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개국(開國)(4)
이연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빤히 쳐다보려다가 사안이 화급하여 참았다.
“전하. 사직 상소가 빗발치고 있사옵니다.”
사직 상소는 달리 말하면 현직 관료의 파업이었다.
진심으로 사직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군왕에 대한 정치적 항의였다.
그런데 이번 사직 상소는 결이 다른 게 있었다.
바로 주체(主體)였다.
눈에 한 번에 들어오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당상관’이라는 단어였다.
관리가 아니라 당상관.
당상관‘만’ 집단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를 모아냈다는 의미였다.
더 쉽게 말해서 고관대작만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오늘의 사직 상소는 종래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기득권’의 저항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급이 되는 관리만의 사직 상소였다.
그만큼 상황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말 그대로 전선이었다.
정파를 초월한 괴상망측한 대동단결이 고관대작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전하.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그런데
“대단하오.”
내 말에 대한 대꾸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연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느낌 왔다.
무언가 있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송자(宋子).”
하. 진짜.
설마 송자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송자를 여기까지 옮겼단 말인가.
색출해서 죽여버릴 것이다.
홀로 하늘에 맹세할 때였다.
“내가 감히 마주해도 되는지 모르겠소.”
와. 미치겠네?
이연이 이렇게 나오면 내가 답이 없다.
진짜 민망해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딱 정색하며 말했다.
“전하. 아니옵니다.”
“말로만 듣고, 위패로만 보던 성현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
“참으로 영광이오. 보고 또 봐도 되겠소?
”전하. 신이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겸손함이라. 이 또한 배워야겠소. 아니, 적어야지. 내가 실언했소.”
“전하. 신은 전혀 무관한 일이옵니다.”
“아오. 경은 침묵하였으나 모두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소이까. 참으로 대단하오.”
“…….”
엄청난 공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를 아주 그냥 죽이려고 한다.
암살이 아니라 대놓고 칼을 휘두른다.
문제는 퇴로도 없다는 것이다.
“전하. 차라리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윤증은 성현을 죽이라고 하더이다.”
“그 성현은 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사옵니다.”
“같은 반열이 아니오?”
“민망하여 버틸 수가 없으니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민망한 일이긴 하오.”
“…….”
“하지만, 경이라면 능히 품을 수 있는 꿈이기도 하오.”
“…….”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이라면 꿈꾸었을 것이라고 하오.”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아직 본론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론이 이 정도라면 정말 엄청난 것이 다가올 게 뻔하다.
느낌이 최악이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단호하게 나가야 한다.
씰룩거리는 볼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신은 꿈을 꾼 적도 없습니다.”
“꿈이니 꿔도 되는 게 아니겠소? 심지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소.”
“악몽이옵니다.”
“악몽도 꿈이지요.”
“전하.”
“어떻소?”
어째서 이따위 물음에 진심이 담겨 있단 말인가.
눈빛은 왜 이렇게 뜨겁단 말인가.
내 볼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도 거세게 흔들렸다.
최고 수위로 단호해야 할 때였다.
“싫사옵니다.”
“허.”
“전하. 송자 따위는 없어도 해낼 수 있사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있으면 더 좋을 듯하여 그렇소.”
“신은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내가 경의 동의까지 얻어야 하오?”
“…….”
“영 내키지 않으면 동의하지 마시오. 교지에 옥새를 찍어 반포하리다.”
“아니, 무슨 반포까지 언급하시옵니까. 하옵고 어찌 신에게 이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유학자로서 성현의 반열에 오르는 건데 어찌하여 경기를 일으키시오?”
일찍이 이런 뻔뻔함은 경험하지 못했다.
이연이 나를 마녀로 만들려는 게 확실하다.
불태울지도 모른다.
“전하.”
“교지를 내릴까 하오.”
“기어이 그리하신다면 신은…….”
“삼봉 정도전의 신원을 윤허할까 하오.”
“기쁘게 천세를 연호할 것이옵니다.”
역시.
가타부타 사안을 말하지 않아도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삼봉 정도전의 복권(復權)이 가질 파급은 파도가 아니라 해일이다.
그러나 이를 명쾌하게 도출해낼 시야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다.
또, 사직 상소를 던진 당상관 중에는 없다.
“시기는 경에게 맡기겠소.”
이건 나를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정도전을 부활시키기 전에 좀비 하나 굴려볼 정치적 의도였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송자가 이 땅에 탄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래도 생각은 해보시오. 썩 나쁘지는 않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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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해지는 게 어떤 건지 알아버렸다.
진짜 먼지가 안쓰럽게 쳐다볼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더니 정신이 어지러웠다.
터덜터덜 걸어갈 때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윤선도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생전에 걸어 다니는 성현을 볼 줄은 몰랐소.”
“…….”
“영광이외다.”
“…….”
“걸어 다니는 성현이라니.”
이런 썩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윤선도는 재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사라졌다.
불의의 기습에 당하였기에 주먹을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가기도 전이었다.
“허. 이런.”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쳐다보니 허적이었다.
필시 어떤 일이 생긴 것이다.
황급히 물었다.
“왜 그러시오?”
“조만간 찾아서 가르침을 청하겠소.”
“…….”
“성현의 가르침이라니. 유자로서 영광이외다.”
“…….”
“하면, 살펴 가시오. 송자시여.”
이제 허적도 놀린다.
난세는 이토록 어지럽다.
너무 지쳤다.
혼자 있고 싶었기에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그런데 더워졌다.
안 봐도 윤휴였다.
“영광입니다.”
“자네 팔다리를 잘라버리기 전에 당장 사라지게.”
“이미 뵈었으니 되었습니다.”
“…….”
대체 어찌하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어디에도 ‘송자(宋子)’의 탄생은 없어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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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도착한 집무실이었다.
사실 올 일이 거의 없었다.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누구를 만나는 게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지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쉬게 할 겸 만날 사람도 있어서 왔다.
인기척이 들렸다.
두 명이었다.
돌아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송준길은 쓴 미소를 지었다.
“왔는가.”
윤선거도 쓴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먼저 송준길을 바라봤다.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생각이라. 선택의 여지가 애초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네.”
“아니지요. 동의할 수 없다면 물러서실 수 있습니다.”
“물러서면 어찌 되나?”
“형님께서 서인의 영수가 되는 것이지요.”
“…….”
기득권의 수장(首長)을 결의하라는 말이었다.
여지를 두지 않은 말에 송준길의 쓴 미소는 더 진해졌다.
나 역시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서인의 영수, 산림의 영수…… 명예로운 자리일세. 그러나 이를 탐하였다면 애초 자네에게 양보하지도 않았네.”
“양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소제의 뜻을 따르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허. 아직도 그리 여기시는가?”
“물론이지요.”
“내가 양보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무슨 수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송준길이 던진 농에 무거운 마음이 내려갔다.
지금 산림의 영수를 도맡는 건 참으로 고단할 것이니 말이다.
정치가 이렇게 복잡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듯 말했다.
“소제가 송자입니다.”
“…….”
“송자를 넘으실 수 있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소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세상이 이리 만들고 있습니다.”
“…….”
송준길의 입에서 더는 언어가 창조되지 않았다.
흉한 거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이만하면 됐다.
그런데
“사석에서 문묘에 배향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게 아직도 선하게 기억나거늘.”
스치듯 들리는 송준길의 말은 아주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듣지 못한 척하며 윤선거를 바라봤다.
표정이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윤증이 아들이니까.
되돌아보면 중대본의 정책은 혁명 혹은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범주의 것들이었다.
파격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종래 조선의 틀에서 능히 가능한 부분들이었다.
그래서 ‘애민’을 내세운 세종의 길로 나아 갈 수 있었다.
반면, 위대한 길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마땅했다.
개혁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자면 방법은 하나였다.
혁명에 버금가는 탄력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늦게라도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개혁이 절실했다.
오직 실력으로 위대한 길을 입증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농업의 국가 조선을 농업이 기본인 나라로 변모시켜야 한다.
이를 두고 혁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하겠는가.
남은 건 한 가지였다.
누가 주도할 것인가.
성균관 유생들이 정책을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국을 이끌어가는 정책이라는 건 구호로 정할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의 정책은 설익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를 떠안을 사람이 필요한데, 한 명밖에 없다.
너무나도 당연했다.
“미촌.”
자고로 피는 물보다 가까운 법이다.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지 않은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빠 찬스다.
이건 좋은 아빠 찬스다.
그러니 괜찮다.
“자네가 나서야지. 안 그런가?”
“…….”
“설마 결심을 세우지 못하였나?”
“하아. 내 필생의 신념과는 다를지라도 어찌하겠는가.”
윤선거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시대의 요구를 따라야지.”
“자네 아들이기도 하고.”
“…….”
짓궂게 농을 던지자 윤선거는 시선을 피했다.
이만하면 됐다.
“한데, 우암. 중대본의 인사들은 어찌 되는가?”
“퇴계 선생의 일입니다. 그들이 나서기는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 정도는 배려해줘야겠지.”
“정책은 남인이 하고, 싸움은 서인이 하는 것이지요.”
“무슨 말을 꼭 그리 맞게 하나?”
분위기는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작은 미소를 보태며 적당한 웃음이 온기를 더했다.
“박세당과 논의는 해봤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리학 원리주의를 주창하였던 인사일세. 반발이 있을 것인데.”
“그 또한 그의 선택이지요.”
송준길의 우려를 불식하듯 엷게 웃으며 말했다.
“작금의 움직임이 가진 본질은 조선의 환골탈태입니다. 고작 분서갱유를 도모할 수는 없지요.”
주희의 학문으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면 취하는 게 옳다.
조선은 이토록 넓게 보듬으며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박세당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한데,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듣고 있던 윤선거가 툭 던지듯 말했다.
묘한 미소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 독배를 내리셨더군.”
“치우게.”
“감축드리네. 평생의 꿈을 드디어 이루셨군.”
“…….”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망할 놈의 송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