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52화 (152/298)

152화 오늘 바로 오늘(3)

그간 군포 논쟁은 중대본이 사대부를 일방적으로 타격하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흐름을 주도하고자 애써 노력할 생각이 없었다.

윤휴와 윤증에 의하여 호포제가 제안되었을 때 세상에 나온 구호가 있다.

-모두가 군포를 낸다.

-모두가 군포를 내지 않는다.

이토록 위대한 논제로 토론을 진행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결과, 어떤 경우라도 거대한 파급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뤄질지라도 조선은 변화하고, 또한 발전을 이룰 것이다.

내가 후자를 원할지라도 이 논쟁은 너무나도 의미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역사에 남을 예송논쟁이다.

원 역사의 예송 논쟁을 덮을 군포 논쟁의 신호탄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거는 기대가 컸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시작은 난관이었다.

“모두가 군포를 내지 않는 건 군영의 해산입니다. 이는 굴욕입니다.”

이교도들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이다.

나는 각오를 다시 단단하게 먹었다.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굴욕이기에 수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제자리인가.”

“이는 본질이기에 그러합니다. 대감. 선례로 남을 겁니다.”

“무엇이 본질이며 선례로 남는다는 것인가.”

“열의로 가득하였던 순간, 소생들은 병자년의 수모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었습니다.”

“…….”

“결국, 공론이 아니라 밀담이었습니다. 이를 기어이 강행한다면 훗날 누가 왕실과 조정을 위하여 쉽사리 들떠 일어서겠습니까. 매 순간 의도를 의심할 것입니다. 하여, 결정적 시기는 흘러갈 것이며 조선은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면계약 자체를 규탄하는 것이다.

이 또한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공론을 중시하는 조선에서 이번 일은 아예 궤를 달리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고민의 끝에 나온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 역시 정공법을 취하는 것이다.

바로 저들이 느꼈을 정당한 분노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여, 사과했다.

“용서를 구하겠네.”

“…….”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했다.

이것이 옳기에 그러했다.

“내가 자네들을 이용했네.”

“……무슨 말씀입니까.”

“원리주의, 위정척사 그리고 사문난적.”

“…….”

“이미 조선의 성리학은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었네. 자네들이 가고자 한 길과 방향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어. 그러나 이를 과거로 되돌린 건 오직 나의 판단이었네.”

“대감……?”

“자네들의 심장을 이용했네.”

“…….”

“대명에 대한 뜨거운 연모를 일으켜, 대청 외교를 승리로 귀결하였으니까.”

“…….”

“세상에 없던 망령을 꺼낸 건 내가 맞아. 이를 부정하지 않겠네.”

다시금 절절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며 4천 명의 사대부를 바라봤다.

“그러나 나를 욕할지라도 우리의 시간까지 후회하지는 말게.”

“…….”

“그 뜨거웠던 시간은 기록이 되어 역사로 남을 것이네. 자네들은 진심은 역사에 오롯이 아로새겨질 것이네. 그러니 오직 나를 욕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침묵이 시작되려고 할 때 백성들 틈에서 지켜보던 무명의 사대부가 나서며 말했다.

“묻습니다.”

“무엇인가.”

“대감께서는 부당함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이 행하셨습니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물음이었다.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관의 붓은 쉬지 않고 모든 내용을 기록했다.

“이미 말하였듯 나는 생존을 도모했다. 하여, 바라본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풍요로운 중원이었다.”

“설마 북벌을 이르십니까.”

“참으로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하다.”

“바라본들 탐하지 않을 것이며, 탐하지 않으니 품을 수 없는데 어찌 고려하십니까.”

“탐하지 않는다고 하여 품을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바라보았다.”

“진실로 모순이 아닙니까?”

결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원의 풍요로움을 이 땅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하여, 모순이 아니다.”

“…….”

“이를 어찌 문제가 있다고 하겠는가.”

죽어도 말을 해야만 하는 사대부다.

침묵은 반론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환기하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조선의 창과 칼은 끝내 청국에 패배하였으나 오늘 우리는 승리하였다. 이는 조선의 쾌거다. 이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이다.”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오늘의 쟁의를 겉핥기로 끝낼 수 없다.

피부가 찢어지고, 심장이 아프더라도 모든 본질을 꺼내야 한다.

나는 그리할 것이다.

“군영의 해산은 생존이 아니라 자멸이라고 하였다.”

길을 간다는 건 이토록 어렵다.

가야 할 길이었으나 가지 않은 길이기에 어렵다.

가고 싶은 길이 있기에 더욱 어렵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말했다.

“한데, 내가 군영만 해산하겠다고 약조하였겠는가.”

“예……?”

“10년간 성을 축조하거나 보수하지도 않는다.”

“!!!”

협상의 이면을 모두 공개했다.

저들이 받을 충격의 정도를 안다.

물론, 그저 알기만 할 뿐이다.

“대, 대감! 기어이 조선의 국방을 포기하셨습니까.”

“포기?”

“저들에게 모두 내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무엇을 내어주었는가.”

“조선에서 산성은 수성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놀랐는가?”

“당연한 일입니다.”

“백성은?”

“예……?”

“작금의 시대에 요역을 부과하면 백성은 심장이 멎을 것이네.”

멈칫한 사대부들을 보며 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국고를 모두 사용해도 구휼미를 마련하기도 어려운데 성곽을 무슨 수로 축조하나?”

이는 현실이었다.

조선은 여력이 없다.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은 일과 폐단을 내어주고 구휼미를 구했으며 청국의 넓은 바다에서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승리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승리인가.”

늘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살펴야 할 대국과의 외교에서 우리가 요구하여 얻어냈다.

이것이야말로 외교로서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성과다.

“부월로 십만 강병을 통솔하여 북진해야만 중원의 풍요로움을 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가당치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수십, 수백 척의 어선을 동원하여 넓은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원을 품는 쾌거가 아니겠는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쉬지 않고 외쳤다.

“부월을 휘두르면 막대한 군량이 소모된다. 그러나 우리는 굶어 죽어가는 백성을 위하여 외교로서 쌀을 확보했다. 그 대가로 백성의 고혈을 짜는 군영을 치우는 게 어찌 죄가 될 것이며 굴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전한 침묵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다른 지점이 있었다.

참으로 씁쓸한 이유였다.

“어찌하여 쾌거와 승리라는 단어에 몸이 위축되는가.”

그랬다.

이들은 쾌거와 승리라는 단어의 등장이 이다지도 몸을 움츠린 것이다.

지금껏 패기와 자신감에 기반한 기개를 보였던 이들이 말이다.

이는 괴이한 것이 아니라 안쓰러웠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는 너희가 패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

“단지 패배의 경험이 잦아 익숙한 것이 아니라, 패배한 역사를 승리한 시간으로 기어이 창조하였기에 그러한 것이다.”

창조한 승리의 역사.

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오늘 이를 뿌리 뽑을 것이다.

다시 소란이 일었다.

수십 명의 병졸이 수레를 끌며 다가왔다.

“대저 유학은 괴력난신을 경계한다.”

“…….”

사대부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수레로 시선이 쏠리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새 수레는 지척에 이르렀다.

짐이 잔뜩 실려 있었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기 망령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두 글자가 있었다.

[만력(萬曆)……]

그랬다.

“!!!”

“!!!”

“!!!”

바로 망령의 상징물이었다.

나는 봤다.

사대부들의 어깨가 흠칫하며,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걸.

지금 당장이라도 거동하여 상징물을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강렬한 이교도의 본능이 사대부들을 부추기고 있을 것이다.

이는 태생으로 가진 정치 DNA였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늘 그렇듯 귀신을 섬기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말을 꺼냈다.

DNA의 부름에 화답하듯 사대부들의 웅성거림은 커졌다.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너희를 이르는 말이다.”

“소생들은…….”

“무당이 굿을 하면 너희는 제사를 지낸다.”

“!!!”

“무당이 요설을 내뱉으며 칼춤을 출 때 너희는 재조지은을 부르짖으며 머리를 박는다.”

“!!!”

괴이한 분위기를 느꼈을까?

사대부들은 불안한 듯 숨을 거칠게 쉬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저들은 내 말에서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망령의 상징물이 등장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뿐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접신(接神).”

“예……?”

“창조된 승리의 역사는 접신의 결과물이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들은 이미 망령과 접하였기에 온전한 정신이 아니다.”

“대감. 소생들은…….”

손을 내저었다.

“소중화는 조선이 중화의 적통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완벽한 중화를 탐하는 청국의 허를 찌르는 비수에 불과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적의 급소를 찔렀다.

대적을 감당했기에 순간을 기리고 도구를 기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도구를 기리고 순간을 기억할 수는 없다.

“조선이 중화의 적통이 될 수도 있다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 아직 남아 있다. 이를 접신이 아니면 대체 어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도구가 휘둘렀던 주체를 잠식한 것에 불과하다.

작금의 조선이 바로 이러했다.

이리되면 어찌 되겠는가.

단지 병장기의 성능에 감탄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침내 너희는 대명의 패배까지 끌어안고 있다. 중화의 적통이기에 진실한 중화인 대명의 역사를 제 역사로 오인하는 것이다.”

끝내 도구를 만든 장인을 찾게 된다.

“망령은 너희에게 속삭일 것이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노라고. 진정한 승리는 중원의 도모이며 쾌거는 중화의 성립이라고. 하여, 자네들은 승리와 쾌거가 불안한 것이네. 구현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창조된 승리는 현실을 불안하게 한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조선의 패배만을 새기며 나아가야 하거늘, 감당하지 못할 중원의 역사까지 품고 있으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이는 진실로 접신의 결과다.”

어찌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단호하게 말했다.

“병장기를 만든 장인의 솜씨가 훌륭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라, 이를 휘두른 장수의 노력이 도출한 결과다. 어찌 대승을 병장기와 장인에게 돌리는가. 우리의 이룬 쾌거를 어찌 망국과 망국의 황제에게 바치는가. 오직 우리 조선의 승리이거늘.”

이교도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들의 눈동자는 혼탁했다.

“만력제.”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망령이 이토록 조선을 어지럽힐 수 있는 건, 생전 조선을 위한 황제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진실을 꺼낼 때였다.

역사의 잔혹한 진실 말이다.

“단지 그가 대명의 황제이기에 그러하다. 단지 이것이 전부다.”

“대감. 재조지은이었습니다.”

“재조지은이 옳다.”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무너진 나라를 되살려준 은혜. 진실로 옳다.”

조소를 담아서 말했다.

“그가 없었다면 청사의 고압적인 태도를 어찌 짓눌렀을 것이며, 청사의 요구를 어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며, 외교적 승리를 어찌 견인할 수 있었겠는가.”

“!!!”

“그러하니 어찌 재조지은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나는 진실로 그가 고맙다.”

“!!!”

“내게 만력제는 너무나도 유용하고 날카로운 도구였다. 적을 단번에 베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

충격을 받은 저들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대명을 위하여 협상을 주도하지 않았다.”

“…….”

“나는 단 한 순간도 대명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았다.”

“…….”

“나는 결단코 중화의 자부심을 상기하지 않았다.”

좌를 바라봤다.

우를 바라봤다.

유학을 익힌 자는 충격에 휩싸였다.

유학을 익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쟁의가 저들에게는 지루함을 주었을 뿐이었다.

사관을 바라봤다.

붓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

오늘 우리의 쟁의가 글자로만 치열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의 심장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루함과 무료함이었으니까.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내 몸속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런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되돌아본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확실한 건 나는 오늘 고작 이따위 말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굴욕이 아니라는 걸 해명하고자 백성 앞에 서지 않았다.

백성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조소가 지어졌다.

일갈했다.

“대체 우리가 무엇이 부족하여 멸망한 나라의 황제를 하늘로 섬겨야 할 것이며!”

부르짖었다.

“대체 이 나라 조선의 무엇이 부족하여 이미 종묘사직이 무너진 나라를 오매불망 그리워해야 하나?“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대체 대명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토록 싸워야 하나?“

나는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이 말을 해야 했다.

“대관절 대명이…….”

“대관절 복제가…….”

“우리 백성과 무슨 상관이 있나?”

백성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었나.

“미증유의 기근과 싸우는 위정자의 쟁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지 않은가.”

개탄스러웠다.

오늘을 기다렸다.

밤새 설렜다.

조선의 사대부와 군포를 논할 수 있기에 그러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굴욕, 소중화, 재조지은…….

어찌하여 이 나라는 여태껏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나 홀로 성현을 죽이고 성리학을 부정한 것이 아닌가.

나는 대체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래. 맞다.

이들은 백성이 기근에 허덕일 때 복제로 목숨을 걸었던 무리인데 말이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웃음기를 싹 거뒀다.

아니, 감정이라고는 아예 사라졌다.

이교도를 바라봤다.

“어찌하여 역성을 위대하다 하며 혁명이라고 일컫는지 아는가?”

“…….”

사대부들을 바라봤다.

“망국의 순간이 환희가 되었기에 그러했다.”

백성들을 바라봤다.

“동서고금을 살펴보라. 망국의 순간에 백성이 고통스럽지 않은 사례가 있었던가? 없다. 오직 조선의 시작이 그러했고, 선대의 역성혁명만이 그러했다.”

망국은 백성의 피와 절규를 동반한다.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졌다면 노예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위정자의 무능이라면 군웅할거라는 난세가 개막된다.

그러나 고려와 망국과 조선의 창업은 아니었다.

오직 이 나라의 시작만이 아니었다.

“한데 말이다. 단지 고려가 썩은 귀족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나? 고려가 백성을 잡아먹는 괴물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나? 고려가 지옥이었기에 필연적인 현상이었나?”

망국의 길을 걷는 나라는 모두 지옥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성만은 달랐다.

“상기하라. 그 시절 백성이 환호성을 터트릴 때 우리의 선대는 누구보다도 치열했다.”

과실은 오직 백성의 것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직 백성만을 위하여 존재하였던 열의의 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을 보라.”

참으로 분하였다.

“작금의 시대는 백성이 지쳤고, 우리만 치열하다.”

치열한 건 같다.

한데, 어찌하여 우리의 백성은 지쳤는가.

“선대는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에게 나누고자 치열하였으나, 우리는 소중화를 정립하고 망령을 위하여 굿을 하고자 치열하다.”

치열하다는 현상만 같을 뿐이었다.

그러하기에 백성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작금의 조선은 백성이 생존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내할 때, 성리학자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왜? 대명이라는 고향을 찾았으니까.”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들도 성리학자이며, 이들도 성리학자인데 대체 무엇이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대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어찌하여 우리는 선대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인가!”

5할?

아니,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칼을 휘두르듯 날카롭게 외쳤다.

“고려 말의 난세는 지옥이었고, 작금의 난세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한가? 진정 그리 생각하는가? 작금의 난세가 진정 고려의 지옥보다 평안하다고 생각하는가!”

작금의 조선은 고려가 만든 지옥보다 절대 평안하지 않다.

아니, 더 참혹한 시절이다.

고려의 난세는 사람이 만들었으나, 작금의 난세는 하늘이 만든 것이니 말이다.

“이 나라의 시작을 열었던 선대는 사전까지 혁파하였는데, 우리는 망령이나 부여잡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비루하였다.

“선대는 오직 앞으로 나아가며 민본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임진년의 재조지은을 부여잡고 있는가. 어찌하여 과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가!”

더는 쟁의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이 보기에 참담하다.

사관의 붓이 어찌 움직일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소중화에 미친 이 시절 사대부는 역사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하여, 논쟁이 아닌 선택지를 던졌다.

“오늘 우리의 논쟁은!”

손을 내질렀다.

“모두 군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되어야 한다.”

싸늘하게 노려봤다.

“이는 마지막 물음이다.”

다시 답을 회피한다면 나는 이일선을 꺼낼 것이다.

하여, 이들을 모조리 벌할 것이다.

기근에 허덕이는 나라다.

망령이나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게 먹일 쌀은 없다.

아깝다.

너무나도.

그때였다.

“대감. 소생들이 군포를 내기 어려운 건 아닙니다.”

백성들과 어깨를 함께 하던 사대부들 몇 명이 나섰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다면 군포를 아끼겠습니까.”

심장이 꿈틀거렸다.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곧 뜨거워졌다.

지금

“기근에 고통받는 백성을 위하여 곳간을 열었던 소생들입니다.”

쟁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진실로 원한 쟁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저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사관의 붓은 부지런했다.

또한, 정공법이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하면, 호포제를 동의하는가?”

말과 동시에 백성들을 살폈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이미 군포를 결의하였는데 어찌하여 불가한가.”

“비단 군포의 일이 아니기에 그러합니다. 호포제로 양반이 군역을 치르면 그 이후는 어찌 됩니까. 파급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후라. 어떤 파급이 있는가.”

“백성의 노고를 줄이고자 양반이 요역(徭役)까지 치르게 된다면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

“못할 건 또 무엇인가.”

“하여 발생할 통치의 공백은 어찌하실 겁니까.”

“…….”

이는 그야말로 배수진이었다.

더는 회피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

이는 너무나도 바람직한 쟁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저들에게 논리를 보충할 시간을 내어주었다.

“역의 부과와 통치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통치는 오직 사대부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 뿐, 누구나 관복을 입고 어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밤낮을 지새우며 학문에 정진해도 출사하기 어렵습니다. 한데, 상민과 같은 역을 치른다면 어찌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공부하느라 역을 치를 시간이 없다는 의미였다.

사상과 관점을 떠나서 이건 너무 맞는 말이었다.

또, 현실적으로 이 시절 조선의 위정자는 사대부가 수행할 수밖에 없다.

절대로 다른 계층이 대체할 수 없다.

일국의 통치라는 건 철학이 부재한 이가 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어려우면 모든 재산을 바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굶주리면 곳간을 모두 열어 나눌 수 있습니다.”

“변고가 터지면 의기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포제는 아닙니다.”

“예. 호포제의 파급은 고작 군포로 그치지 않습니다.”

“호포제는 양반이 상민과 같아지는 걸 의미합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이 통치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조세의 문제가 아니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지금껏 그 어떤 논제를 대할 때보다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자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을 지독하게 녹이고 있었다.

이는 현실에 기반한 이들의 인식 혹은 신념일까.

아니면, 벼랑 끝에 몰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변호에 불과할까.

내가 알 수는 없다.

그러니 진실을 들으면 될 일이다.

“하면, 모두 내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 말에 백성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속이 참으로 쓰라렸다.

아니, 아팠다.

군포라는 조세가 저들을 얼마나 짓눌렀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생들이 동의하고 소중화를 버리며 망령을 치우면 대감께서는 무엇을 내어주실 겁니까.”

답변은 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생들은 길을 잃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진정 이를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저들은 사문난적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희의 성리학처럼 정확한 철학(哲學)을 바라고 있었다.

“내어줄 것이다.”

환하게 웃었다.

“무엇입니까.”

나는 드디어 이 말을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의 길이다.”

이는 사문난적의 시작이었다.

또한, 유일한 해법이다.

돌아간다.

나 역시 초심으로.

하여, 오늘의 쟁의는 정사에 기록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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