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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41화 (141/298)

141화 되살아나는 망령(亡靈) 그리고(1)

조선 외교사에 획을 그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과정은 치열하였으나 공정했고, 결과는 양측이 모두 만족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뇌호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는지 시종일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때 시름만 가득하던 얼굴은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웃음을 되찾은 것 같아서 나는 너무나도 뿌듯했다.

압도적인 성과와 별개로 좋은 일을 한 거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백미는 성대한 환송 행사였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대국의 사신을 환송연은 잘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과연 뇌호는 크게 감격하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조선을 잊지 못할 것 같소.

-우리 조선을 이토록 그리워하시겠다니 어찌 대인을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또 오세요. 조선에는 대인을 흠모하는 사대부가 일만 명에 육박합니다.

-…….

-뜨겁게 환영하겠습니다. 하하하!

-…….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우정의 대화였으며, 호탕한 기백을 주고받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너무나도 흡족했다.

이토록 성대한 환송을 끝으로 뇌호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한데 뒤늦게 보니 이일선이 잘 안 보였다.

죽었다는 희보(喜報)를 듣지는 못했으니 어딘가에 있어야 할 건데, 존재감이 너무 미약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인다고 하여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딱 이랬는데 뇌호의 마지막 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떠올리면 너무나도 참된 우정이라고 생각됐다.

-그간의 은원은 잊겠소.

-소인은 처음부터 대인과 통한다고 여겼습니다.

-내 말만 들으면 안 되겠소?

-아.

-됐소. 어쨌든 신뢰의 징표로 이일선이 다시는 압록강을 넘지 못하도록 조처하겠소.

-허. 가능하겠습니까?

-이보시오.

-당연히 가능하겠지요.

-됐소. 어쨌든 있는 그대로 고할 것이오. ‘경박한 세 치 혀가 조선인들을 자극했다.’

-허.

-‘그리고 자생적 친청파가 이를 무마했다.’ 어떻소?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요.

뇌호의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상 조선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겠노라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양측 모두 파격적인 조건으로 재협상을 도출하였으니 제대로 몸을 실어볼 생각이 분명했다.

이는 조선이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로 유지되는 이상 변함이 없을 것이다.

또, 이로 인하여 권세가 보장된다면 뇌호는 골수까지 조선을 위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으나 우리가 먼저 뇌호를 밀어낼 이유는 없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조선을 위하여 살도록 할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파란만장하였던 대청 외교는 일단락됐다.

남은 건 나름의 수습을 하는 것이었다.

윤휴가 송준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고, 송준길은 송준길이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윤선거는 복귀했다.

조선의 일은 이토록 잘 처리됐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먼 산을 쳐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귀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 수는 없다.

“성공적인 대청 외교를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대감.”

변승업이었다.

나는 여전히 먼 산만 바라봤다.

“대감.”

“…….”

“소인이 여기 있습니다. 어째서 딴 곳을 바라보십니까.”

“…….”

“대국을 압살한 대감의 솜씨는 잘 견식하였습니다.”

“고맙네.”

“음. 아무래도 큰일을 치르시느라 심력을 많이 소모하신 듯하니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아.”

“도끼값을 치르셔야지요. 대감.”

그랬다.

일만 산림이 지부상소에서 사용한 도끼는 모두 메이드 인 변승업이었다.

당연하게도 전액 외상이었다.

결과 나는 막대한 액수의 빚잔치를 맞이하게 됐다.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는 변승업이 보였다.

“대감?”

“아.”

“이거 아무래도 소인이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호판 대감께 가보겠습니다.”

“…….”

하마터면 욕할 뻔했다.

진심으로 욕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철저하게 을이었기에 무조건 참아냈다.

슬쩍 말을 돌리듯 말했다.

“일찍이 ‘우리’ 주상전하께서 하교하셨네.”

“바른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조선의 나무를 마음껏 사용하라!”

“…….”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일만의 나무꾼을 양병하는 걸세.”

“…….”

“이리한다면 자네는 종묘와 사직에…….”

“대감.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말만 한 게 아니라 진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붙잡았다.

체통이고 뭐고 없다.

이대로 일어나서 누구를 만나러 갈지 너무나도 뻔해서였다.

무조건 허적에게 갈 것이다.

“자네 우리끼리 이러긴가?”

“미천한 소인이 어찌 감히 지체 높으신 대감과 ‘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최종 병기까지 걷어 차버린다.

이건 정말 곤란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장 값을 치르자니 여건이 안 되는 걸 어찌하나.”

“예.”

“음. 그러지 말고 말미를 조금 더 줄 수는 없겠나?”

“대감. 청국 바다까지 가서 어류를 어획할 배는 있습니까?”

와.

진심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리 나오면 정말 답이 없다.

나는 너무 다급해졌다.

“경상도에 괜찮은 광산이 있네. 내어주겠네.”

“그저 감읍할 뿐입니다.”

이보다 공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태세 변환이었다.

“자네 갈수록 사람이 모나게 변하는군.”

“대감. 상단의 외형은 유지하며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때 뜨거웠던 결의를 잊었군.”

“대감이야말로 잊으셨습니까? 소인은 원래 상인입니다.”

“끙. 그건 그렇다만.”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죽어 가는 광산인데, 이렇게라도 개발하면 조선으로서도 좋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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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업을 물리쳤더니 유형원이 찾아왔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아니, 공명 선생께서 예까지 어찌 오셨소?”

“…….”

유형원은 안색을 싹 굳히더니 대꾸도 안 하고 앉았다.

나는 눈을 더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아니,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여긴 내 집일세.”

“군제 개혁 안 하실 겁니까.”

“기다렸다네.”

“…….”

“대체 뭐 하다가 이제 왔나? 서둘러 말하게.”

유형원의 목울대로 무언가가 넘어갔다.

대충 욕설이라는 무질서한 언어로 파악되었으나, 내 귀로 들린 게 아닌지라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혹시 서책은 살펴보셨습니까.”

“물론 아닐세. 일전에 자네가 내게 준 군제 개혁과 관련한 서책은 잘 읽어보지 않았네.”

“…….”

“생각해보게.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

“…….”

“허. 보아하니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거 같으니 말해주겠네. 나는 얼마 전까지 조선 외교의 위대한 승리를 견인하느라 잠시도 쉬지 못했네. 그러한데 한가롭게 글자나 읽을 시간이 어디 있겠나?”

“청국의 군사적 위협이 거둬진 건 확실합니까?”

이런.

아예 내 말은 무시하고 제 할 말을 꺼냈다.

나도 더 응수해주고 싶었으나 갈 길이 구만리다.

군제 개혁과 같은 엄청난 수위의 변혁(變革)은 절대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이다.

“선왕 시절에도 청국의 군사적 위협은 늘 조선이 둔 자충수의 결과물이었네. 우리가 여러 핑계로 군비 확충을 하였기에 청국으로부터 의심을 받은 것이네. 물론 국방의 중요성은 백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겠으나, 천하의 질서가 개편되며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하는 정세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건 큰 문제가 있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군비 확장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를 어찌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군영은 권세가의 권력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네. 천하의 정세와는 아예 관계가 없어. 조선의 군영은 바로 이러하였지.”

차마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권세가의 권력이라는 범주에는 왕권도 포함됐다.

내부 반란을 경계해야 할 군왕으로서는 중앙군의 확충을 추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 한 가지를 더 여쭤보겠습니다. 반란의 가능성은 없습니까?”

설마하니 이렇게 ‘훅’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군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앞에 두고 반란을 언급하다니.

정말 배포가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헛웃음이 나왔으나 단번에 집어넣었다.

표정을 싹 굳히며 말했다.

“자네 작금의 조선에서 누가 거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상 어렵지요.”

“작은 명분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나?”

“작금의 조선에는 없지요.”

“자네 그거 아나? 바로 그 말이 군비 증강을 유발하는 시발점이라는 걸.”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괜찮지만 내일을 장담할 수 없으니 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바로 작금의 조선은 무탈하다는 걸세.”

“한데, 어찌 내일을 장담…… 허. 그렇군요. 소생이 지금 자승자박의 우를 범하고 있군요.”

“알면 되었네.”

“그러나 이 또한 현실입니다. 마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만든 난세라면 응당 대군을 꾸려야겠지. 하지만, 작금의 난세는 하늘이 내린 것이기에 반대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일세. 하여, 성곽의 축조를 중단하고 군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의 대의가 될 수 있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난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해. 이 난리가 끝나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 확충은 일궈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네.”

군축 논의가 조선의 영구적인 군사력 약화로 귀결되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다.

파멸적인 재앙인 경신 대기근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는 적정 수준의 군사력은 갖춰야 한다.

만일, 내가 경신 대기근의 도래를 알지 못했다면 군축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국방의 약화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국제 정세가 아름다운 것과는 아예 별개의 일이다.

이를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천천히 환기하듯 말했다.

“나와 뇌호가 시대 정신을 관통하는 재협상을 도출하였네.”

“…….”

“위대한 협상이었으나 아직은 미완이라네. 어찌하여 그러한가. 아직 양국 모두 장벽이 남아 있기 때문일세. 청국은 황제의 승인을 거쳐야 할 것이며, 우리는 군제 개혁을 해내야 한다네.”

“…….”

“그러나 아직은 그저 문서로만 남아 있지 않겠나?”

“…….”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청국에서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질 것이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일세.”

나의 일장 연설에 유형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나 섣부르게 나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갈수록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손을 대려면 끝이 없습니다. 당장 속오군만 보십시오. 노비에게 창칼을 들게 할 수밖에 없었던 국난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노비는 군역도 지면서 주인의 일도 봐야 하는 이중고가 생겼습니다. 또한, 노비의 주인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더 악랄해졌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긴 하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은가.”

“예. 누가 뭐라고 해도 최대 문제는 군포이지요.”

유형원은 말만 꺼냈는데도 치가 떨리는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의 속사정과는 별개로 흥미로웠다.

당대 최고의 천재는 작금의 군포 제도를 어찌 바라보고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보병과 기병이 6만 6,702명이고 보인은 13만 2,160명입니다. 모두 18만 3,258명이지요. 또한, 어영청은 정병 1명에 보인 7명이 배치됩니다.”

“그렇지.”

“한데, 대감. 이미 군적은 쓸모없는 종이에 불과합니다. 명목상으로 1천 명이 복무하는 진관에 실제로는 한 명도 없는 예도 있습니다. 군사들은 밤낮으로 면포를 마련하느라 훈련도 받지 못합니다. 기병도 면포를 낼 뿐, 말을 가진 이는 없습니다.”

정말 날카로운 발언이었다.

매번 느끼지만,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도 유형원의 말을 들으면 아프다.

이는 나만이 아니라 조선의 위정자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

“…….”

“무관은 병력의 질이 아니라 군포에 초점을 맞춰 논의합니다. 1백 명으로 구성된 진관은 한 달에 2백 필을 걷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진장에 임명된 장수는 진관에서 징수할 수 있는 군포의 수량에 따라 희비가 교차합니다.”

거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저 병사라면 응당 활을 쏘고 말을 타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군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대관절 이는 무슨 허상입니까.”

“…….”

“결과, 조선의 군역제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병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는, 또 다른 조세제도가 되었을 뿐입니다. 아니, 누군가를 위한 백성의 고혈이라고 해야겠지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침묵하고 방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노력으로 호포제가 있었다.

물론, 내가 지금 반론을 펼치며 기성 정치인을 대변할 필요는 없다.

이미 유형원은 조선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호포제를 입안해도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소생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만큼 조선의 군역은 절망적인 수준입니다.”

“해서, 방법이 없었던 것일세.”

“상상할 수 있는 최대 개혁이 호포제였으니까요.”

“그런데 길이 생겼네.”

“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길입니다.”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모든 군영을 해산한다면 군포가 어찌 남을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청의 압박 혹은 실리 외교 등 다양한 명분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권세가의 반발 따위는 고려하지 않겠네.”

“조선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나서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겠습니까.”

“내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1만 산림을 총집결시켜 실체까지 입증하지 않았겠나? 누가 감히 반대하겠나?”

“…….”

유형원은 다시 침묵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평소 자네가 꿈꾸었던 군제 개혁을 언급한 것인가?”

“아닙니다.”

“어째서 자네의 구상을 꺼내지 않았나.”

“그저 가슴 속에 품었습니다. 현실로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요.”

“불가능으로 결론 내린 근거는 무엇인가.”

“전제 개혁이 전제이기 때문이지요.”

피식 웃었다.

“불가능하군.”

“예. 불가능하지요.”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저 완벽하게 현실 정치인이 된 유형원을 격하게 반겼다.

홀로.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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