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되살아나는 망령(亡靈) 그리고(6)
상념이 끝났을 때 나는 이미 중대본을 나와 걷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느껴졌다.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기에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걸어갈 뿐이었다.
많은 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걸었다.
그들의 당혹감 혹은 난처함은 내가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저 걸었다.
모두 좌우로 비켜설 뿐이었다.
머릿속은 다시 무언가를 찾으며 복잡해졌다.
조선(朝鮮).
이 두 글자의 국호는 불패였다.
오래전 한국사 최강의 무장이 이 땅에 아로새겼다.
그의 시대 조선은 찬란하게 빛났으며 기세는 그야말로 상승 불패였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던 시절, 조선은 한국사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다.
그랬다.
기어이 살려야 한다면 대명(大明)이라고 불리던 망령(亡靈)이 아니라 이성계(李成桂)였어야 한다.
심지어 지금은, 이성계를 살려서 이 땅을 상승 불패로 물들이자며 부르짖어도 짓눌러야 할 세상이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은 이성계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성계와 다투었던 대명을 바라봤다.
아니, 대명을 바라보는 이들을 앞세워 이성계라는 이름 석 자를 너무나도 초라하게 했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좌를 보았다.
허목과 유형원이 있었다.
우를 보았다.
송준길과 윤선거가 있었다.
이들의 걸음은 나와 보조를 맞췄다.
나아가지 않았고 뒤처지지 않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시선을 옮겼다.
앞을 바라봤다.
걸었다.
움직임과 동시에 머릿속은 다시 과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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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출병 D-7.
남인은 허적, 윤선도, 박세당, 윤휴의 구명(救命)에 최선을 다했다.
철저하게 정치적 관점으로 사화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제 이어질 배후 세력의 움직임을 숨죽이며 살폈다.
만일, 권세가 목적이라면 확실한 움직임이 있어야 했다.
서인의 영수가 남인의 영수를 국문하겠다고 선언한 작금의 정국은 그야말로 적기다.
그러니 중대본을 흔들고자 한다면 더 공세적으로 나서서 붕당 간의 대립을 부채질해야 한다.
서인과 남인의 반목은 중대본의 와해로 직결할 수밖에 없다.
피로 점철될 사화까지는 부담스러울지라도, 중대본의 분열을 집요하게 시도해야 한다.
이는 정략(政略)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
“…….”
“…….”
중대본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움직임이 없었다.
사라졌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애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헛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정치 권력에 관심이 없습니다.”
게다가 들불처럼 번졌던 소중화의 바람도 가라앉았다.
우상숭배는 완벽하게 고립됐다.
만동묘도 사라졌다.
다시 가정을 해야 했다.
두 가지가 떠올랐다.
1. 저들은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소중화라는 불장난을 멈췄다.
2. 아직 목표 달성 전이다. 그런데 불장난을 할 역량이 없다.
만일 1번이라면 그냥 종묘사직에 패배 선언하기로 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무조건 2번이라고 상정하기로 했다.
무조건이었다.
무조건.
“저들이 남인 진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가정으로 다시 시작하지요.”
단일 지도부의 유무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강력한 힘이 없는 게 확실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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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출병 D-6.
사화가 목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을까?
나를 바라보는 남인의 시선에는 살기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지도부의 부재로 기세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도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허적과 윤선도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인사가 버젓이 도성을 활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허목이었다.
“선생. 어찌 침묵하고 계십니까.”
“선생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서인의 횡포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예. 이대로라면 조정은 서인 일색이 되고 말 겁니다.”
사대부들이 등판을 요구하는 와중에 허목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구슬땀을 닦으며, 붓을 들었다가, 약재를 챙겼다.
그러다가 사대부들을 빤히 쳐다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들, 내가 한가해 보이나?”
“예……?”
“도성 외부에 6백여 명의 유민, 내부에는 2천여 명의 유민이 있네. 이를 모두 감당해야 할 위생국의 국장이 한가해 보이냐고 물었네.”
“서, 선생.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이 순간에도 나의 처방을 기다리는 병자가 수십 명일세. 또한, 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유민이 수백 명일세. 다시 묻지. 한가해 보이나?”
허목의 얼굴은 싸늘했다.
목소리도 싸늘했다.
눈빛은 더 싸늘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허목의 기세가 너무나도 매서웠기에, 남인들은 우물쭈물하며 감히 나서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수십 명의 병자가 약재를 구하지 못하고, 유민의 거주 정책은 그 이상 늦춰지는 걸세. 한데, 나더러 연좌에 나서라? 자네들 진정 실성했나?”
“어찌 선생의 노고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서인이 우리 남인을 도륙 내고 있습니다.”
“휴.”
허목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천근만근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분위기는 엄숙해졌다.
“나 또한 서인과 치열하게 다퉜던 세월이 있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사사로운 욕심이나 권세를 탐하여 나선 적은 없었네. 오직 남인의 가치가 옳다고 여겼을 뿐이네. 지금도 마찬가지일세.”
“소생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자네들은 모르지.”
“예?”
“나는 살아 있는 백성을 죽이지 않고자 하루를 사는데, 자네들은 망령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한데, 어찌 자네들과 나의 길이 같은가?”
“…….”
“망령의 부활을 꾀할 시간에 백성을 살피고, 제단에 올릴 음식으로 백성을 먹이게.”
저런 언변이라니.
역시 우회하는 법이 없는 허목이었다.
듣고 있노라니 내 속이 다 시원했다.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허. 본부장 대감께서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드디어 미약한 내 존재감을 인지하는 자가 나타났다.
“기어이 허목 선생까지 추포하실 요량입니까?”
“참으로…… 예. 참으로.”
바쁘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허 국장. 위생국의 일은 계속하실 요량이오?”
“…….”
“동지들이 저토록 찾는데 내가 어찌 지켜만 보겠소.”
공기는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조해졌다.
그리고 누가 봐도 개연성이 넘치는 송시열이었다.
허목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귀공의 졸렬함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모르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건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요.”
“참으로 무도한 인사로다.”
대놓고 장부나 꺼내라는 듯 쳐다봤다.
이제 허목까지 찍어내려고 여기까지 직접 온 나를 쳐다보는 남인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경멸이 가득했다.
또,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참으로 귀공답소.”
“이제 들어가겠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가겠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마음껏 하시오.”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생각에 잠긴 유형원이 보였다.
얼굴이 제법 많이 상했다.
이는 바꿔 말해서 어떤 성과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앉자마자 물었다.
“파악한 게 있는가?”
“다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남인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사화의 길로 걸어가는 시국이었다.
남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초유의 지도부 공백 사태로 혼란에 빠졌을 뿐이었다.
이미 불개입 선언을 한 허목에게 달려와 읍소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유자(儒者)로서 어찌 괴력난신을 입에 담습니까?”
“사문난적인데 뭔들 못하겠나?”
“정국이 엄중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혹시 한가합니까?”
“…….”
응수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중화가 자생적 흐름은 아닐세.”
“예. 대청 외교에서 비롯한 흐름이었다면 이미 다른 이들의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력이 존재하지만, 권세가 목적은 아닐세.”
“소생은 여기서 확인한 게 있습니다. 저들은 중대본 차원으로 소중화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겁니다.”
나 역시 동의했다.
작금의 정국을 고려할 때 유형원의 가정은 진실을 향해서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일세. 저들의 목표를 떠나서, 중대본이 소중화에 동의하고 만동묘 건립을 공식화한다면 동력 자체가 사라질 것이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어찌하여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쉬운 가정은 중대본에 저들과 한패가 있다는 거겠지.”
“그 가정으로 시작한 고육지책은 수명을 다하고 있지요.”
“그렇지.”
“그러나 덫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대감의 졸렬함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
무시하고 생각이나 해보자.
과연 저들의 확신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서인의 영수, 남인의 영수, 원리주의의 영수 그리고 소중화의 주창자까지.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의 수장들이 집결한 중대본이 친명 사대를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대체 어디서 기인할 수 있을까.
백 번을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일전에 대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목표에 대해서 말입니다.”
고육지책을 입안하였을 때 한 말이 있었다.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쩌면 가정이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왔다.
그러니 유형원도 이를 언급하는 것이다.
대청 외교의 결과물.
중대본이 추진하는 내정 개혁의 백미(白眉).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그들이 왜 중대본을 흔드냐는 것이외다.
-중대본이 정적을 만들었다면 오직 하나, 군제 개혁이오.
바로 군제 개혁이었다.
작금의 군제 개혁은 군영해산으로 귀결되기에, 반청의 DNA를 가진 소중화를 품을 수 없다.
“그런데 군제 개혁이 목표라고 할지라도 의문은 남습니다.”
나 역시 이를 늘 염두에 두었기에 한시도 쉬지 않고 살폈다.
작은 흐름까지 놓치지 않았다.
볼수록 의문이 생겼다.
저들이 이교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숨겨진 쟁점은 무려 군영해산일세.”
이교도에게 한마디만 하면 된다.
군영해산을 둘러싼 사실만 전달하면 이교도들은 분개하여 분연히 일어날 것이니 말이다.
조선의 국방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몰아치면 속수무책이다.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 큰 외교적 굴욕이라며 총공세를 감행해도 될 사안이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대청 외교를 주도한 건 서인일세. 한데, 서인의 영수가 남인의 지도부를 구금시켰다? 이보다 더 좋은 정국이 어디 있겠나.”
“그렇지요. 대놓고 목을 내밀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군제 개혁을 좌초시킬 수 있는 호재인데도 말입니다.”
“저들의 목표가 군제 개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덮을 수 없는 이유일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아예 사라졌다.
숨은 게 아니라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였던 이연도 이 정도는 아니다.
저들은 정치의 귀재란 말인가?
아니면 조선의 재야에 누가 존재하여 진두지휘하고 있을까?
친명 사대를 필생의 신념으로 삼은 누군가가 눈을 부라리고 있을까?
설마 이미 목표를 달성하였기에 소중화를 과감하게 버린 것일까?
저들은 감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일까?
진정 조선에 프리메이슨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진심으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
그런데 말이다.
진정 저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우리는 어찌할 것인가.
이대로 백기를 들고 모든 걸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나아가야 한다.
하면, 어찌 나아가는 것이 옳은가.
이럴 때 답은 하나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이거 어쩌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씀입니까.”
“왜 우리가 저들의 목표를 알아야 하나?”
“예?”
“우리는 어차피 망령도 치워야 하고, 군제 개혁도 도모해야 하지 않나?”
이게 맞다.
우회하려다가 길을 완벽하게 잘못 찾은 것이다.
“저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대로라면 군제 개혁은 영원히 도모할 수 없게 되네. 이는 대청 외교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네. 결과는 어찌 되겠나? 소중화가 만발한 조선이 될 뿐일세.”
이대로라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앞이 벼랑 끝인데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지금껏 중대본은 조선의 기존 틀을 유지하며 걸어왔네. 그러나 이제는 아닐세. 이미 개혁의 길로 들어섰지 않은가. 유사 이래 싸움을 피하고 개혁에 성공한 사례가 있던가.”
“…….”
“우리가 우회로만 찾았기에 일이 이토록 복잡해진 것이네.”
주먹을 꽉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원칙을.
“군제 개혁을 공인할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