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32화 (132/298)

132화 산림(山林)의 영수(領袖)(2)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애써 감추려는 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소수가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바라보지 않았고 반기지도 않았다.

그저 탁자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

“…….”

“…….”

“…….”

“…….”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나 느낄 수 있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숨소리조차 조심하려는 저들의 몸가짐을.

“…….”

“…….”

“…….”

“…….”

“…….”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한 명씩 담을 수가 없었다.

단번에 십수 명이 보였다.

고개를 천천히 틀었다.

또 십수 명이 보였다.

반대로 돌렸다.

역시 십수 명이 보였다.

몸을 조금 뒤로 움직였다.

수십 명의 사대부가 보였다.

“…….”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바라봤다.

몸을 일으키고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모든 사대부가 일제히 일어났다.

내가 두 발로 선 건 그 뒤였다.

그리고 걸었다.

“…….”

내가 지나가자 고개를 숙였다.

계속 걸었다.

“…….”

내 어깨와 마주한 시선은 또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걸었다.

“…….”

나의 어깨는 이들의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문 앞에 이르렀다.

나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

“…….”

발걸음을 옮겼다.

마루로 걸었다.

마당이 보였다.

그곳에 있던 100여 명의 사대부가 나의 등장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 즉시 내 뒤에 있던 사대부들이 일사불란하게 나와서 내려갔다.

200여 명에 육박하는 사대부가 나 아니 송시열의 사가에 집결했다.

이들은 바로 조선의 7할을 움직이는 산림의 중추였다.

그리고 그 심장부는 바로 나, 송시열이었다.

지금 신왕의 시대 이후 처음으로 산림의 심장이 움직인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태초에 대명(大明)이 있었다.”

나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존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로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기에 그러했다.

“일찍이 이 나라 조선은 대명(大明)에 사대했다.”

“…….”

“대저 사대란 무엇인가.”

“사대란…….”

“묻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그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

섣불리 나섰던 사대부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나는 더 탓하지 않았다.

할 말이 많다.

할 일도 많다.

그러나 시간은 없다.

그래서 말을 이었다.

천천히.

“혹자가 말하였다.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사대이며, 이는 숙명이라 한다. 하여, 사대는 명분이며 현실이고 실리라고 한다. 옳다. 참으로 옳다.”

숙명(宿命).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

중원의 대국과 반도의 소국은 사대로 얽힐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시대다.

“허무맹랑한 말은 하지 않겠다.”

“…….”

“조선이 대군을 일으켜 북진하여 요동을 탐하고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은 적이 없다.”

“…….”

“때로는 소국이 대국을 거스를 수 있기에 부당한 대국의 군사적 위협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감당할 수 있노라는 무책임한 선동 따위도 하지 않는다.”

“…….”

“미리 단언하겠다. 조선은 사대를 부정할 수 없다.”

“…….”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이 나라 조선은 중화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우리는 영원히 중화의 번국(藩國)이다.”

나는 물끄러미 산림의 중추들을 쳐다봤다.

내 시선은 오직 정면을 향하였을 뿐이지만 모든 이는 내 시선을 쫓았다.

하여 나는 모든 이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이 나라 조선이 걸었던 사대의 길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고민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 섰는가.

나는 과연 저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이 자리에 섰는가.

내가 생각하는 무언가가 저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그러나 복잡한 생각을 거뒀다.

내 앞에 있는 이들이 아무리 고루한 사대부라고 할지라도 윤선거의 결의를 덮을 수는 없다.

하여, 나는 내질렀다.

“일찍이 우리는 대명에 사대하였다. 대저 사대란 무엇인가.”

서두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다시 언급하였다.

이것이 오늘 나의 핵심이기에 그러했다.

“사대란…….”

나는 오늘 이 나라 조선에서 사대를 새롭게 정의할 것이다.

기어이 그리해낼 것이다.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조국(祖國)을 입증(立證)하는 절차다.”

무엇을 입증하는가.

“대국이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입증하는 것이다.”

하여, 사대하지만 간섭받지 않는다.

또한, 사대하지만 위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대의 본질, 힘을 입증한 결과다.

“그러한데 우리의 준비 태세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 나라 조선을 입증하고 있는가? 아니다. 작금의 사대는 입증은커녕 실리와 현실조차 반영하지 못한 명분만이 남았다.”

“…….”

“문답을 허한다.”

이들이 산림의 중추라고 할지라도 송시열에게는 무명 유생에 불과했다.

감히 나서지 못하다가 눈치만 볼 뿐이었는데 내가 먼저 허락하자 기쁜 낯빛을 보이면서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때로는 명분이 실리와 멀어질 수도 있고, 현실을 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명분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너의 명분은 참으로 고루하다.”

“어찌하여 고루하다고 하십니까.”

“명분은 원래 고루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한데, 너는 명분을 고루하게 만들고 있다. 가르침을 내리겠다.”

“익히겠습니다.”

“혹자는 말했다. 명분이 중요하다고.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오랜 세월 명분은 우리의 가치였다. 어찌하여 우리의 가치였는가. 명분은 도덕이다. 선이다. 하여, 우리의 정치는 도덕이며 선이었다. 이를 지향했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은 명분이라는 우리가 지켜온 가치조차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고루한 말로 만들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작금의 조선이 말하는 명분은 명분이 아니다.

고집 혹은 아집에 불과하다.

나는 이를 입증하고자 했다.

“보라. 조선의 사대가 어떠한가. 현실의 대국인 대청이 아니라 여전히 대명을 바라보고 있다. 이 나라 조선에 있어서 중화는 여전히 대명이다.”

“대감.”

“허락한다.”

“비록 오랑캐가 강성할지라도 어찌 중화까지 탐할 수 있겠습니까. 중화는 오직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루한 토론을 버리겠다. 그러니 하나만 묻겠다. 우리에게 어떠한 황은도 내릴 수 없는 ‘중화’를 계속 섬겨야 하나?”

“…….”

“대관절 대명이 중화로서 우리에게 내린 황은이란 무엇이더냐. 또, 이를 저들이 못할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

지독한 현실을 언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달래며 달려갈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안다. 오랑캐였던 무리에게 패배한 현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일 것이다.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그들이 이미 중화이며 상국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

“한데, 진정 이러하였느냐?”

지금부터 본론이었다.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아니다.”

“…….”

“그들에게 조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자신이 없기에 그러한 것이다. 일찍이 대명이 우리 조선을 대우할 수밖에 없었던 국력을, 지금의 대청에게는 보여줄 자신이 없기에 그러한 것이다. 부정하지 말라. 우리는 필시 이리하였으니까.”

토론하지 않는다.

설득하지 않는다.

오직 명할 것이다.

“그저 그들을 부정하였다. 하여, 우리는 대명의 천하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조선의 역사를 바라볼 뿐이다.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

그 결과 조선의 사대는 현실과 완벽하게 괴리되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길을 향해서 걸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일찍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조선을 위태롭게 할 때, 명의 만력제는 대군을 파병하였다.

이를 조선의 사대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킨 은혜라고 하였다.

“재조지은을 부정하지 않겠다. 한데, 우리가 어찌 지금 재조지은을 입에 담아야 하는가.”

이미 임진왜란은 끝났다.

병자호란의 여파가 이 나라를 덮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병자호란을 잊고 임진왜란을 상기한다.

어찌하여……?

“대청을 이기는 건 요원하며, 그들에게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국력조차 회복할 자신이 없기에 그러한 것이었다.”

자신이 없기에 그러하였다.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을 만난 조선은 패배에 차분한 나라가 되었다.

넘을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결과 조선은 현실을 회피하였다.

“병자호란을 감당할 수 없기에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처참한 패배였고, 후자는 황은이 깃들었다. 이것이 다르다.”

황은(皇恩).

이는 바로 명나라 만력제의 황은이었다.

“하여, 우리는 머지않아 명나라 만력제의 제사를 지낼 것이다.”

만동묘(萬東廟).

조선의 사대부가 숙종 시절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화양서원 내에 세우니 이를 만동묘라고 하였다.

이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서원으로서 각종 폐단이 온상이 되었는데 흥선 대원군에 이르러서 철폐되었다.

재밌는 건 만동묘가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유언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를 언급하고 있다.

또 그러하니 이를 질타하는 내 말이 얼마나 큰 위압감을 가지겠는가.

그래서 이는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도움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병자호란과 경신 대기근으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해야 할 사대부가 한 일이 고작 ‘재조지은’을 언급하여 ‘명분’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니,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재조지은.

진작에 땅속에서 썩어 없어졌어야 할 이 단어의 망령이 조선의 가치를 괴이하게 만들었다.

아니, 조선의 사대부가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이 된 것이다.

“청은 이를 막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였다.

청이 불쾌함을 표출하였으나 조선은 버텼다.

“끝내 우리는 청을 이겼다고 말할 것이다.”

“…….”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외칠 것이다.”

“…….”

“우리는 병자호란의 한을 갚았노라고 선언할 것이다.”

“…….”

“이 땅에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말이다.”

하늘 아래 이보다 위대한 승리가 있을까?

이것이 바로 조선의 역사였다.

나는 이를 틀어낼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

“우리 조선의 역사가 이럴 수는 없다.”

“…….”

“죽은 망령이나 부여잡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역사를 만들어갈 수는 없다.”

공기는 크게 술렁였다.

오늘 나의 말은 대청 외교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반청 의식이 여전한 이들로서는 쉽사리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송시열이 언급하였기에 반발이 대놓고 터져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만족스러웠다.

진심이었다.

이런 결기라면 충분했다.

물었다.

“그래도 해보겠는가.”

일제히 시선이 내게 쏠렸다.

“죽은 망령을 부여잡았다고 후대가 손가락질할지라도 해보겠는가.”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또한, 나의 의도를 정확하게 모르니 어지럽기도 했다.

정확하게 정의해줬다.

“나는 입증하고자 한다.”

윤선거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의 말대로 곤룡포 따위 양보하고, 청의 바다를 취하고 구휼미를 얻으면 된다.

역사는 이를 위대한 실리 외교라고 말할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한 길을 걷고자 하였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과정이 생략된다.

실리를 취하기 전에 우리의 실력을 입증하지 않았다.

무릇, 실리는 10할의 실력을 구현한 뒤에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병자년의 패배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틀렸다.

또 그래서 생각하였다.

만일, 윤선거가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면 앞으로 어찌 될까.

조선의 사대부는 그저 고개만을 끄덕일까.

아니다.

이 나라 조선의 사대부는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신념에 살고 신념에 죽는 이들이다.

신념의 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한 이들이다.

하여, 윤선거는 옳았다.

그는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싸울 수 있는 보검을 알렸다.

나는 오늘 이 보검을 꺼낼 것이다.

“조선이 청국에 사대할지언정 그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길 수 없도록 하고자 한다.”

좌우를 돌아봤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다시 묻겠다. 후대가 손가락질하더라도 가겠는가.”

“갈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일렀다. 고루한 명분은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틀렸습니다.”

“무엇이 틀렸는가.”

“이미 대감께서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길은 무엇인가.”

“우리의 힘을 입증해야 진정한 사대가 열린다고 하셨지요.”

“옳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과 싸울 군대가 없다.”

“나라가 크게 패하였습니다. 어찌 군사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 또한 옳다. 하면, 무엇으로 싸우겠는가.”

나의 물음에 한 명이 나섰다.

그가 격정적으로 외쳤다.

“사대부 한 명은 일백의 군세입니다.”

또 다른 이가 나섰다.

“100명의 사대부는 일만의 군세입니다.”

다시 다른 이가 나섰다.

“만 명의 사대부는 조선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여 명의 입에서 산림의 자부심이 터져 나왔다.

“소생들이 곧 조선입니다.”

이보다 압도적인 기세는 없다.

이 자체가 곧 조선이었다.

나는 이제 화답해야 했다.

“이 나라의 국호가 조선임을 입증하라.”

“기어이 해낼 것입니다.”

“해산하라.”

나는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았다.

또 아무런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은 이미 내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 곧장 행동할 것이다.

일만의 사대부가 청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이 땅에 반청의 상징, 만동묘를 세운다.

바야흐로 3차 조청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선수를 점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