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This is Joseon(7)
누구나 생물학적 DNA가 존재한다.
그런데 정치인에게는 정치 DNA가 따로 있다.
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사대부의 정치 DNA는 무엇인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친명 사대다.
작금의 조선 사대부에게 친명 사대는 본능이며 숙명(宿命)이다.
설명도 필요 없다.
설득은 더 필요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정치 DNA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하지만 천하의 정세가 친명 사대를 허상으로 만들었기에 조선 사대부의 DNA는 터전을 잃고 하염없이 유랑하였다.
기나긴 유랑의 시간 끝에 소중화(小中華)가 천명됐다.
대저 소중화란 무엇인가.
복잡한 정치 이론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대부에게는 병자호란 이후 무참하게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있다.
소중화는 이를 거칠게 자극하였고, 사대부는 본능적으로 반응하였다.
이는 그저 조선의 사대부에게 향수(鄕愁)와도 같은 것이다.
하여, 소중화는 조선 사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호전적인 지도부가 등장하여 역동적인 연설로 선동하면 도끼를 휘두르며 북벌까지 감행할 기세였다.
대명 중화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는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그런데 갑자기 더워졌다.
“대감.”
누군지 알지만 놀라서 돌아봤다.
뜨거운 남자, 윤휴였다.
그새 얼굴이 많이 상했다.
자세히 보니 불에 그을린 거 같기도 하고.
“오셨나.”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연일 승전고를 울리니 참으로 기쁘군요.”
윤휴는 실제 북벌을 언급할 정도로 호전적인 인사였다.
물론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였을지라도, 중진 정치인의 무게를 고려할 때 가볍게 흘려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하였으니 대명 중화를 갈망하는 소중화 정국에 평소보다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치껏 티 나지 않게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대국의 사신이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네. 한데, 조선 일정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였으니 놀랐을 것이네.”
“흥. 패악질을 정도껏 했어야지요. 어쨌든 작금의 소중화 정국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소중화 선언은 청 사신단의 정치적 공간을 완벽하게 박탈한 것이네. 이러할 때 뇌호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지.”
“예. 야반도주지요.”
“그렇지.”
물론 정말로 오밤중에 남몰래 도망가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연의 옥새가 찍힌 공문서를 가져가지 못하는 걸 말했다.
한마디로 조선이 미쳤다고 황제한테 고자질하러 달려가는 것이다.
“대경실색하였을 그가 야반도주하면, 우리는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꼴이 되는 걸세.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지.”
“그렇습니다. 작금의 정세가 아름답다고 하여 방심할 수 없는 이유지요.”
“그렇지. 하지만 그토록 참담한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네.”
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소중화의 광신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위선이나 거짓 따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직 진심만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연좌였다.
“야반도주가 자신의 명을 단축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시켜야겠지.”
“참으로 묘하지 않습니까. 조선과 뇌호의 운명이 이렇게 연결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음. 혹시 내가 상황을 잘 주도하였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물론이지요.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쉽군.”
뜨겁게 불타는 윤휴를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이제 이 혼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네.”
이제 내가 등판할 때였다.
조선의 역사에 길이 남을 반청의 대명사로 말이다.
“대감.”
느닷없이 윤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윤휴로부터 미리 최종 승리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하여, 나 역시 시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기에 이는 섣부른 행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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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白晝)였다.
해가 중천에 자리한 백주였다.
걸었다.
보폭은 적당했다.
별다른 힘도 담지 않았다.
참으로 가볍게 걸었다.
저잣거리를 오가던 백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눈을 껌뻑거리는 것도 보였다.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걸음을 멈췄다.
하늘을 바라봤다.
자연을 보고자 고개를 든 것이 아니었다.
허둥지둥 길을 트는 백성들에게 시간을 내어준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던 저들로서는 길을 지배하는 내가 두려울 것이다.
하여, 기다렸다.
백성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탓하지 않으나 탓이 될 수도 있다.
하여, 말했다.
“번국(藩國).”
청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화자가 나, 송시열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하여, 말을 이었다.
“이는 제후의 나라를 말한다. 하여, 조선은 번국이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봤다.
내 목소리는 고요하였으나 울림을 가졌다.
울림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알 수 없다.
들을 수 있는 이가 들을 것이다.
나는 그저 누군가는 들어야 할 말을 꺼낼 뿐이었다.
“어찌하여 조선이 번국인지 되돌아봤다. 이는 사대가 소국의 숙명이기에 그러하다. 아니, 대국의 지척에 존재하는 소국이기에 그러했다. 만일, 이 나라 조선이 이역만리의 나라였다면 사대의 예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대륙의 지척에 터를 잡았다.
단군 할아버지까지 찾아가서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는 당연하였기에 숙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을 보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이었다.
“조선이 대명의 적통(嫡統)임을 주장하였다. 소중화라고 하였으나 본질은 대명의 적통이었다.”
천하에는 오직 중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중화가 아니라 소중화라고 했다.
중화는 오직 대명이니 후예의 의미를 담았기에 소중화가 아니겠는가.
“사대가 숙명이라고 하여 사대의 대상까지 숙명일 수는 없다고 천명한 것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시선을 내렸다.
앞을 바라봤다.
백성은 이미 좌우로 갈라섰다.
발걸음을 옮기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여, 알게 되었다.”
멈췄다.
말했다.
“우리 사대부의 의기가.”
광기가.
“숙명조차 찢어버릴 수 있다는 걸.”
청국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다시 걸었다.
편히 걸었다.
말을 이었다.
“하면, 숙명을 찢은 조선의 길은 무엇인가.”
나의 말은 바람을 타고 전해질 것이다.
하여,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껏 우리는 사대가 현실이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현실이었는가. 이는 사대로서 전쟁을 피할 수 있기에 그러했다. 오직 이것이 전부였다. 하여, 사대의 뒷면은 굴종(屈從)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사대라는 외교를 손가락질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쟁을 피하는 외교는 추앙받아 마땅하지만, 오직 전쟁만을 피했기에 굴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 조선의 사대는 달라질 것이다.
소중화가 이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조선의 사대는 다를 것이다.”
어찌 다를 것인가.
“평화는 필연(必然)이며, 또 다른 국익을 선택할 수 있다.”
상대가 누구라고 할지라도 변함은 없다.
“하여, 이 나라 조선의 사대에는 협상이 존재할 것이다.”
철저하게 국익을 우선하는 외교의 기풍이 자리 잡을 것이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가 의기를 유지하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다소 급해진 호흡을 갈무리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보라.”
걸었다.
“조선의 백성이 청국의 바다로 나아가 어업(漁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멈추지 않고 걸었다.
“기근으로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 하여, 쌀을 얻어냈다.”
보폭은 변함이 없었다.
“만일, 이조차도 가질 수 없다면 사대의 이유는 없다. 또한, 얻어낼 실력이 없다면 굴종이다. 이것이야말로 평화를 구걸하는 사대에 불과하다.”
걸음을 멈췄다.
다시 숨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우리의 사대는 이뤄냈다. 우리의 사대는 이토록 위대하다.”
걸었다.
“이 모든 건 합의가 되었다. 예조판서 윤선거가 해내었다. 그러나 틀어졌다.”
말했다.
“어찌하여 그리되었는가.”
쉬지 않고 이어갔다.
“나 송시열의 부덕(不德)이었다.”
다시 멈췄다.
말도 잠시 쉬었다.
물끄러미 앞을 바라봤다.
목적지가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200년이 걸렸다.
“…….”
번뇌 따위는 없었다.
모두 내리고 왔으니까.
오직 한 가지를 바라볼 뿐이다.
오늘 나는 조선의 역사를 바꿀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고개를 돌렸다.
사대부가 보였다.
반대로 돌렸다.
사대부가 보였다.
몸을 돌렸다.
사대부가 보였다.
조선은 이들에게 두 글자를 내렸다.
역사는 이들을 산림이라고 하였다.
오늘 이 자리에 산림이 총집중하였다.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가히 일만의 사대부라고 해도 무방했다.
“청국 사신단이 주상 전하께 나의 파직을 요구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뇌호의 최대 실수였다.
하여, 이리되기를 간절하게 바라였다.
내가 합법적으로 등판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저들은 모른다.
내가 송시열이라는 건 알겠으나 송시열이 누군지는 모른다.
저들은 알 수 없다.
내가 산림의 영수라는 건 알겠으나 산림의 영수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저들은 오판했다.
조선의 왕이 송시열의 군주일지라도 파직할 수는 없다는 걸 모른다.
몸을 돌렸다.
걸었다.
들렸다.
걸음 소리가.
걸었다.
느껴졌다.
분노에 찬 숨소리가.
멈췄다.
일제히 걸음이 멈췄다.
자리가 펼쳐졌다.
나는 앉았다.
그러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 순간 수천의 산림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저들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그가 내 손에 무언가를 올렸다.
묵직했다.
바로 도끼였다.
내리쳤다.
-쾅!
저들은 모른다.
송시열을 파직할 수 있는 건…….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송시열뿐이라는 건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쾅!
-쾅!
-쾅!
-쾅!
-쾅!
-쾅!
……
-쾅!
-쾅!
수천 개의 도끼가 땅을 내리쳤다.
동시에 일만의 외침이 지축을 흔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외쳤다.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산림이 읍소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외쳤다.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도끼를 들었다.
외쳤다.
“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일만의 산림이 일제히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기어이 사직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소생들부터 죽이십시오!”
다시 외쳤다.
“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기어이 사직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소생들부터 죽이십시오!”
기묘한 대치였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봤다.
공포로 얼룩진 대청 사신단의 정사 뇌호의 눈을.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너희에게 백승(百勝)의 팔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배수진의 산림이 있다.
오늘 이를 알려줄 것이다.
다시 도끼를 들었다.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죽이시지요.”
“!!!”
그러자
“소인들도 죽이셔야 할 겁니다.”
일만의 산림이 폭발하듯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