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되살아나는 망령(亡靈) 그리고(2)
오늘 중대본 논의를 통하여 공식화할 것이다.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긴 했다.
국방이라는 대원칙을 떠나서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군제 개혁을 단행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망국적인 군역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적기였기에 타협하지 않고 과감하게 집행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단지 군역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이 아니라 넓은 청국의 바다를 품기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아직 닻도 안 올렸다.
그래서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감. 소생들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대감.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대감.”
……
“대감.”
등청(登廳)하고자 사가를 나섰는데 모종의 무리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다.
잡히긴 잡혔는데 낯이 익다.
아는 사람들은 아닌데, 절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다.
일찍이 나 송시열이 주도한 위대한 협상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몇 번 본 사람들이었다.
정확하게는 산림의 무리였다.
한마디로 대충 잘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데 굳이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또 굳이 사가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빤히 쳐다봤다.
잠시 시간을 내주겠다는 의미였다.
“대감. 이리 끝내실 겁니까?”
“무슨 말인가.”
“소중화가 주창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게. 주창되었던 것이네. 또한, 이미 백골이 된 가치일세.”
“대감. 불과 며칠 전까지 소중화를 부르짖으며 함께 넘실넘실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한데, 어찌 백골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내가 언제 넘실넘실 어깨춤을 추었나.”
“소생은 그리 여겼습니다.”
“됐네. 확실한 건 나는 소중화를 공식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네. 그러니 더 언급하지 말게.”
딱 잘라서 치우듯이 말했다.
그런데 사대부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상처를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쏟을 분위기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대, 대감. 정녕 소중화를 저들에게 통째로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저들? 저들이 누군가? 대체 누구길래 백골이 된 소중화를 가져가나?”
“남인입니다. 그리고 어찌 계속 백골이라고 하십니까. 소생들의 심장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남인이 저들인지 모르겠군. 다시 말하지만 소중화는 이미 사장됐네. 자네들의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것까지는 알고 싶지는 않네. 단, 입 밖으로는 꺼내지 말게.”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가겠네.”
“이미 남인들은 소중화를 중심으로 공고한 단결을 시작했습니다. 소생들은 너무나도 분통이 터집니다.”
대충 가려고 했는데, 이어진 사대부들의 말에 당황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자네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말도 횡설수설했다.
내 반응이 호의적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것일까.
사대부들은 격렬하게 말을 꺼냈다.
“소중화가 태동할 수 있었던 근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만동묘 건립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동묘라는 구심점이 없었다면 어찌 그토록 고귀한 가치가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만동묘 건립은 우리 서인 산림의 요구였습니다.”
“예. 바로 우리가 이룬 위대한 흐름이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토록 쉽게 포기하시는 겁니까?”
“대감. 소생들은 분하여 한시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속도로 내지르듯 말을 쏟아냈다.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대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명(下命)만 하십시오. 소생들이 쟁취해낼 것입니다.”
“예. 소생들은 아직 1만 산림의 지부상소가 도출한 성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지부상소 열의 또한 여전히 심장에 있습니다.”
지부상소를 들으니 도끼값이 생각났다.
자연스레 망신살이 뻗쳤던 것도 떠올랐다.
썩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부상소…… 하. 됐네. 핵심만 묻지. 남인이 단결하여 소중화를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대감.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생들이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시 사대부들의 광기를 고려할 때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슬로건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소중화는 대청 외교의 수단에 불과했기에 이제는 사장되어야 마땅하다.
이는 사전에 철저하게 약조한 내용이었다.
윤선도가 그 정도의 신의가 없을 리는 없고, 정세 판단력이 이토록 엉망일 수도 없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생존하여 고개를 들고 있단 말인가.
현실성이 있는 건 가정이 있었다.
“몇 명이 무리 지어 향수를 품을 수는 있네. 이를 확대해석하지 말게.”
“원리주의입니다.”
“뭐……?”
“남인 계열의 원리주의 무리가 소중화를 탐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아니다.
조정의 한 축을 차지하기 시작한 정파가 돌출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리 말하겠네.”
“이르십시오.”
“누구도 나서지 말게.”
“대감.”
“만일, 내 명이 없는데 산림의 이름을 운운한다면…….”
스산하게 노려봤다.
“영원히 이름을 제외해줄 것이네.”
“!!!”
“새기게. 반드시.”
경고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곧장 중대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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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 문을 거칠게 열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애매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길 꺼렸다.
보아하니 전후 사정을 파악한 것 같다.
차라리 잘됐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니까.
숨을 골랐다.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사태에 중대본의 인사가 개입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박세당을 지그시 바라봤다.
“해명하게.”
“송구합니다. 소생은 해명할 부분이 없습니다.”
“원리주의의 수장은 자네일세.”
“소생이 주창한 건 사실입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원리주의는 세력이 아닙니다. 그저 뜻에 동의한 이들의 동참한 것에 불과합니다.”
“해서?”
“소생은 누구도 통제하거나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럴 권한 자체가 없지요. 그러니 해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건가?”
“소생도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상황을 파악 중입니다.”
박세당과 눈이 마주쳤다.
도전적인 눈빛에는 진실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평소 그대로였다.
시선을 돌렸다.
남인의 영수 허적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들은 남인이라고 들었소.”
“면목이 없소.”
이는 허적과 박세당의 연륜의 차이로 기인한 답변이길 바랐다.
그리고
“본부장.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작금의 상황은 조직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오. 자생적인 움직임이라고 보는 게 옳소.”
다행이었다.
허적 역시 개입한 바가 없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소중화의 주창자로 알려진 윤선도를 바라봤다.
그는 내가 묻기 전에 입을 열었다.
“소중화가 의미 있다고 한들 조선의 국익보다 중요할 수는 없소.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간의 고생이 허사가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어리석은 행동을 하겠소. 더 말해야 하오?”
“아니외다.”
유력한 용의자들을 모두 확인했다.
천만다행으로 모두 무혐의였다.
이 정도면 됐다.
“소중화는 성공적인 재협상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오. 살아나서는 안 될 망령이외다.”
이견이 있을 리가 없다.
조선의 역량을 총집중하여 일궈낸 협상 결과였다.
그러나 소중화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무산된다.
이를 모르는 이는 없다.
또, 이 자리에 백골이 된 명나라를 부여잡고 흐느낄 정도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인사는 없다.
물론, 진심은 중요하지 않다.
현실의 자세와 태도가 핵심이니 말이다.
“대감.”
박세당이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인가?”
“군영의 해산도 포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굴욕입니다.”
“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저들은 반드시 이리 외칠 겁니다.”
“…….”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박세당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심지어 정치공학적으로도 맞았다.
반청이 골자일 수밖에 없는 소중화라는 가치는, 군영 해산을 굴욕 협상으로 만들어서 세를 무섭게 확산할 수가 있었다.
재협상 정국이 진행될 때 눈으로 봤던 소중화 광신도들의 광기를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암. 일단 공식화는 미루는 게 어떤가.”
윤선거의 제안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겠소.”
모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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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거운 한숨을 쉬며 속을 진정시킬 때였다.
“우암.”
윤선거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안일했네.”
“안일했다니?”
“대명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자극한 소중화일세. 이를 세상에 꺼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 너무나도 안일했네.”
“그건 그렇지. 그토록 뜨겁게 환호하였는데 어찌 단번에 잊을 수 있겠나.”
“답답하네.”
“어찌할 생각인가.”
“개인과 개인이 만난 술자리에서 명을 그리워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네. 그러나 이런 흐름은 곤란하지. 수수방관하다가는 순식간에 만동묘 건립까지 일궈낼 것이야. 반드시 막아야 하네.”
“그렇다면 속전속결이 답일세. 구체적으로 세력화가 되기 전에 제압해야 하네.”
“실은 그게 의문일세. 다시 생각해도 이 상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어.”
“의문이라니?”
“세력화가 아직일까?”
윤선거의 눈썹이 휘어졌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이미 상당히 진척됐다는 말인가?”
“남인 그리고 원리주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박세당의 말을 상기해보게. 원리주의는 구체적인 세력이 아니야. 사실 박세당의 연륜과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실체적인 조직을 구축하는 건 어려움이 있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단순히 명망으로만 세력을 이룬다? 조선에서 자네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거. 쓸데없는 말은 왜 하나?”
“사실이니 한 말일세.”
“되었네. 한데, 왜 하필 남인이었을까? 아니 남인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여기까지 운을 띄우자 윤선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그렇군. 이를 간과했어. 당장 손에 잡히지 않았기에 놓쳤네. 일정 수준의 세력이 아니라면 산림이 호들갑을 떨 이유도 없지. 또, 중대본의 논의에 올라올 수도 없네.”
“미촌. 원리주의를 공유한 남인일세. 그런데 영수인 허적이나 다른 지도부를 배제하였어. 그런데 그들이 기층에서 이토록 조직적일 수가 있나?”
“음. 쉽지 않지.”
“정확하게 말하게.”
“어렵네. 이 정도 속도라면 산림도 어려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윤선거가 말을 이었다.
“단적으로 기층이 빼곡하게 연결되어 이는 산림이 군현에서 따로 움직이고자 했으면 못할 건 무엇인가. 그런데 전혀 아닐세.”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무언가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또 말만 무성하게 나온다는 것이네.”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엇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그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습게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박세당의 말이 너무나도 옳지 않은가? 굴욕이라는 명분이 그들을 공고하게 만들어내었을 것이니,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군제 개혁의 신호탄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리기도 전에 장벽에 봉착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래서 다행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대, 대감.”
중대본 소속 관리 한 명이 달려왔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마, 만동묘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뛰었다.
죽을힘을 다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