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개국(開國)(8)
화마의 일렁임은 참으로 유려했다.
현판과 위패의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자 최선을 다하여 춤을 췄다.
물결치듯 이리저리 흔들리던 화마의 기세는 점차 사그라들었으나 여진(餘震)은 강력해졌다.
사대부들은 덜덜 떨면서 화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나 역시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그 꼴을 보며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의 눈에 담긴 두려움을.
그래서 가소로웠다.
“수일 내로 대성전의 진정한 주인을 모실 것이다.”
주희는 죽어서 조선의 정신을 지배했다.
개국 공신의 위패를 올리어 이를 밀어낼 수 있다.
그리고
“내 말을 이해하였느냐?”
5현은 죽어서 기득권의 육체가 되었다.
이들의 부관참시야말로 서원 철폐의 신호탄이었다.
“서원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 수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나는 저들이 격렬하게 일어나길 바라였다.
하늘에서 펼쳐지는 공중전은 내가 수행했다.
이제는 지상전이 펼쳐질 것이다.
나보다 백배는 뛰어난 이들이 주도할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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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성균관 대성전에서 5현의 위패가 불탔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았으나 이토록 전격적인 집행이 감행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예상할 필요조차 없던 일이 발생했다.
도성 인근 서원은 큰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날벼락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네.”
“5현의 위패를 불태우다니.”
“심지어 서원의 철폐가 언급되었다네.”
“있을 수 없는 일일세.”
“부당함을 알려야 해.”
“암. 5현의 위패도 복원해야지.”
대략 중지(衆智)가 모일 때 누군가가 말했다.
“듣자니 서원 개혁을 도모할 듯하던데.”
“이미 5현의 위패가 불에 탔네. 그 자체로 서원은 공격을 받을 것이네.”
“그렇지. 암.”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태듯 말했다.
“우리가 그간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얼마나 많은 구휼미를 내놓았나.”
“그런데 돌아오는 게 고작 이런 탄압이라니 참으로 속이 답답하네.”
“본인은 성현의 자리에 오르고 선대를 그토록 부정하다니.”
“모든 영광을 홀로 독식하겠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토록 꿈꾸던 성현에 올랐는데 유생들이 5현을 더 존경하니 얼마나 속이 불편하셨겠는가.”
“우암 대감이라면 능히 그럴 만도 하지.”
격한 토로가 이어졌다.
묘한 건 점차 송시열을 향한 규탄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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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1
윤선거는 아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살폈다.
며칠 새 정말 많이 상했다.
마음고생이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장성한 아들이 뚜벅뚜벅 걸어가기에 애써 모르는 척하였으나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윤선거 본인에게 감히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도성이 떠들썩하니 들릴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길을 주창한 이후 많은 이가 험한 말을 하였다.
심지어 사부인 송시열의 꿈을 방해한다고 욕하는 이도 많았다.
위대한 길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에게 비난받은 것이다.
마음이 아팠으나 옳은 길을 걸었기에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내어줄 것이 있어 불렀다.”
“이르십시오. 아버님.”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준비했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문서를 내밀었다.
“얼마 전 네 스승과 대화를 나누었다.”
윤선거는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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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였다.
벗으로서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단번에 달려갔다.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말했다.
“감축드리네.”
굳이 사가까지 달려왔건만 송시열은 눈을 부라렸다.
“그만해주면 무척이나 감사하겠네.”
과연 성현의 품격에 어울리는 화법이었다.
윤선거는 엷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꿈을 쟁취하였으니 얼마나 뿌듯하시겠는가. 진심으로 감축드리네.”
“당장 귀가를 해주면 감사하겠네.”
“아쉽군. 제법 괜찮은 정책을 찾았는데.”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시열이 눈을 부릅떴다.
급기야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기까지 했다.
과연 송자다웠다.
“이런. 자네를 너무 홀대했군.”
“앉아도 되겠나?”
“서둘러 앉게. 바로 자네를 위한 자리일세.”
“살아 있는 성현으로부터 이런 환대라니. 내가 인생을 잘 살았나 보군.”
“이상한 말이 서두에 깔린 듯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지. 나는 괜찮네.”
무언가 꽉 억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윤선거는 심장에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가볍게 목을 풀듯 긁으며 말했다.
“우암. 그간 우리는 왜국으로부터 매년 2만 7천 근의 동을 구했네.”
“상단이 가져온 수량도 있을 것이네.”
“크게 의미가 없는 수준일세. 보태도 3만 근에 불과하니 말일세.”
“3천 근이면 큰 의미가 없긴 하군. 한데, 동은 어찌하여 언급하나? 무역을 확대하면 쌀을 구해야 할 것인데? 또, 왜국으로 확보할 수 있는 쌀의 수량도 적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하늘이 내린 난세를 대처하는 대신들의 시야는 너무나도 좁았다.
일국을 책임져야 할 이들이 고작 한 치 앞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모든 걸 ‘쌀의 확보’로 귀결시키고자 했다.
이는 종래 조선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개국공신들이 걸었던 길이 아니었다.
그 시절, 짧았던 십수 년의 조선이 걸었던 위대한 길은 정녕 아니었다.
“우암. 시행하는 모든 정책으로 당장 쌀을 확보하려고만 한다면 도모할 수 있는 건 없네.”
“뭐……?”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로 조선은 과정을 모두 생략했네.”
“과정의 생략……?”
송시열은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얼이 나간 것만 같았다.
윤선거는 차분하게 벗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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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생략……?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선의 역사만 그러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얼하여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할 때 윤선거의 목소리가 자욱하게 울렸다.
“오직 쌀만 바라봤기에 나라가 가난했고, 쌀을 구하고자 농업만 육성하였네. 그래서 틀린 걸세. 우암. 쌀을 넉넉하게 하여 국고를 채우는 건 최종적인 목표이지 않은가.”
완벽하게 착각했다.
경시 대기근은 아직 멀었다.
대비하여 준비하는 건 맞지만 오늘의 결과를 뒤로 미룰 수 없다.
하여, 모든 걸 쌀의 확보에만 중점을 맞췄다.
그것과는 별개로 해낼 수 있는 걸 가져가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너무나도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경신 대기근을 대비하고자 하지 않고, 미루었던 일이 너무 많았다.
할 수 있는 걸 모두 하는 게 옳았다.
오늘 드디어 나의 문제를 깨달았다.
어디서 무엇이 틀려먹었는지.
“우암. 왜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한다면 연간 동 150만 근을 확보할 수 있네.”
“…….”
“능히 화폐를 보급할 수 있는 수량인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네.”
“…….”
“조선이 농업을 중시한 건 개국공신들이 선택한 것이 맞네. 한데, 왜 그리하였던가.”
“오랜 난세로 농업 자체가 근간이 없었으니 일으켜야지.”
“옳네. 거기에 하나가 더 있지 않은가. 고려 시절 성세를 누리던 그 많던 상단이, 원이 무너지자 일각도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졌네. 동시에 일국의 재정에 버금가는 화폐가 가치 없는 종이가 되었어.”
“눈으로 직접 보았을 것이니 엄청난 충격이었겠지.”
“그렇지. 그러니 당장은 농자천하지대본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시대 정신과 부합하였네. 한데, 이후 조선은 더 나아가지 않고 제 자리에만 있네. 이는 틀린 일이 아닌가.”
“그렇지. 자네 말이 옳네.”
“하여, 조선의 상업은 아직 미숙하네. 그러나 총력을 기울인다면 어찌 성장하지 않겠는가. 그 성과로 국고를 채운다면 조선은…….”
이어진 말은 내 심장을 터질 듯 뛰게 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을 수 있네.”
가난하지 않은 조선.
이는 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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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의 말을 들은 윤증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부친과 스승의 대화에 담긴 깊이를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폐의 보급은 상업의 육성만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님.”
“단지 체질의 개선이 아니며, 또 다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함도 아니다.”
무거웠다.
목소리가 그러한 게 아니라 내용 자체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윤증은 심장을 누군가가 꽉 쥐어버린 것만 같았다.
위대한 길을 주창하고 성현의 위패를 치웠으나, 이는 또 다른 현실의 무게였다.
“동전을 주조하여 조선 팔도에 급격하게 보급해낼 수 있다면…….”
“서원을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옳다. 이는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아니, 사족의 향촌 기득권도 흔들어버릴 수가 있다. 너는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소자가 어찌 아버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겠습니까. 모두 새겼습니다.”
윤증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윤선거는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다면 지금 말해야 할 것이다.”
“…….”
“내가 나서도 될 일이다.”
“아닙니다. 소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째서 네가 해야 할 일이더냐?”
“위대한 길이 곧 민생이라는 걸 입증해야 합니다. 소자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여 아버님께서 짐을 덜어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단지 해야 하기에 나선다면 어찌 정도라고 하겠느냐?”
“해야 하기에 나서니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윤증은 다시 말했다.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수행하기에는 소자가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를 어찌 잊겠습니까.”
윤선거의 아들 윤증.
날 때부터 모든 걸 가졌고, 누려왔다.
어떠한 부족함도 없었다.
이 지극한 사실을 새기며 나서겠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바르고 올곧은 마음가짐이었다.
사대부라면 누구라도 이리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대부가 단지 이를 누리기만 하였던가.
그 모든 고리는 바로 서원이었다.
윤선거는 부드럽게 웃었다.
“버거우면 말하거라. 네 아비가 아직은 정정하니 능히 거들 것이다.”
“소자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윤증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무릇 효는 충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소자가 효도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참으로 대견하구나.”
“한데, 아버님. 주된 전선을 사부님이 구축하셨습니다. 거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하하하. 네 사부이자 나의 벗인 우암 송시열은 이미 송자가 되었다. 무엇을 걱정하느냐.”
“소자가 우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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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방긋 웃었다.
언제 봐도 영특한 제자였다.
일전에 유민의 수를 근사치로 계산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제자를 잘 알고 있다.
김서경의 재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희한하게도 특출한 건 숫자의 영역이었다.
다른 분야도 부족한 건 아니었으나 도드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늘 질문이 많았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5현의 위패가 어찌하여 서원의 생명줄인 것입니까?”
하루 전 송시열이 주도한 대성전 화형식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서원을 향해서 선전포고까지 했으니 끝없이 회자하고 있었다.
어린 제자도 이를 귀동냥으로 전해 들었을 것이다.
“서경아.”
“예. 사부님.”
“서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것이다.”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사대부들이 학문을 익히는 곳이 아닙니까?”
“틀렸다.”
“예?”
“서원은 사대부가 위정자로 탈바꿈하는 곳이다.”
“예……?”
김서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의심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스승은 조선 최고의 천재였으니까.
“서원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한데, 그 성현과 관련이 있는 가문이 있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5현만 하더라도 후손들이 있습니다.”
“옳다. 수백 개의 서원에서 5현에게 제사를 올린다. 자연스레 5현의 문중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가문이 되는 법이지. 사사롭게는 혈연으로 연결된 선대의 제사를, 일면식도 없는 사대부들이 성현이라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니 말이다.”
“…….”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후손이며, 문중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면, 그러한 문중이 아닌 사대부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겁니까.”
“승려들이 보살과 친분과 있기에 백성들이 기대겠느냐.”
“아.”
“부처를 섬긴다는 그 자체로 그들은 백성과 가깝다.”
김서경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조금씩 스며들 듯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러했다.
“서원에서 성현을 모신다는 그 자체로, 사대부는 백성이 두려워하는 위정자가 되는 것이다. 우습지 않느냐?”
승려는 부처를 섬겨서 백성과 가깝다.
사대부는 성현을 섬겨서 백성이 두려워한다.
이를 이른 말이었다.
“한데, 사부님. 조선이 유학을 신봉하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위정자를 가깝게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네 말이 옳다. 한데, 사대부가 모두 위정자더냐?”
“예……?”
“사대부는 위정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무리에 불과하다. 관복을 입어야만 비로소 위정자다. 한데, 이 나라는 서원을 통하여 모든 사대부가 위정자로 탈바꿈할 수 있으니 어찌 참담하지 않겠느냐.”
관리가 아니더라도 양반이며 사대부라는 이유로 백성을 벌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조선이었다.
“5현을 성현에서 박탈한다는 건, 서원을 통하여 관복을 입지 않아도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끊어내는 것이다. 그러하니 사대부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찰나 유형원의 안색은 참으로 차가워졌다.
그러나 제자를 향해서 시선이 옮겨지면서 온화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하여, 서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내 말을 이해하였느냐?”
“예. 사부님. 새기겠습니다.”
“참으로 장하구나.”