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49화 (149/298)

149화 되살아나는 망령(亡靈) 그리고(9)

훈련도감 출병 D-1.

눈을 비비며 찾아봤다.

“소생들은 오직 신심(信心)으로 일어났습니다. 한데, 이리 모욕하실 수는 없습니다!”

귀를 열어서 들어봤다.

“오직 진심(眞心)으로 연좌하는 선비에게 이권을 탐하는 무리라며 조롱하실 수는 없습니다.”

소중화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소생들이 호포제에 동의하지 않은 건 대의(大義)를 위함이지, 절대 군포를 회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군포를 부르짖는 이익 집단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니, 군포는 핵심이 아니라며 처절할 정도로 고함을 지르는 위선의 기득권들이 있었다.

단 하루 만에 비참할 정도로 찌그러진 위민의 가면을 애써 부여잡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조선의 사대부는 이렇다.

탐욕스러워도 탐욕을 부끄러워한다.

무능하더라도 무능을 기피(忌避)한다.

위선(僞善)일지라도 위민(爲民)을 탐한다.

참으로 모순적이지만 조선의 사대부는 이러했다.

하여, 사대부들은 호포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곳간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항변해야 했다.

그리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 연좌는 그간의 과정과는 결이 달랐다.

“오직 진심(眞心)이었습니다.”

“오직 신심(信心)이었습니다.”

“오직 대의(大義)였습니다.”

진심(眞心), 신심(信心) 그리고 대의(大義)…….

평소 나오지 않던 단어들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핵심적인 구호였던 굴욕(屈辱)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이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현상이었다.

굴욕이라는 구호는 모든 걸 함축하고 정확한 상황을 규정했다.

하여, 명확하고 쉽게 정치적 요구를 표출할 수 있다.

반면, 진심, 신심, 대의와 같은 단어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러하므로 어떤 요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자연스레 말이 길어지며 결론 도출은 난해하다.

자고로 정치란 언어의 싸움이다.

직관적일수록 힘을 얻고, 실질적인 명분이 쌓인다.

하여, 공세를 점하는 이는 명확한 언어를 사용한다.

반면, 수세에 밀린 이는 추상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지금이 그랬다.

진심, 신심 그리고 대의.

모든 정치적 행위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추상적인 구호의 등장이라는 건 결국, 연좌의 명분이 수세에 몰렸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힘이 실릴 수 없다.

아무리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를지라도 그러했다.

나는 물끄러미 연좌를 바라봤다.

어제만 해도 2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족히 2배는 되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사대부가 일제히 한 명을 규탄했다.

“씻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발언을 철회하십시오!”

그랬다.

저들의 화력이 일제히 나, 송시열에게로 향한 것이다.

바야흐로 전선은 반 송시열로 굳어졌다.

보고 있노라니 딱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너무나도 걸맞은 구호였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자네들을 보면 떠오르는 말이 있네.”

“듣기 싫습니다! 발언을 철회하십시오!”

“그전에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격렬한 항의였다.

인원이 많아져서 그런지 기세도 아주 남달랐다.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개가 참으로 남다르군.”

“또 조롱하시는 겁니까?”

“허. 조롱이라니. 크게 치하할 생각이네. 앞으로 말할 사람은 이름을 꼭 먼저 언급하게.”

“…….”

“조용하고 좋군. 그나저나 하루 만에 분기탱천하여 수천 명이나 모였나?”

“대감! 그새 집결한 게 아니라, 먼 군현에서 오늘 당도한 것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예?”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

됐다.

말장난은 여기까지.

나는 표정을 싹 굳혔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딱 적합한 말이었다.

손을 뻗으며 말했다.

“조선의 사대부여, 단결하라.”

비릿하게 웃었다.

오늘 나는 조선의 역사에 남을 불후의 명언을 던질 것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군포뿐이고, 얻을 것은 면세다.”

“!!!”

“!!!”

“!!!”

막힌 곳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정확하였기에 너무나도 속이 시원했다.

동시에 수천 명의 사대부가 침묵했다.

표정은 완전하게 썩었다.

조롱은 여기까지.

이제 현실을 다시 알려줄 시간이었다.

턱짓하며 말했다.

“자네.”

“…….”

“얼굴을 기억해두겠네.”

“!!!”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술은 거칠게 떨렸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이었다.

대의, 진심, 신심……?

이를 치울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현실이었다.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시선을 슬쩍 옮기면서 말했다.

“자네가 일전에 내 말을 잘랐지?”

“!!!”

“죽어도 잊지 않겠네.”

“!!!”

조만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다.

굴욕, 소중화, 만동묘……?

저들이 말하는 현실을 짓밟을 수 있는 공포가 바로 나의 졸렬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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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송시열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되돌아보면 여태 내가 상대한 이들은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으면 전투 의지가 치솟는 거물들이었다.

허목, 허적, 윤선도, 윤휴 그리고 유형원까지.

특히 유형원은 원래 귀향하여 살다가 상경하였기에, 송시열이 구현할 수 있는 물리력이 전혀 두렵지 않은 인물이었다.

관직, 귀양 그리고 사화까지.

같은 서인인 송준길과 윤선거 역시 나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일까?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가진 정치적 힘을 제대로 사용할 일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건전한 사대부의 표상이었을 뿐이었다.

“…….”

뭐. 그러하다.

어쨌든 나는 송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거물을 포용하고자 모든 걸 내려야만 했다.

그들에게 송시열이라는 명함을 내밀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대적(大敵)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과 혈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나의 노력은 성공하였고, 중대본은 대적의 선발대와 국지전(局地戰)을 펼치며 여기까지 힘겹게 걸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저들을 짓눌러야 대적 경신대기근을 견제할 수 있고, 꾸준하게 펼쳐질 국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송시열이 쌓아온 이름의 무게를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쉬지 않고 송시열이라는 석 자를 휘둘렀고 효과는 엄청났다.

나도 놀라운 정도였다.

-이름이 뭔가?

이 간단한 말 한마디에 서인은 물론이거니와 남인까지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야말로 평생의 심력이 집결하여 창출해낸 위대한 졸렬함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언행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설명해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이는 마치 역병처럼 엄청난 전파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나의 행동에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있을 수 없다고, 그간 많은 이들이 말한 이유를 이제야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고야 말았다.

조선에는 정말 쉬운 길이 있다는 걸.

이는 송시열이 평생의 심력으로 개척하여 내게 선사한 것이었다.

“…….”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이대로 우직하게 나아가기로 했다.

하여, 망령에 울고 웃는 조선의 사대부를 모조리 제압할 것이다.

아니, 그리할 예정이었다.

“허…….”

호포제로 사대부를 압살하고 송시열의 졸렬함으로 농락하니 ‘저들이’ 파악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적당한 온도의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상기했다.

이 나라의 국호, 조선(朝鮮)을.

이 두 글자의 국호에는 민본의 대의가 아로새겨져 있다.

과연 이는 무엇인가.

조선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없다.

반대에도 명분이 있다.

반대에도 국익이 있다.

반대에도 흐름이 있다.

개혁은 절대적인 선이 될 수 없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일지라도 방안은 한계가 있기에 그러했다.

하여, 개혁의 대상조차 절대 악이 아니었다.

조선은 바로 이런 나라였다.

그러나 이를 넘어선 무리라면 어찌 행동할까?

만일, 군제 개혁을 좌초시키려는 의도가 종래 조선의 성질과 다르면 어찌 될까?

반청을 품은 소중화가 군제 개혁에 반대할지라도 국방을 운운한다.

그들의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

호포제와 충돌하며 도덕성이 무너졌으나 논제가 붕괴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없었다.

윤휴와 윤증의 주도로 시작된 군포 정국의 요구는 간단했다.

-호포제 관철로 모두가 군포를 내거나, 군영 해산으로 모두가 군포를 내지 않거나.

그리고 단번에 올라온 몇 장의 상소.

[작금의 ‘군포’ 논쟁은 치열한 논의를 거쳐야 하옵니다. ‘군포’는 국방의 핵심이기에 조정에서 공론을 수렴하여…….]

[‘군포’는 모두 내거나 혹은 모두 내지 않을 수 있는 조세가 아니옵니다. 신은 작금의 정국이 참으로 우려되옵니다. 그러하니 부디 조정에서 공론을 수렴하여…….]

말 그대로 먹물조차 마르지도 않은 상소였다.

나의 조롱까지 담긴 내용을 볼 때 오늘 듣고, 오늘 써서, 오늘 보낸 것이다.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교묘하게 흐리고 있다.

유독 ‘군포’를 강조한 상소들.

이 모든 추론의 결과, 남은 건 하나였다.

저들의 목적은 군제 개혁의 좌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

군제 개혁이 지금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딱 지금만 피하면 된다는 걸 의미한다.

조선에서 군제 개혁의 시기만 늦춰지길 바라는 이들.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전국에 진영에 똬리 튼 무장들이다.

유형원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관은 병력의 질이 아니라 군포에 초점을 맞춰 논의합니다. 1백 명으로 구성된 진관은 한 달에 2백 필을 걷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진장에 임명된 장수는 진관에서 징수할 수 있는 군포의 수량에 따라 희비가 교차합니다.

-결과, 조선의 군역제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병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는 또 다른 조세제도가 되었을 뿐입니다. 아니, 누군가를 위한 백성의 고혈이라고 해야겠지요.

군포의 징수로 사사롭게 이익을 취한 이들이 바로 배후였다.

이제 이 나라 조선의 최고 결정권자를 만나야 할 시간이었다.

궐에 이르렀다.

그러나 막혔다.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교지가 있느냐?”

“대감.”

“교지가 없으면 나를 막을 수 없다.”

“있습니다.”

“뭐…….”

황급히 펼쳤다.

그리고

[윤허하노라.]

생략된 말은 ‘무엇이든’일 것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절대적인 신뢰였다.

*****

훈련도감 출병 D-Day

모든 상념을 끝냈다.

다시 확인하여 하나씩 끼어 맞춰도 모든 게 정확하게 맞았다.

원리주의는 사족을 중심으로 번졌다.

그들은 사족의 지척에 있다.

소중화는 반청과 직결한다.

국방을 책임지는 그들은 표면상 반청의 기수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 성리학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다.

하나로 묶어낼 수 없었기에 만동묘가 아닌 개별적으로 만력제의 제사를 지냈다.

또, 운을 띄울 수는 있기에 불을 지피는 건 가능했다.

그렇다면 소중화가 자생적인 흐름을 보였던 이유까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정략이라면 고단수다.

정치적 논리라면 요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정객이 필요하다.

그러나 군사 작전은 아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게릴라전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집행할 수 있었다.

애초 거대 세력화 따위는 목표가 아니었기에, 사령탑을 두고 내분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소중화도 목표가 아니었기에, 자생적 흐름이 어찌 흘러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군제 개혁을 미루는 걸 원했을 뿐이다.

부임 기간 군포를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으니 말이다.

또한, 저들은 정치 권력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애초 정치 권력을 확보할 수 없는 무리였다.

그럴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다.

지척에 이르렀다.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는 보지 않아도 이들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척에 이르렀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쏠렸다.

불안, 동요, 당혹 등.

이해할 수 있다.

저들의 감정을.

하지만 나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교지를 들었다.

호명했다.

“훈련대장 이완.”

대답을 듣지 않고 외쳤다.

“이일선의 지령을 받아 군제 개혁을 방해한 간자(間者) 4천여 명을 모조리 압송하라.”

“!!!”

“!!!”

“!!!”

그 즉시 이미 배치되었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육조 거리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조선의 척추인 사대부가 진행하는 성스러운 연좌를, 조선 최고의 강군 훈련도감이 강제 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1392년 이후 최초였다.

명분과 사안 그리고 대처까지 모두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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