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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31화 (131/298)

131화 산림(山林)의 영수(領袖)(1)

여전히 협상은 진행 중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파악할 길은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따갑고 답답했다.

윤선거의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또한, 실수 따위를 하는 인사도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청 사신단의 억지는 개인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신연에서 이연의 축객령까지 더해졌으니 악에 받친 상태일 것이다.

이처럼 상황은 너무나도 엄중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아직은 예조판서 윤선거의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모여서 결과만 기다렸다.

과장 좀 보태서 기근이 발생해도 청사와의 갈등부터 해결하는 게 옳았다.

“…….”

“…….”

“…….”

침묵만 감돌았다.

이보다 숨이 막힐 수는 없을 것이다.

“최악은 어찌 보시오?”

윤선도의 물음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최악은 주상께서 굴욕을 감내하시는 것이지요.”

별거 없다.

그냥 이연이 북쪽을 향해 절하고 대성통곡하며 절절하게 속죄하면 된다.

그 뒤 청 황제의 결정에 따라 벌금을 내면 일은 끝난다.

이연은 이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신하로서 군왕을 사지로 몰 수는 없다.

또한, 윤선거가 이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있다.

그러니 더 말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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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여 바람이나 쐬고자 나왔다.

“대감.”

낯이 익다.

예조의 관리였다.

“자네가 어찌……?”

“예판 대감께서 서찰을 대감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미촌은 어디 있나?”

“소직은 오늘 예판 대감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몰 이후 대감께 서찰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서찰……?”

관리가 내미는 서찰을 받았다.

황급히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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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우암에게.

생각하였네. 대체 어찌하면 청국으로부터 쌀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어떤 외교적 기교가 필요하며, 어느 정도로 달콤한 말을 쥐어짜야 청 사신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훔칠 수 있을까.

성현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미사여구가 없었기에 쉽사리 답을 낼 수가 없었다네.

쉬지 않고 고민했네. 그야말로 번뇌의 시간이었네.

그때 내 눈에 보인 건 바로 자네였어.

조선에서 가장 꼿꼿한 사람, 바로 우암 송시열.

백성이 뒤에서 욕하였네. 한데, 자네는 이를 알면서도 그저 웃을 뿐이었네. 의아하였어.

남인 학자들로부터 의심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자네의 모습은 참으로 괴이하였네.

반계 유형원의 신랄한 조롱을 버티며 걷는 모습을 볼 때는 충격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도 느꼈다네.

그리고 알게 되었네.

그렇게 알았어.

자네가 선택한 길이 어떤 길인지.

단지 기근을 이기기 위한 길이 아니었네.

자네를 내리는 길이었네.

머리를 숙이고, 양해를 구하며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네가 말일세.

우암 송시열이 그러하였네.

그 과정의 어디에도 조선 최고 성리학자의 권위는 없었네.

자네가 이러하였다네.

나는 비로소 결론을 얻었네.

이 가난한 나라 조선이 저토록 강대한 무리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존심’이니 말일세. 때로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최선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기에 매 순간 번뇌에 빠졌다네.

이는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이 나라의 자존심이었으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가 말하였네.

우리가 내어줄 건 ‘자존심’이라고.

그래서 기뻤다네.

나의 벗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기뻤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는 걸 알고 참으로 즐거웠네.

그러나 자네에게는 함구하였네.

내가 어찌 자네에게 또 다른 짐을 나눌 수 있겠는가.

이는 오직 나의 짐이기에 내가 감내해야 하지 않겠나.

우암, 우리 조선은 내일로 나아가야 하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조선은 내일도 동이 트겠으나 석양은 따갑고, 새벽은 어두울 것이네.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게는 조선의 신하로서 부여받은 생명이 있네.

영광과 환희의 생명일세.

하여, 나는 이를 지킬 것이네.

신하로서 어찌 군왕의 곤경을 지켜볼 수 있겠는가.

내게는 조선의 사대부로서 얻은 생명이 있네.

부단히도 노력하게 한 생명이었어.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일 것이네.

사대부로서 어찌 분란을 자초할 것인가.

그런데 내게는 조선의 백성으로 가지게 된 생명이 있네.

늘 부끄러웠네.

그러나 나는 더 부끄럽지 않을 것일세.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고 이 나라 조선의 내일을 밝히고자 나를 던질 것이네.

나는 비굴하지 않을 것이네

의연하게 싸울 것이네.

부디 후대가 말해주길 바라네.

오늘 내가 조선의 자존심을 꺼내는 건 굴종이 아니라 자존감을 위한 길이었음을.

오늘 내가 조선의 자존심을 내리는 건 상황의 모면을 위함이 아니라 도약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또한, 그로 인하여 발생할 모든 혼란은 나 윤선거가 감내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일세.

나는 이렇다네.

나는 이렇게 멈추지만, 자네는 계속 걷게.

조정의 대신으로서, 중대본의 수장으로서 쉬지 말고 걷게.

우암.

어제의 우리는 비루하기만 하였으나 오늘의 우리는 비루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그러니 내일의 우리는 비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네.

우리의 노고가 어떠한 대가를 받지 못하겠지만 그저 만대에 남기를 바랄 뿐이네.

우리의 노고가 오늘의 황금을 만들어내지는 못할지라도 후대의 쌀 한 톨이 되길 바란다네.

그리고…… 나의 오늘이 자네들의 마지막 석양(夕陽)이길 바라네.

부디 그리되기를 바란다네.

누군가 내게 어제와 오늘을 묻는다면 이리 답할 것이네.

즐거웠노라고.

우암.

즐거웠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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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읽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

다 알겠다.

알겠는데 내용이 이상하다.

불안함이 미친 듯이 엄습했다.

그야말로 찰나였고, 내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런 미친 작자가 있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렸다.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윤선거가 있는 곳으로.

그의 사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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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숨을 내쉬며 당도했다.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힘껏 걷어찼다.

-퍽!

대문이 열렸고 하인들이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거칠게 외쳤다.

“미촌은 어디 있느냐.”

“스승님……?”

윤증이었다.

“네 부친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송구합니다. 오늘은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스승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의 벗 미촌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

윤증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몸을 비켰다.

나는 곧장 달렸다.

문짝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대로

-쾅!

걷어찼다.

그리고 보였다.

정갈하게 차려입고

“미촌!”

음독을 시도하려던 윤선거가 보였다.

나는 미친놈처럼 달려서 거칠게 그의 손을 낚아챘다.

“자네 미쳤나!”

“…….”

“아버님……?”

뒤따라온 윤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곧장 밖으로 나가서 주위를 물렸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낚아챘던 손을 거칠게 밀었다.

“말하게.”

“…….”

“이게 무슨 짓인가……?”

“…….”

“설명하시게!”

“…….”

“미촌!”

윤선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사신연은 참으로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었다네.”

“무슨 짓인가.”

“청으로부터 구휼미를 확보하였네.”

“무슨 짓이냐고 물었네.”

“청의 바다도 빌리게 되었네.”

“무슨 짓이냐고 물었어.”

“감당하실 수 있나?”

“뭐……?”

윤선거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치의 후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감히 내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으나 역시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곤룡포(衮龍袍)를 도구로 사용하였네.”

곤룡포(衮龍袍).

말 그대로 군왕의 정복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의 관례를 따르고 있었다.

청으로서는 내키지 않겠으나 이를 고수하였다.

이를 협상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이제 조선 왕의 곤룡포가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생각도 하지 못한 강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날 것이다.

“해서, 물어본 것일세.”

“…….”

“감당할 수 있나?”

“…….”

윤선거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낮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조선의 사대부 중 제정신이 있다면 누가 이를 수용하겠는가.”

“…….”

“하여, 내가 책임지고자 한 것일세.”

“…….”

“비록 비루한 목숨이지만 불필요한 논란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에 목숨을 끊어 최대한 잠재우려는 의도였다.

말 그대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었네.”

“…….”

“하하하……. 마음을 굳혔거늘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았는지 여태껏 미루다가 자네와 이리 마주하게 되었네. 참으로 비루한 인생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자조적으로 웃는 윤선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생각인지 나도 모른다.

그냥 바라보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말이 새어 나왔다.

“부모가 아들을 위한 3년 복은 장자가 자신(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때 한 번은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입는다면 이는 두 정통이 없다는 통서의 원칙에 어긋난다.”

“우암……?”

“선왕께서 장자를 대신하여 대통을 이으셨기에 정통에 해당하고, 적실의 둘째 아들인 체 또한 바르지만 3년 복이 두 번째 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자네…….”

“모르지 않을 것이네. 일찍이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내가 3년 복을 주장하자 서인의 학자들이 내게 보내온 서찰이었네. 1년 복이 옳다는 말이었네.”

“…….”

희한하고 묘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왜……?”

“…….”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우암.”

“이는 군왕과 사대부의 예를 동일시한 것일세.”

“…….”

“큭…….”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왜 지금 웃음이 새어 나왔는지.

“군왕이 나라의 지존이 아니라 그저 사대부의 대표라고 생각하였을까?”

“우암. 말씀이 과하네.”

“한데, 어찌하여 왕가와 사대부가의 예를 동일시하였을까?”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그들의 말을 대변하고 있네.”

“뭐……?”

웃음은 아직도 새어 나왔다.

조소는 멈추지 않았다.

나도 지금도 이유를 모른다.

단지, 점차 심장이 차가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나?”

“…….”

“하여, 조선은 성리학자의 나라라고 하였어.”

“우암……?”

“그래. 분명 그들은 그리 말했네.”

“…….”

“만일 아니라면 어찌 그런 참담한 언사를 입에 담을 수 있나?”

“…….”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숨을 쉬었다.

다시 윤선거를 바라봤다.

이 순간에도 내 입가의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인이면 주인답게 행동해야겠지.”

“뭐……?”

“한 번이라도 주인답게 행동해야지. 안 그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하셨네. 편히 쉬고 있게나. 이제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어찌할 생각인가.”

“잊었나? 내가 누구인지.”

자신감을 담아서 말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송시열일세.”

조선의 7할을 움직일 수 있는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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