.”
그냥 퍽퍽했다.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미치도록 답답했다.
당장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너무 화가 났다.
“이 일로 청국은 전하께 대죄를 물어올 것이오.”
물론 청국이 이연을 폐위시킬 수는 없다.
이건 아예 어불성설이다.
이를 언급하는 순간 조선은 종묘사직을 걸고 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아마 막대한 벌금을 내는 수준으로 종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이연은 갖은 수모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또한, 그간 준비한 여러 실무 협상은 아예 논의조차 될 수 없다.
그래서 슬펐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일국의 군왕이 굴욕을 감내할지라도 무엇 하나 손에 올릴 결과조차 도출할 수 없다는 참담한 현실이 슬펐다.
조선의 왕이 무릎을 꿇는 사태가 발생할지라도 이는 그저 저들의 억지를 무마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숨쉬기도 괴로웠다.
그래서 고요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까.
원래 내가 준비한 묘안(妙案)은 있었다.
청국의 마음을 움직여 바다를 취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작금의 복잡한 정국을 해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서야 했다.
“내가…….”
그런데
“모두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윤선거가 내 말을 자르며 나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모두 각자의 자리를 지키세요.”
윤선거의 청아한 목소리가 중대본을 울렸다.
“예조에서 청국 사신단을 잘 달래겠소.”
“미촌. 나와 상의하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청이 있네.”
“말하게.”
“산림을 잘 다독여주게.”
“…….”
“이 엄중한 시국에 내부가 분열된다면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네. 그런데도 이를 다독이는 건 쉽지 않아. 하지만 자네는 할 수 있지 않은가. ”
윤선거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자네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이니 말일세.”
이만하면 윤선거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공론의 장에서 언급하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위험성이 있는 내용이 분명했다.
그러니 논의를 회피하고 내게 여론을 부탁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선거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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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하다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또, 찾아온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는 참으로 오만하고 방자했다.
노골적인 괄시였다.
그러나 윤선거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는 마치 이곳이 사가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윤선거를 쳐다본 청국인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놓고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청국의 언어였기에 윤선거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홀로 찻잔을 들이켜며 여유롭게 행동했다.
결국, 이일선이 버럭버럭하며 나섰다.
“대감. 뭐하십니까.”
“…….”
“소인의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
재차 말하였으나 윤선거로부터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빤히 쳐다는 보고 있다.
입가가 살짝 씰룩이는 것만 같다.
결국, 이일선의 안색이 와락 일그러졌다.
눈을 부라리더니 코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예조판서 대감이시니 소인의 미천한 신분이…….”
그런데
“……기다리고 있지 않소이까.”
윤선거의 입에서 무슨 말이 새어 나왔다.
말이 끊긴 이일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대감……. 지금 소인을 희롱하는 겁니까.”
“…….”
“소인의 말이 들리지…….”
“기다리고 있소.”
“…….”
윤선거는 여전히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를 들썩이기도 하였다.
“미안하오. 내가 낯가림이 심하여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낮소.”
“…….”
“그나저나 대인께서는 자리에 없소?”
“허. 지금껏 무엇을 살피셨습니까. 보면 모르겠습니까.”
“…….”
“소인에게 내용을 전하세요.”
“…….”
“소인의 말을 무시하는…….”
“그냥 기다린다고 했소.”
“…….”
이일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를 기세였다.
그런데
“차 맛이 참으로 좋소.”
윤선거가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이일선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으로 백만 가지 생각이 스쳤고 하나로 귀결됐다.
늘 같은 결론이었다.
“대감께서 소인의 신분이 미천하여…….”
“조선은 예와 법도를 아는 나라요.”
“그래서…….”
“나는 귀공을 청사의 일원으로 볼 뿐이오.”
“…….”
짧았다.
정확하게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또, 힘은 상당히 강력하였기에 오만방자한 이일선의 말문까지 막아버렸다.
그런데 윤선거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여유롭게 찻잔을 들이켰다.
애초 이일선의 반응 따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차향도 아주 좋소.”
“…….”
시를 읊듯 태연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윤선거의 여유로움이 점차 저변(底邊)을 넓힐 때였다.
약간의 소란과 함께 정사 뇌호가 모습을 보였다.
윤선거가 반색하며 예를 취하였다.
뇌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이일선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옮겼다.
“나가라십니다.”
“…….”
“대인의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나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아.”
“…….”
“생각을 해봤소.”
“예판 대감. 우리 대인의 말씀을…….”
“황은을 입을 수 있는 제안을 가져왔습니다.”
“…….”
“라고 전하게.”
손을 내저으며 조선의 역관에게 명했다.
이를 본 이일선은 눈이 커지더니 노발대발하며 호통쳤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놈은 당장 멈춰라.”
그러나
“잠시.”
뇌호가 흥미를 보였다.
“자네는 물러서게.”
“대, 대인.”
“황상의 황은이라고 하셨소?”
“어떻습니까. 소인이 모셔도 되겠습니까.”
“좋소.”
윤선거의 제안을 뇌호가 받았다.
자연스레 조선 역관이 자리를 잡았고 이일선의 공간이 축소됐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으나, 청사 뇌호의 결정에 이견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미리 말하오.”
“이르시지요.”
“국경을 넘은 이후 겪은 일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소.”
“결례를 범하였다면 소인이 사죄드립니다.”
“특히 사신연에서 크게 실망하였소. 쉽게 잊을 수가 없소.”
“…….”
“어쩌면 귀국할 때 이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
“이왕이면 잊고 싶소만.”
윤선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쏘아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말이 없소?”
“소인이 어찌 군왕의 일을 함부로 언급하겠습니까.”
“…….”
“…….”
“사신연의 일을 덮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겠소.”
“소인은 군주의 일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허.”
감히 군왕의 일을 협상의 화두로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뇌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눈치를 보던 이일선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찌…….”
“주회인, 사족, 훈련도감의 일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대감. 사신연의 일을 어찌 언급하지 않습니까.”
“썩 물러가시오.”
“하여, 소인이 제안합니다.”
“썩 물러가라고 하였소!”
“정사 대인의 말씀이 들리지 않소? 예조판서? 감히…….”
이일선의 말을 자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한마디에 모든 걸 평정할 것이니까.
그래서 말했다.
“지금껏 조선의 용포는 명의 예를 따랐으나…….”
여전히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안색도 변화가 없었다.
또, 평온하였다.
“이제는 상국을 배우고자 합니다.”
윤선거의 말은 거대한 정적을 만들었다.
뇌호는 입을 벌린 채 눈만 껌뻑였다.
분명 귀로 들었으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사신연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윤선거가 최종통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