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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33화 (133/298)

133화 This is Joseon(1)

원래 동부 지역은 조선의 심장부인 한양 도성에서 가장 한산하고 낙후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말 과거의 얘기였다.

유형원의 동부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동부 지역은 활기가 넘쳤다.

사방에서 쉬지 않고 토목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한눈에 보더라도 기존의 도성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걷다가 아무 곳에서나 멈춰서 동서남북 어떤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어 속이 시원하였다. 이 길의 끝에는 수천 명의 백성이 거주할 민가로 가득하였다.

또, 도로의 양쪽마다 빼곡하게 세워지고 있는 건물은 용도를 너무나도 궁금하게 할 정도였다.

“대부분 위생과 관련한 건물일세.”

윤휴의 뒤로 유형원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윤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별 무리가 없다면 동부 지역은 위생국의 본영(本營)이 될 것이네.”

“음. 상업을 크게 일으킬 계획이라고 들었네만.”

“역시 어렵지 않은 일일세. 반촌에서 나올 쇠고기를 수용할 시설과 시장이 형성될 거리를 확보하였으니까.”

“쇠고기를 수용할 시설은 만들면 되겠지만, 상권이라는 게 의도하여 만들 수 있나?”

“물론일세.”

“어째서?”

“쇠고기가 가는 곳이 상권이니까.”

우문현답은 아니었다.

아무리 쇠고기가 귀하더라도 상권이라는 건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로 변화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호언장담하고 있으니 정말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윤휴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되었네.”

“그나저나 좀 어떤가. 청 사신단으로 인하여 모든 일정이 멈췄을 것인데.”

“결국 새 거주지에 살 날이 멀어지는 것이니 불평불만이 어찌 없다고 하겠나.”

“참으로 백해무익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네.”

한숨을 쉬는 윤휴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평정심을 가지려고 해도 노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곤룡포라니.”

“진정하게. 협상에 불과하였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들이 만들었네. 예판 대감의 일을 전해 듣지 못하였나?”

예조와 청 사신단의 협상 내용은 아직 공론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대본의 중추라면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예조판서 윤선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음독하려 한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유형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암 대감께서 산림의 회합을 여셨더군.”

살얼음판 같은 정국이었다.

이럴 때 송시열이 산림의 중추를 소집하였다는 건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어떤 논의가 이뤄졌느냐에 따라서 향후 조선의 정치 지형이 판가름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단호하게 말했다.

“반계. 잊었나? 조선의 조정은 붕당이 지배한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서인은 서인의 길이 있으며, 남인은 남인의 길이 있는 법일세.”

“길이 다르다?”

“종국에서 만나기만 하면 될 일이네.”

서슬 퍼런 윤휴의 결의는 참으로 뜨겁고 아름다웠다.

유형원은 친애하는 벗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네 설마, 정사 뇌호라도 잡아보려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청 황제라도 어찌하고 싶네.”

“농을 하자는 게 아니지 않은가.”

“휴.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를 어찌하는 건 어렵지 않겠나?”

“하면?”

“이일선이라면 또 몰라도.”

유형원의 은근한 말에 윤휴는 피식 웃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방책이 있나?”

“일찍이 어떤 이가 제갈량의 흉내를 내었다는 말을 들었네.”

“…….”

“그가 제 지인을 모두 동원하여 산림의 영수와 다투게 하였네. 이를 이간질이라고 한다지?”

“자네까지 왜 이러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유형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윤휴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일세. 농.”

“근묵자흑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네.”

“하하하.”

“되었네. 하여?”

“오랑캐를 상대할 때는 이이제이가 가장 적합하지 않겠나?”

“이이제이라…….”

“능히 천하를 세 개로 가를 수도 있네.”

“…….”

“믿어보게.”

유형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목울대로 뭔가가 넘어가기도 했다.

윤휴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간질의 최고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아니겠는가.”

이어진 벗의 농에 결국 유형원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보태듯 말했다.

“정치적 행위는 성과가 있어야 하는 법일세. 단지 갈라놓는다고 하여 끝나는 건 아니지 않겠나?”

“묘안이 있는가?”

“이왕이면 이일선을 도성에서 치워버려야지.”

“일러주게.”

“일단, 곤룡포를 언급할 수는 없네.”

“그렇겠지. 그건 조정의 약조였으니까.”

“또, 우리가 나설 수도 없네.”

“아쉽지만 우리가 나서면 조정의 뜻이 되는 걸세. 빌미만 제공하겠지.”

“방자하고 가벼운 이일선의 세 치 혀를 고려할 때, 방법은 의외로 쉽지 않겠나?”

유형원은 좌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산하지 않은가. 유민들은 천성이 이러하다네. 불평과 불만이 넘치는데 어찌 앉아만 있겠는가.”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네.”

이어지는 말에 윤휴의 안색은 핼쑥해졌다.

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묘수(妙手)였다.

절로 말이 새어 나왔다.

“이거라면 조선의 사대부가 도끼를 들고 청나라 황궁으로 돌격할 수도 있겠군.”

“성사할 수 있겠는가?”

“끌.”

윤휴는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엄중한 시국에 성균관의 유생이 어찌 오물이나 치우겠는가. 또한, 그야말로 위정척사이거늘 어찌 침묵하겠는가. 심장에 불이 붙을 것이네.”

“우문현답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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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사신단의 정사 뇌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가져야 할 체통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곤룡포가 청의 예법을 따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성과였다.

이를 안고 귀국하면 엄청난 황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입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인. 황상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간사하게 웃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이일선이었다.

뇌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공이 아주 컸네. 내가 이를 황상께 꼭 고할 것이야.”

“하하하. 소인은 그저 대인의 옆에서 거들었을 뿐입니다.”

육조거리였기에 조선의 관리가 쉬지 않고 오갔다.

모두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곁 눈길로 두 사람을 흘겨봤다.

그중에는 무리를 지어 대놓고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뇌호와 이일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한데, 대인.”

“말하게.”

“얼마 전 송시열이 회합을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한 내용이 있는가?”

“꼭 그렇다기보다는 회합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음. 그가 조선 사대부의 중추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성리학자이기에 따르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 자가 대인께서 계시는 이때 회합을 열었습니다.”

“따져 물어볼 만한 일이군.”

“그렇습니다.”

이미 성과가 넘친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또 빌미를 제공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꼭 공적인 성과가 도출되지 않더라도 사적으로 충분히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더욱 기뻤다.

빙그레 웃으며 수염을 만지던 뇌호의 시선에 자리를 들고 성큼성큼 걷는 이가 보였다.

꽉 다문 입과 딱딱하게 굳은 표정까지 더해지니 꼴이 참으로 희한했다.

“그런데 조선 사대부들은 참으로 괴이하군.”

“어째서 그러십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자리 따위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있나?”

“대인. 조선 사대부들은 불필요한 예법에 목숨을 거는 무리입니다. 이해하실 필요가 없지요.”

마치 들으라는 듯 외치며 조롱했다.

오가던 이들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자 이일선은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노려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피하지 않고 응수한다.

이일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광기가 골수에 이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낮게 중얼거렸다.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의 입 모양이 자세히 보였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천한 놈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히……!”

그때였다.

“전하께 목숨을 걸고 청하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사방에 울렸다.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일찍이 이 나라 조선은 명나라 만력제의 황은이 없었다면 왜군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

“어찌 이를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예사로운 말이 아니었다.

이일선은 귀를 기울였다.

“신은 재조지은을 뼈에 새겼사옵니다.”

목을 긁어내는 듯 온 힘을 다한 외침이었다.

이일선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였다.

“만력제를 모시는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의 외침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반면, 이일선의 입꼬리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

하늘이 이토록 도와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곧장 나섰다.

“감히!”

한껏 위엄을 자랑하며 외쳤다.

“대국을 모시는 번국에서 어찌 이런 짓을 하는가!”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하! 심지어 황상의 대리인께서…….”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자가!”

이일선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전하!”

또 다른 외침이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

근처 지켜보던 사대부들이 결합하였다.

어느새 십수 명이었다.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전하!”

“전하!”

“전하!”

또 다른 방향에서 외침이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

이미 지척에 이른 무리가 있었다.

그 수가 이미 수십 명이었다.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뇌호와 이일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딱딱하게 굳은 안색을 겨우 숨기며 자리를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

“!!!”

족히 수백 명의 사대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자리를 들고서.

뇌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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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새파랗게 변한 입술.

하얗게 질린 얼굴.

이 사람은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득의양양하게 도성을 오만하게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움직이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

“…….”

물론, 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도성으로 집결한 사대부의 수가 수백 명이었다.

그야말로 총동원령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1천 명을 넘었을 것이다.

진짜 이 기세로라면 1만 명이라는 상징적인 수가 모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황은을 기리는 만동묘의 건립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대놓고 반청을 부르짖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하니 청국의 사신단 정사인 뇌호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십수 명이었으면 노하였겠으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였기에 겁에 질린 것이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말이오?”

말까지 더듬거린다.

나는 심드렁하게 쳐다만 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오? 이를 어찌할 생각이오?”

조선의 군왕과 기 싸움을 하던 오만함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쳐다만 봤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소인은 예조판서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소인을 불렀습니까.”

“허. 예조판서가 공석이니 귀공과 논의해야 하지 않소?”

“공석이라니요? 병석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이까.”

“왜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말꼬리를 잡자 뇌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화를 낼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아는지 애써 참으며 말했다.

“실언했소. 병석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예조판서와 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쾌차하면 대인을 만나서 사안을 논의할 것입니다.”

“아, 아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뇌호는 대뜸 고함을 질렀다.

“만동묘라고 하였소!”

다급함만 담겼고 위엄은 전혀 없었다.

실소가 올라올 뻔했으나 잘 갈무리했다.

“…….”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오. 조선이 어찌 이럴 수가 있소?”

“…….”

“한데, 조선의 대신은 이를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소.”

“실은 소인이 대강의 사정을 알아봤습니다.”

“무엇이오?”

“재조지은을 잊지 못하겠답니다.”

“이보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황상께서 이를 아시면…….”

“아시면요?”

“…….”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뇌호는 그냥 말문이 막혔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공기의 흐름은 변하였고, 주도권이 넘어왔다는 결말이다.

그러나 뇌호는 이를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정확한 현실을 일러주기로 하였다.

“삼전도의 맹약 이후에도 우리 조선은 명의 예법에 따라 곤룡포를 사용하였지요. 그러나 이번에 이를 내놓았습니다.”

은근하게 한마디를 더 보탰다.

“대인께 큰 황은이 내려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한데, 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뇌호의 눈동자는 미친 듯이 요동쳤다.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하, 하면 저들이 곤룡포를 문제 삼는 것이오?”

“허. 저들은 조정의 일에 나선 게 아닙니다. 그저 할 말을 하러 온 겁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재조지은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진정 모릅니까?”

“그것이…….”

“과거 명은 그 어려운 시절에도 원군을 보내고 구휼을 하였습니다. 한데, 상국은 어찌하였습니까. 굶어 죽는 백성을 보살피기 위한 구휼을 군량이라고 억지를 부리시니,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디 이뿐입니까? 하!”

나는 대뜸 고함을 지르며 이일선을 쳐다봤다.

대놓고 뇌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뇌물이라니요. 이 어려운 시국에 뇌물이라니요. 하! 목민관들이 하나같이 울부짖는 장계를 보냈습니다. 황상께서는 이를 아십니까?”

“…….”

“다시 묻지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하여 저토록 분개하였다고 생각합니까?”

“…….”

순식간에 궁지로 몰았다.

뇌호의 낯빛은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그때였다.

“한데, 저들은 결국 조선의 사대부가 아닙니까.”

간사하게 웃는 이일선이었다.

정말 재수 없는 눈빛을 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당 조선 조정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라면 너는 빠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법을 거론하며 통관 따위는 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타격 대상이기에, 이일선이 이렇게 나서는 건 너무나도 환영이었다.

“하여, 벌하라는 것이오?”

“감히 황상의 대리인이 있거늘 명나라 황제의…….”

“현재 천여 명이 넘는 사대부가 운집하였소. 그들의 목이라도 치라는 것이오?”

“…….”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뇌호를 쳐다봤다.

“차라리 황군을 출병하여 조선의 종묘사직을 끊어버리지 그러십니까.”

나의 시니컬한 말에 뇌호는 말문이 막혔다.

태도를 떠나서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늘 아래 어떤 미친 나라가 학자 일천 명을 벌하겠는가.

심지어 조선처럼 인구가 많지 않은 나라에서 일천여 명의 학자는 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압박은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직 재협상이 언급된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내가 먼저 언급할 필요는 없다.

“한데, 대감께서는 산림의 영수가 아니십니까.”

이일선이 재등판했다.

나는 속으로 반기며 그를 꼬나봤다.

“그렇소만.”

“대감께서 나서면 저들을 무마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데 일부러 방치한다는 말이오?”

“소인이 파악해보니 대감의 사가에서 회합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이 있긴 했소.”

“소인이 파악하니 재조지은도 언급되었다고 하더군요.”

“허. 내 사가에 사람이라도 심었소? 어찌 그리 자세히 아시오?”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만, 뒤에서는 반청을 일삼는 무리가 조선의 사대부가 아닙니까. 어찌 방심할 수 있겠습니까.”

간사한 혓바닥이 참으로 재수 없다.

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묻겠소. 재조지은을 언급한 게 사실이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면, 이 사태에 큰 책임이 있다는 걸로 간주해도 되겠소?”

“조정의 대신으로 책임을 통감해야겠지요.”

뇌호의 가늘어진 눈에서 희망이 느껴졌다.

나름대로 생로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나를 엮어서 이 난국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바였다.

이로써 나는 합법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대, 대인.”

“무슨 일인가?”

“나,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 나다니?”

“위, 위정척사라는 무리가 앞에서 진을 치고…….”

위정척사라면 윤증이다.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

무언가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뇌호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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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조선에 만동묘가 있었다면 이를 철거하였을 것이다.

이를 알리면 내가 복잡한 수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사대부는 비분강개하여 들고 일어났을 것이니까.

그러나 없기에 건립을 명분으로 일어났다.

결국, 만동묘는 압박을 위한 무기에 불과했다. 사대부를 규합할 수는 있으나 구체적인 분노를 폭발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철거하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 나는 폭발 지점을 잡고 방안을 정했었다.

그런데

“차라리 목을 치십시오!”

이는 예상하지 못했다.

성균관 유생을 대동한 윤증은 핏대를 올리며 핏발 선 눈으로 외치고 있었다.

“목을 자를지언정!”

그의 말이 이어졌다.

“변발은 할 수 없습니다!”

변발(辮髮)이라고 했다.

이는 머리를 뒤로 길게 땋아 늘인 것으로, 청나라 만주족의 머리 모양이었다.

“황상께서 기어이 조선의 상투를 자르고자 하신다면!”

그 말과 동시에 윤증은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차라리 목을 치십시오!”

그가 다시 도끼를 들었다.

“이를 철회하지 않으신다면!”

윤증의 말이 이어졌다.

“황도로 직접 달려가서 황상께 청하겠습니다.”

“!!!”

“!!!”

그야말로 쐐기를 박는 말이었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위정척사와 가장 걸맞은 연좌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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