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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57화 (157/298)

157화 개국(開國)(1)

일찍이 사문난적을 천명했다.

이후 위정척사와 원리주의가 주창되며 성리학의 르네상스가 열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다시 되돌아보니 절대 르네상스라고 부를 수는 없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는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니다.

됐다.

이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윤증이 주창한 실학의 본질을 살펴봐야 한다.

일찍이 민본의 기치로 역성을 도모하였던 개국 공신들이 있다.

그들이 만들었던 압도적인 영광을 배우고 익혀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니, 가히 조선판 르네상스라고 부를 수 있다.

도식적으로만 연결할 때, 애초 세종의 길을 가능하게 한 공신들의 위대한 길이다.

이를 부정할 근거는 존재할 수가 없다.

또, 바람직하다.

문제는 세상만사가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위대한 길이 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종래 내가 주창하였던 세종의 길이라는 건 ‘고작’ 주희를 부정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길은 ‘성현’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어째서……?

공자의 위패는 중요하지 않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주희를 끌어내렸는데 공자가 무슨 대수라고 어찌하지 못하겠는가.

본질은 결국 정치(政治)였다.

조선에서 성현이라 하면 주희와 동향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도 있었다.

백 보 양보하여 너무 옛날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5현(五賢)이라고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중요했다.

특히 이황은 남인의 세계관을 구축한 인물로서 아직도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정치적, 사상적 거물이었다.

윤증이 도모하고자 한 성현에는 바로 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묘에 조선 사람이 배향되어 성현이 된 작금의 현실을 전면 부정했다.

그들의 명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더는 윤증의 의도 혹은 생각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위대한 길이 품은 본질이 개국 이래 가장 정치적이니 말이다.

즉, 순수한 뜻을 품어 발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혈연과 지연으로 공고하게 묶인 붕당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으로 현실이라는 이해 집단이 인지한 것이다.

결과, 조선이라는 공동체 안에 거대한 불을 지르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본부장.”

오금이 저릴 정도로 싸늘한 허적의 목소리였다.

눈빛 역시 사람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죽일 정도로 살벌했다.

귀를 닫고 먼 산을 쳐다보는 수준으로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본능의 엄중한 경고가 엄청난 속도로 엄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허적의 말이 한 박자 빨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위대한 길을 동의하셨소?”

“호판.”

“심지어 그토록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이외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누구던가.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서인의 영수이자 산림의 영수인 송시열이 아니던가.

-송시열이 위대한 길이라는 제3의 물결을 선언한 출범식에서 축사(祝辭)했다.

-송시열이 보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된 것이니, 기존 질서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대한 길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외다.”

파르르 떨리는 수염을 보니 허적의 감정이 뇌리까지 전해졌다.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장 굉장한 한숨을 내뱉었다.

“장계를 보지 못하셨소?”

“아.”

“매일 기근이 발생하여 백성이 굶고 있소.”

“내가 어찌 모르겠소.”

“윤증의 말이 옳고 그름이 아니외다. 실학? 다 좋소. 주창할 수 있소. 한데, 기어이 선전포고하듯 진행하여 조정의 분란을 키울 필요가 있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백성은 굶고 있는데, 우리는 다시 세 치 혀를 움직여서 다투게 되었다는 말이외다.”

잔소리가 갈수록 일품이었다.

“대관절 본부장과 윤증은 점진적이라는 말을 모르오? 진정 그러하오?”

어지러울 정도였다.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우회로를 찾았다.

“기근 대책에 뾰족한 수가 있소.”

“뾰족하지 않으면 본부장을 탄핵할 것이오.”

“위대한 길을 배우는 것이오.”

“가던 길이나 가시오.”

“…….”

허적은 싸늘하게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홀로 남은 나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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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바라보는 건 어려웠다.

괜히 쳐다봤다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봉변을 치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니, 필시 그리될 것이다.

하지만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아니,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도 윗분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싸움터가 윗분들이 애지중지하는 ‘서원’이었다.

며칠 지나긴 하였으나 전운(戰雲)은 여전했다.

슬쩍 쳐다만 봐도 느껴졌다.

사대부 혹은 양반이라고 불리는 윗분들의 노여움이 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순번을 정한 듯 자연스레 서원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는 오직 윗분들의 다툼이 너무나도 궁금하여 발생한 일이었다.

물론, 괜한 화풀이에 당할 수도 있으니 길게 머무르지는 않았다.

서원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둔 곳이었다.

백성들이 눈치를 살피며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래?”

“그건 알 수 없지. 확실한 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걸세.”

“그렇지? 분위기가 험악하더군.”

“노비에게 들어보니 서원의 위패를 불태웠다더라고?”

“그러면 이제 서원은 없어지나?”

“서원이 없어질 거면 건물을 불태워야지.”

“그러면 왜 싸운 건가?”

“모르지.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겠지.”

“하긴. 그러니 그거 하나 불태우고 성질을 낸 거겠지.”

“몇십 명이 몰려갔다던데 결과가 참으로 위대하지 않나?”

주변을 기웃거리며 수소문해봐도 쉽사리 알아낼 수는 없었다.

싸움의 현장에 있던 백성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무슨 사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분명하게 조선 말을 하며 싸웠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듣고 있을 때 어지러울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나라 사람 제사로 싸운 것 같은데?”

“제사?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

“놀라운 일이지 않나?”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그리고 자기들은 누구의 백성이라고도 했다지?”

“자기들이 누구 백성이래?”

“큭. 모르지. 근데 우리는 그냥 백성이지. 누구 백성이 아니라.”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되는군.”

“큭. 한마디로 그냥 싸운 걸세.”

“비싼 쌀밥 먹고 할 짓이 없으니 백주에 싸움이나 하는 걸세.”

백성들이 구시렁거릴 때 노인 한 명이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아. 내가 말해주겠네.”

연륜이 느껴지는 흰 머리와 주름살이었다.

압도적 연장자의 등장은 절로 자세를 겸손하게 했다.

“거. 제사로 싸웠다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왜 싸우겠나? 재산 다툼이 발생한 거지.”

“근데 다른 나라 사람의 제사였습니다.”

“다른 나라에 받을 게 있나 보지.”

“아.”

절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명쾌한 설명이었다.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 백성이라는 것도 마찬가질세. 다 조선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어르신.”

“다른 나라에 있는 재산이라도 조선의 법도에 따라서 나눠 먹자는 뜻이지.”

“아.”

이보다 간단할 수가 없다.

노인은 방긋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재산이 상당한가 보군. 체면을 중시하는 윗분들이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싸우다니.”

“나름대로 격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네. 누가 재산을 상속받더라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니 일이나 하게.”

“아.”

“내가 자네들 나이 때는 말일세…….”

노인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백성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압도적 연장자는 이러했다.

일몰이 다가왔을 때에야 기나긴 말은 끝났다.

그가 쉬엄쉬엄 걸으며 사라졌다.

무척이나 거대했던 존재감의 공백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일제히 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 늦게라도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근데 무슨 싸움을 그리하나? 참 고상하게도 싸우더라고?”

“큭. 서책이나 읽는 윗분들이 싸울 줄은 알겠나?”

“슬쩍 밀었는데 밀리는 것도 웃겼고, 버티지도 않는데 힘겹게 밀어내는 것도 대단하더군.”

“큭큭. 그건 싸움이 아니라 어깨동무를 격하게 한 걸세.”

“그 와중에 목소리는 어찌나 크던지.”

“그거 하나는 잘하지 않겠나? 허구한 날 서책 잡고 말만 하는데.”

“하하하.”

“나라면 팔다리를 잡아서 집어 던졌을 것이야.”

“하하하. 참으로 보고 싶은 광경이군.”

백성들은 박장대소했다.

모처럼 사대부들이 큰 웃음을 준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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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더운데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다.

더위의 원인이 움직일 줄 알기 때문이었다.

“…….”

윤휴는 바쁘게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눈동자가 바빴다.

나도 함께 움직여주고 싶긴 한데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냥 빤히 쳐다만 봤다.

“대감. 이참에 서원을 정리하실 생각이라고 들었습니다.”

“자네, 정세 판단이 왜 이리 둔해졌나? 현재 화두는 서원이 아닐세. 5현이지.”

“왜 이러십니까. 5현을 어찌하겠다는 건 도산 서원과 전면전을 펼치겠다는 걸 의미합니다.”

조선 사회에서 서원의 위상은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다.

퇴계학파의 본산인 안동의 도산 서원은 영남 지역 유림 사회를 주도했다.

도산 서원에서 발하는 통문은 최고의 권위가 있었다.

그러니까 윤증은 정말 엄청난 싸움을 시작한 것이었다.

“대감.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적기(適期)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백호. 서론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어떤가.”

서로 간을 보는 건 안 해도 될 정도의 사이는 된다.

그런데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꼭 서두를 길게 잡는다.

누군가가 아니라 다 그러한 걸 보면 그냥 사대부라는 DNA의 부름이 분명했다.

“대감. 만일 서원이 철폐된다면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선문답을 그만두더니 질의라니. 이거 참 놀라운 일이군.”

“서원의 패악질이 아무리 크더라도, 조선의 위정자가 사대부인 이상 절대로 사라질 수 없습니다.”

원 역사를 되돌아보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흥선 대원군 시절에도 조선의 위정자는 여전히 사대부였으니까.

결국, 서원의 폐단을 조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면, 자네 생각이 무엇인가. 조선의 위정자를 교체하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요.”

“그래서 꺼낸 말이네만.”

“서원은 정치 논리로 없앨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철폐를 이를 수도 있지요. 이는 서원을 더 유지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서원을 더 유지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사대부가 서원을 지탱할 경제적 능력이 소멸해야 합니다.”

폐단의 심화(深化)로 철폐되는 게 아니라, 사대부의 경제적 능력이 소멸해야 한다……?

이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아예 새로운 의견이었다.

흥미가 동했다.

아니,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발생한 태도의 변화가 너무 노골적이었을까?

윤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턱을 슬쩍 올렸다.

한껏 오만하게 나를 내려보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일부러 말도 안 꺼내며 시간을 끈다.

의도가 능히 짐작됐다.

참으로 건방진 인사가 아닐 수 없다.

불쾌하여 말을 꺼냈다.

“자네…….”

“서원의 재정은 사실상 사족의 곳간에서 비롯합니다.”

“말을 기다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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