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홍위병(紅衛兵)(1)
나는 세종의 길을 천명하고 군적을 불태웠다.
과거 몇 번 경험하였던, 압도적인 환호를 동반한 천세의 연호는 없었다.
수천 명의 인파였으나 침묵하며 화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의 감정을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의 현장에서 내가 느낀 건 사대부의 지독한 회한(悔恨)과 백성이 느꼈을 컴컴한 질곡(桎梏)에서의 해방감이었다.
이러한 감상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군포의 역사는 파란만장하였다.
그리고 뒤의 일은 너무나도 순탄했다.
가장 먼저 작금의 상황을 유발한 공신(功臣)들의 처우였다.
-대감. 소인들은 억울합니다.
참으로 뻔뻔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억울하다는 말이 이토록 가증스러운지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근처 사족과 친분을 맺은 건 사실입니다. 한데, 어찌 이것이 죄가 됩니까.
게다가 두 눈으로 군적을 불태우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귀로 모든 내용을 들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법 머리를 굴려 도출한 핑계였다.
즉,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바라봤기에 우상숭배로부터 멀어지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을 너무나도 잘못했다.
애석하게도 아예 틀려먹었다.
-누가 사사로운 관계로 탓을 하였나?
-예……?
-친분을 쌓을 수도 있지. 설마 이를 문제 삼아서 자네들을 잡아 왔겠나?
-대감……?
-자네들, 군포를 횡령하지 않았나?
-대, 대감. 그건…….
-합당한 처우를 내릴 것이네.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게나. 그게 무병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니까.
아쉽게도 조선에서 사형이라는 건 쉽사리 집행되는 형벌이 아니었다.
군포를 횡령한 죄로는 삭탈관직과 유배형이 적당했다.
또, 괜히 무리하여 사형을 집행한다면 여기저기서 사유를 물어볼 것이니 이 또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공신 대우를 해주고 싶은 나로서는 애석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일선의 개입을 절대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생각이 없었다.
이리한 이유는 간단했다.
세종의 길이 선언된 기념비적인 사안의 시발점이 고작 이일선의 협잡이라는 기록을 정사(正史)에 남기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또, 미치도록 정직한 사관의 붓이 ‘조선의 사대부가 이일선의 세 치 혀에 놀아났다’고 적는 걸 지켜볼 의사도 전혀 없었다.
모든 건 오직 조선의 자생적 노력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법이다.
하여, 군관의 처벌은 군포의 횡령으로 마무리했다.
물론, 앞서 내가 이일선의 이름 석 자를 언급하였기에 문제의 소지는 있었다.
과연 누군가 내게 물었다.
-대감. 한데, 이일선은 어찌 된 것입니까.
-아. 오해였네.
-예?
-오해였어.
-허. 대감. 어찌 그런 모멸을 오해라고 덮으십니까.
-자네 지금 내게 따지는 건가?
-그게 아니라…….
-이름이 뭔가.
-…….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세상은 다르게 알았다.
-졸렬하여 최고의 복수를 하신 걸세.
-암. 우리 사대부에게 이일선의 간자라는 말보다 치욕은 없으니까.
-더 놀라운 건 그간의 졸렬함이 인내를 발휘하였다는 걸세.
-결국, 마침내 폭발하여 이일선을 언급하신 것이군.
-참으로 위대한 졸렬함이 아닐 수 없네.
-두렵군.
대충 내가 졸렬하여 발생한 일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역사의 ‘오늘’이 될 당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대감.
-말하게.
-살아서는 조선을 도왔고, 죽어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넋을 기릴 사이는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옳다.
-장례(葬禮)를 치러도 되겠습니까?
-너희와 함께 마지막을 지켜볼 것이다.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재차 화마(火魔)가 자라났다.
만력제라고 불렸던 망령의 상징물들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모두 말없이 화마를 바라만 봤다.
그 일렁임이 참으로 생기가 넘쳤다.
-오늘.
다시 오늘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이 땅에 똬리를 틀었던 그들의 흔적은 오늘로써 영원히 지워졌다.
-우리는 승리했다.
-이는 진실로 쾌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말했다.
-이대로 해산하지 말고 주막이라도 들르게.
-예?
-종일 백성의 생업을 방해했으니 자네들이 뭐라도 해야지.
-아.
-이 또한 세종의 길이 아니겠는가?
뜨거웠던 역사의 ‘오늘’은 그렇게 끝났다.
조선의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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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 안팎은 어수선했다.
관리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입도 부지런했다.
걸으면서도 쉬지 않고 대화했다.
“소식 들었나?”
“서둘러서 말하게.”
“세종의 길을 익히는 모임이 생기고 있다더군.”
“그 길은 어디로 가면 보이나? 그런데 우리는 이 길이 맞나?”
“숨이 차는군. 일단 우리는 이 길로 가면 관청일세. 어쨌든 아마도 그 길 자체를 토론하고 익히는 게 아니겠는가.”
“하면, 방향부터 찾아야겠군.”
“이 사람아. 방향은 중대본이 가리키고 있네. 하면, 어찌 걸어갈지를 봐야지.”
“참으로 우문현답이로군.”
또, 틈나는 대로 두 명이 모이면 눈치를 살폈고, 세 명이 모이면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게. 호포제가 아니라 군영 해산이었네. 이를 토대로 볼 때 세종의 길은 점진적 개혁이 아니라 급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걸세.”
“아닐세. 자네는 참으로 틀렸네.”
“아니, 어째서 틀렸다는 건가?”
“세종의 길은 애민이라고 하셨어. 하면, 점진과 급진이 아니라 애민에 집중해야지.”
“오.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닐 수 없군.”
다양한 토론이 오고 갔다.
“그런데 모임이 있다던데 들었나?”
“모임?”
“세종의 길을 탐하는 모임이라고 들었네.”
“그런 모임이 있으면 나 좀 소개해 주게.”
“내 말을 어디로 들었나? ‘있다’가 아니라 ‘있다던데’라고 하였어.”
“모르면 됐네.”
대화의 주는 세종의 길을 탐하는 모임이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릴 정도로 정확한 실체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이보게. 원래 좋은 건 나눠야 하는 법일세.”
“그건 맞지.”
“하면?”
“퇴청하고 나를 찾아오게.”
“벌써 기다려지는군.”
“아니지. 퇴청은 늘 기다리는 시간이라서 그런 것일세.”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네.”
길을 찾기 위한 관리들의 대화로 궐 안팎은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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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달랐다.
숨을 쉴 때마다 몸에서 힘이 솟구쳤다.
이곳이 정말 내가 알던 조선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등청(登廳)하러 가는 길이 이토록 즐거울 일이란 말인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군자로 보였다.
그랬다.
주희가 죽고 세종이 부활한 조선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마차도 보내고 뒷짐 쥐고 여유롭게 거닐었다.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랬는데……
“대감.”
나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쉬지 않고 나오던 웃음을 순식간에 거두었다.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용히 따라오게.”
그는 바로 백광현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렀다.
잠시 기다리자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곧장 돌아섰다.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백주에 나를 찾았다?”
“대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들을 말이 있더냐?”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제법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쉬지 않고 눈치까지 살핀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
“소인을 변방으로 보내주십시오.”
“변방?”
의아하여 유심히 살폈다.
다시 보니 다급하고 눈치를 살폈으나 위축된 모습은 아닌 듯했다.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말하게.”
“익혔습니다.”
벌써……?
정말 기함할 정도의 속도였다.
“의술에 도입해보고 싶습니다.”
“묻겠네.”
“예.”
“몇 구의 시신을 해부했나.”
“수십 구입니다.”
엄청난 수였다.
한마디로 죽은 이는 모조리 배를 갈랐다는 말이었다.
내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
내가 사자(死者)에 대한 연민은 아니었다.
현대인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해부학에 대한 이해가 이 시절의 기준과는 아예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백광현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인이었기에 눈치를 살핀 것이었다.
내가 우려한 건 딱 한 가지였다.
“탈이 있었나?”
“없습니다.”
“자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인이 홀로 다 하였습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대감. 이를 집대성하려면 변방으로 가야 합니다.”
“…….”
“팔다리가 부러지고 내장이 찢어진 병자를 직접 봐야 합니다.”
“…….”
“도성의 위생국에서도 충분히 많은 병자를 만날 수 있으나, 기존 의술의 토대를 벗어나기에는 소인에게 어려움이 많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목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위생국에서, 외과와 해부학을 전면적으로 도입하기는 어렵다. 그가 좋은 시선으로 백광현을 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한, 다른 의원의 시선도 아예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병자의 치열함은 변방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원하는 지역이 있는가.”
“평안도의 국경이면 좋을 듯합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큰 기근이 스쳤던 국경이기에 그러합니다.”
그간 본 백광현은 대의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대의는커녕 선의도 찾기 어려웠다.
의술에 미친 광인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했다.
자신의 의술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백성의 칭송을 받는 의원이 될 수도 있고, 지탄받는 의원도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작금의 백광현은 조선에 한없이 이로웠다.
“더 필요한 건 없는가.”
“여비(旅費)를 조금이라도 보태주십시오.”
“…….”
“아니, 넉넉하게 내어주십시오.”
“참으로 당당하군.”
“소인이 이동하다가 굶어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이왕이면 튼실한 준마 한 필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요청들.
그냥 VIP 특별 코스로 모시기로 했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 볼수록 보통이 아니군.”
“송구합니다. 하지만, 모두 필요합니다.”
“…….”
“죽을 때까지 대감과의 일은 함구할 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알겠네.”
돌아서며 스치듯 말했다.
“변방에서 집대성하여 상경한다면 누구도 의술의 괴이함을 묻지 않을 것이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련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니까. 훌륭한 선택이네.”
백광현의 표정은 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
백광현과 헤어진 나는 속도를 내었다. 아무래도 이러다 지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멀찍이서 수십 명의 사대부가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있는 이가 보였다.
윤증이었고, 그 뒤로는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백성들을 지나치며 살벌한 기세로 걸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전장에 나서는 장수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윤증과 유생들의 목적지는 서원이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선두에서 대열을 통솔하는 사대부에게로 향했다.
바로
“주희는 망령입니다.”
윤증이었다.
그의 패기가 넘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미 우리 조선은 주희의 성리학을 폐기하였습니다. 한데, 서원에서 주희를 섬기는 건 대관절 어떤 경우입니까.”
그러자 서원을 지키고 선 사대부가 화답하듯 외쳤다.
“성리학은 주자께서 내셨다. 한데, 주자를 망령이라고 한다면 성리학에 의미가 있는가.”
“주희를 걷어내도 성리학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지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더 익히고 오라.”
“이토록 꽉 막히셨으니 시대의 조류를 모르시는 겁니다.”
“하! 건방지도다! 일천한 학문으로 감히 주자를 모욕하는가!”
이건 그거였다.
-어른들은 몰라요.
그리고
-공부나 해라.
딱 이거였다.
아주 흥미로웠다.
제일 재미있었다.
조선에서 자발적인 홍위병(紅衛兵)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윤증의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우리는 세종의 백성입니다. 한데, 왜 주희를 욕하면 안 됩니까? 다른 나라 사람인데 말입니다.”
멋지다.
윤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